노년의 품격 ㅡ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노년의 품격 2026.08.08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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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의 품격 ― 늙는다는 것은 빛을 잃는 일이 아니라, 빛의 온도를 바꾸는 일이다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젊은 날의 시간은 늘 앞쪽을 향해 있었다. 조금 더 빨리 가야 했고, 조금 더 높이 올라야 했으며, 남보다 뒤처지지 않으려 발걸음을 재촉했다. 학교에서는 점수가 사람을 줄 세웠고, 사회에서는 직함과 재산이 사람의 자리를 가늠했다. 집의 넓이와 통장의 숫자까지 어느새 한 사람의 삶을 평가하는 잣대처럼 따라붙었다.
세월이 흐르면 숫자는 다른 옷을 입고 다시 찾아온다. 혈압 몇, 혈당 몇, 콜레스테롤 몇, 체중 몇 킬로그램. 평생 숫자에 쫓겨 살아온 사람에게 노년마저 숫자의 감옥이 된다면 조금 서럽다.
몸은 살펴야 한다. 아프면 병원을 찾아야 하고, 필요한 약은 제때 챙겨야 한다. 검진 역시 생명의 울타리가 되어준다. 다만 몸을 돌보는 일과 몸의 수치에 붙잡혀 사는 일은 다르다.
하루의 기분을 혈압계가 결정하고, 밥 한 숟가락을 뜰 때마다 숫자부터 떠오른다면 건강을 지키려다 삶의 맛을 잃을 수도 있다.
칠십 년을 살아온 몸이 스무 살의 몸과 같을 수는 없다. 오래 쓴 찻잔에는 가느다란 금이 생긴다. 수십 년 걸어온 구두 밑창에는 길의 흔적이 남는다. 한자리에서 비바람을 견딘 느티나무에는 굵은 옹이가 박힌다.
그것을 모두 고장이라 부를 수 있을까. 어쩌면 오래 견딘 것들만이 가질 수 있는 문양이다.
사람의 얼굴에 내려앉은 주름도 그러하다. 웃었던 자리에도 주름이 남고, 울었던 자리에도 주름이 남는다. 자식을 기다렸던 밤, 부모를 떠나보냈던 날, 삶의 무게를 이를 악물고 견뎠던 계절들이 얼굴 곳곳에 가느다란 강줄기처럼 흐른다.
주름은 늙음의 흠집이 아니라 한 생애가 지나간 지도인지도 모른다. 노년의 건강은 젊은 몸으로 돌아가는 일이 아니다.
아침에 제 힘으로 일어나 창문을 열 수 있는 것, 따뜻한 밥 냄새에 시장기를 느끼는 것, 좋아하는 사람의 목소리를 알아듣는 것, 햇볕 좋은 날 동네 한 바퀴를 걸을 수 있는 것, 누군가의 농담에 배를 잡고 웃을 수 있는 것.
그 정도면 몸은 아직 세상과 충분히 악수하고 있다. 노년에는 근육 못지않게 관계가 중요하다. 친구 하나 만나러 집을 나서는 발걸음은 생각보다 훌륭한 운동이다.
오래된 친구가 길에서 마주친다. “아직 안 갔나?” “자네보다 하루 늦게 가려고 버티고 있네.”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웃는다. 젊은 귀에는 조금 거친 농담으로 들릴지 모른다. 오래 살아본 사람들에게는 살아 있다는 사실을 서로 확인하는 따뜻한 인사다.
그 웃음 속에는 약병에 담을 수 없는 성분이 들어 있다. 우정이 있고, 추억이 있고, 여기까지 함께 견뎌왔다는 안도감이 있다.
젊을 때는 친구와 만나 미래를 이야기했다. 무엇을 할 것인지, 어디까지 올라갈 것인지, 얼마를 벌 것인지가 화제였다.
노년의 식탁에서는 이야기가 뒤를 향한다. “그때 기억나나?” 그 한마디면 오래 잠들어 있던 시절 하나가 술술 깨어난다.
군대 시절이 돌아오고, 첫 직장의 허름한 책상이 살아나며, 어린 자식의 손을 잡고 시장을 걷던 젊은 아버지가 식탁 한쪽에 앉는다.
