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뚜기도 한 철이라는데 ㅡ청람 김왕식
메뚜기도 한 철이라는데 2026.08.13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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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뚜기도 한 철이라는데
“메뚜기도 한 철이다.”
어릴 적 어른들은 이 말을 참 쉽게 하셨다. 장사가 잘되어 목에 힘이 들어간 사람을 두고도 그랬고, 세상 무서울 것 없이 떠드는 젊은이를 보면서도 그랬다. 한때 잘 나간다고 너무 으스대지 말라는 뜻이었다.
생각해 보면 이상하다. 그 많은 벌레를 다 놔두고 왜 하필 메뚜기였을까.
“잠자리도 한 철이다.” “사마귀도 한 철이다.” “매미도 한 철이다.”
이렇게 말해도 뜻은 대충 통한다. 아무래도 맛이 없다.
“나비도 한 철이다.”
이쯤 되면 충고라기보다 시가 된다.
“모기도 한 철이다.”
이건 듣는 사람 기분만 나빠진다.
“바퀴벌레도 한 철이다.”
그건 사실관계부터 의심스럽다. 그 녀석은 사계절 내내 끈질기다.
1990년대 중반쯤이었을 것이다. 서울 오산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며 ‘다섯메 문예반’ 학생들과 점심시간이면 교실 밖으로 나가곤 했다. 도시락을 서둘러 먹고 캠퍼스 한쪽에 서 있는 이중섭 화비 둘레에 모였다.
거창한 문학수업은 아니었다. 돌 하나, 나뭇잎 하나, 구름 한 조각, 사물 하나를 오래 바라보면 그 안에서 문장이 태어난다는 것을 아이들과 함께 시험해 보던 시간이었다.
한 학생이 불쑥 물었다.
“선생님, ‘메뚜기도 한 철’이라고 하잖아요. 왜 꼭 메뚜기예요? 다른 곤충은 안 돼요?”
순간 이중섭 화비의 소도 대답을 기다리는 듯했다.
교사에게 가장 난처한 순간은 어려운 질문을 받을 때가 아니다. 너무 당연해서 한 번도 의심해 보지 않았던 것을 학생이 물어올 때다. 국어교사라는 사람이 속담 하나의 메뚜기 앞에서 막혀 버렸다.
잠깐 궁리를 했다. 메뚜기는 벼가 익는 들판에서 한때 무성하게 뛰어다닌다. 여름 끝과 가을 들녘, 곡식이 차오르는 짧은 시절에 유난히 눈에 많이 띈다. 그 왕성한 움직임이 어느 순간 거짓말처럼 사라진다. 그러니 옛사람들이 한때의 기세와 영화榮華를 메뚜기의 계절에 빗대었을 법하다.
이쯤 설명하면 교사다운 답은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입에서는 엉뚱한 말이 나왔다.
“글쎄다.”
아이들이 웃었다. 나도 웃었다.
지금 돌아보면 그날의 가장 좋은 답은 바로 그 ‘글쎄다’였는지도 모른다. 교육은 모든 질문에 정답을 달아주는 일이 아니다. 때로는 질문을 그대로 살아 있게 두는 일이다. 선생이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말하는 순간 학생의 생각은 비로소 자기 발로 걷기 시작한다.
더구나 문학은 정답을 먹고사는 생물이 아니다.
‘왜 메뚜기인가’라는 작은 의문 하나가 한 시대의 농경문화로 가고, 언어의 습관으로 가고, 인간의 흥망성쇠로 간다.
생각해 보면 사람도 메뚜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 잘 나갈 때는 자신의 계절이 영원할 것처럼 뛴다.
돈이 있을 때, 권력이 있을 때, 젊음이 있을 때, 박수받을 때,
온 들판이 자기 것인 양 높이 뛰어오른다.
그런데 계절은 아무에게도 전세로 주어지지 않는다. 메뚜기의 가을이 지나가듯 사람의 전성기도 지나간다. 문제는 한 철을 누렸느냐가 아니다. 그 철이 지나간 뒤 무엇을 남겼느냐에 있다.
벼는 가을이 지나면 낟알을 남긴다. 나무는 잎을 떨군 뒤 나이테를 남긴다. 사람은 무엇을 남길까.
명함 몇 장, 직함 몇 줄, 통장 숫자 몇 개만 남긴다면 인간의 한 철은 메뚜기의 한 철보다 그리 장엄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날 이중섭 화비 곁에 둘러앉았던 다섯메 문예반 학생들도 이제는 중년을 훌쩍 넘겼을 것이다. 그때 질문하던 아이의 얼굴은 희미한데 그 질문만은 이상하게 남아 있다.
“선생님, 왜 꼭 메뚜기예요?”
세월이 삼십 년 가까이 흐른 뒤에도 답은 여전히 완성되지 않았다. 이제는 이렇게 답해 보고 싶다. 메뚜기라서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한 철’이라는 말이 중요한 것이라고.
사람에게도 저마다 한 철이 온다. 높이 뛸 수 있는 철, 사랑받는 철, 무언가를 마음껏 시작할 수 있는 철, 누군가의 손을 잡아줄 힘이 있는 철.
그 철이 왔을 때 너무 으스대지 말 일이다. 메뚜기가 아무리 높이 뛰어도 논둑을 벗어나기는 어렵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제아무리 높은 곳에 올라도 결국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간다. 그러니 한 철을 살더라도 조금 덜 뽐내고, 조금 더 나누고, 조금 더 사랑할 일이다.
그나저나 아