먼저 세상을 떠난 친구 이름도 한 번씩 밥상에 오른다. “그 친구 참 괜찮았지.” 그 한마디 뒤에 잠시 말이 끊긴다. 노년의 침묵은 빈 것이 아니다. 사람 하나가 가득 들어 있는 경우가 많다. 밥도 젊은 날과는 조금 달라진다. 젊어서는 몸을 만들기 위해 먹었다면, 나이가 들수록 밥은 사람을 만나기 위한 핑계가 된다. “밥이나 한번 먹세.” 한국 사람에게 이보다 따뜻한 초대가 또 있을까.
시장 골목의 국밥집이어도 좋고, 오래 다닌 칼국숫집이어도 좋다. 김이 오르는 그릇 앞에서 “이 집 아직도 맛이 그대로네.” 말 한마디 나누면 그날 점심은 음식 이상의 것이 된다. 밥은 배만 채우는 것이 아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생긴 빈틈도 채운다.
나이가 들수록 밥상에는 금지표가 늘어난다. 짜면 안 되고, 달면 안 되고, 기름지면 안 되고, 이것도 줄이고 저것도 삼가라는 말을 많이 듣는다. 절제는 필요하다. 몸에 맞게 먹는 지혜도 중요하다. 다만 밥상을 평생 진료실처럼 마주할 필요까지 있을까. 좋아하는 반찬 한 점을 천천히 씹으며 “참 맛있다.” 말할 수 있는 순간. 따뜻한 차 한 잔 앞에 앉아 창밖의 나무를 오래 바라볼 수 있는 오후. 그 역시 삶이 주는 귀한 영양이다.
노년이 되면 잃는 것이 많다고들 한다. 힘이 줄고, 기억이 흐려지고, 만나는 사람도 하나둘 줄어든다. 허나 세월은 가져가기만 하는 장사꾼은 아니다. 대신 무엇을 내려놓아도 되는지 가르쳐준다. 젊은 날에는 체면 하나 지키려고 마음을 많이 다쳤다. 싫어도 웃었고, 보고 싶어도 먼저 전화하지 않았으며, 미안하면서도 자존심 때문에 입을 닫았다. 나이가 들면 그 무거운 외투를 벗어도 된다. 보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먼저 전화하면 된다. “뭐 하나?” 그 한마디면 충분하다. 고마운 사람에게는 아직 귀가 들릴 때 고맙다고 말해야 한다. 미안한 사람이 있다면 기억이 또렷할 때 미안했다고 말하는 편이 좋다. 마음속에 미움을 오래 세놓고 살기에는 남은 방이 너무 귀하다.
욕심 하나 내보내고, 체면 하나 벗어놓고, 묵은 원망 하나 문밖에 세워두면 마음 안에 자리가 생긴다. 그 자리에 사람을 앉히면 된다. 웃음을 앉히고, 햇살을 들이면 된다.
노년의 품격은 많이 가진 데서 나오지 않는다. 더 가질 수 있어도 덜 가지는 마음, 말할 수 있어도 한 번 참아주는 여유, 앞에 설 수 있어도 뒤 사람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태도에서 생긴다. 젊은 시절에는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일이 중요했다. 나이가 들수록 아름다운 것은 낮아지는 모습이다. 자식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는 부모, 후배의 성취를 자기 일처럼 기뻐하는 선배, 어린 사람에게도 배울 것이 있으면 고개를 기울이는 어른. 그런 사람 곁에는 나이가 아니라 그늘이 생긴다. 오래된 나무 밑으로 사람들이 모이는 까닭과 다르지 않다. 나무는 자신이 몇 년을 살았는지 말하지 않는다. 그저 그늘을 내어준다.
노년의 품격도 그러해야 하지 않을까. 자신이 살아온 세월을 자랑하기보다 그 세월로 누군가의 뜨거운 하루를 잠시 식혀주는 사람. 그런 어른 곁에는 사람이 머문다. 말의 모양도 달라지면 좋겠다. 나이가 들수록 목소리를 높이는 대신 말의 온도를 높이는 것이다. “고맙네.” “고생했네.” “괜찮네.” “건강하게 오래 보세.”
세상에는 긴 연설보다 오래 남는 짧은 말이 있다. 사람을 일으켜 세우는 말은 대개 짧다. 젊은 날에는 꽃이 피는 것만 아름다운 줄 여겼다. 오래 살아보면 지는 꽃에도 품위가 있음을 보게 된다. 새잎만 생명인 줄 알았는데 낙엽에도 완성이 있다. 한낮의 태양만 찬란한 줄 알았는데 사람의 눈길을 오래 붙드는 것은 저녁놀이다. 저녁은 한낮보다 뜨겁지 않다. 그 대신 산을 붉히고, 강을 물들이고, 지나가는 사람의 얼굴에까지 자신의 마지막 빛을 나누어준다. 노년도 그러한 시간이면 좋겠다. 자신을 더 크게 드러내는 시간이 아니라, 평생 품어온 빛을 주변에 조금씩 나누어주는 시간. 아이에게 한 번 더 웃어주고, 친구의 손을 조금 더 오래 잡고, 후배에게 따뜻한 말을 하나 남겨주는 시간. 그렇게 건네진 빛은 사람의 몸보다 오래 산다.
흔히 노년을 황혼이라 부른다. 황혼이라는 말에 쓸쓸함부터 묻힐 까닭은 없다. 하루 중 가장 깊은 색은 해 질 무렵 나타난다. 붉음과 금빛과 보랏빛이 서로의 경계를 허물고 한 하늘에서 어우러진다. 젊은 날이 하나의 색을 주장하는 시절이었다면 노년은 여러 색을 품을 수 있는 시절이다.
성공도 품고, 실패도 품고, 사랑도 품고, 배신도 품고, 기쁨과 상처까지 한 가슴에 함께 둘 수 있다. 그 많은 세월을 품고도 얼굴 끝에 미소 하나 남아 있다면, 그보다 아름다운 훈장은 드물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햇살이 방으로 들어오면 커튼부터 열면 된다. 오늘을 너무 거창하게 살 필요는 없다. 사람 하나 만나고, 좋은 말 하나 건네고, 맛있는 것 조금 먹고, 걸을 수 있을 만큼 걷고, 꽃 한 송이 앞에서 잠시 머물고, 피곤하면 쉬면 된다.
인생은 마지막까지 만점을 받아야 하는 시험지가 아니다. 이미 수많은 오답과 수정과 지운 흔적을 품은 오래된 원고다. 어떤 페이지에는 눈물이 번졌고, 어떤 장에는 웃음이 묻어 있다. 찢어버리고 싶은 부분도 있고, 다시 펼쳐보고 싶은 대목도 있다. 그 모든 페이지를 버리지 않고 품은 채 여기까지 왔다. 그것만으로도 한 생애는 충분히 장엄하다.
노년의 품격은 늙지 않으려 애쓰는 데 있지 않다. 늙어가는 몸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면서 삶에 대한 호기심을 끝까지 놓지 않는 데 있다. 걸음이 조금 느려져도 마음의 창까지 닫을 까닭은 없다. 내일 피어날 꽃을 궁금해하고, 다음에 만날 사람을 기다리며, 낯선 노래 한 곡에도 귀를 기울일 수 있다면 삶은 아직 진행 중이다.
오래 산 나무가 아름다운 것은 높아서가 아니다. 수많은 계절을 지나고도 자기 아래에 그늘 한 평을 남겨두기 때문이다.
사람도 그렇다. 오래 살아온 사람의 아름다움은 나이의 숫자에 있지 않다. 그 세월만큼 다른 사람을 품을 자리가 넓어졌는가에 있다. 노년은 인생의 뒷문이 아니다. 삶의 소음이 하나씩 멀어진 뒤 비로소 본래의 자신과 마주 앉는 깊은 방이다. 그 방에는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다.
좋은 사람 몇, 따뜻한 밥 한 끼, 오래 바라볼 창 하나, 마음 편히 웃을 수 있는 하루.
그 정도면 삶은 여전히 넉넉하다. 저녁이 아름다운 것은 해가 젊어서가 아니다. 하루 종일 세상을 비춘 빛이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에게 남은 것을 아낌없이 풀어놓기 때문이다.
사람의 노년도 그러하면 좋겠다. 뜨거움은 조금 줄어도 따뜻함은 더 깊어지고, 말은 적어져도 향기는 오래 남으며, 앞서가는 힘보다 곁을 내어주는 마음이 커지는 시간. 그것이 노년의 품격이다.
세월이 사람에게 마지막으로 가르쳐주는, 가장 낮고도 가장 눈부신 삶의 자세다.
ㅡ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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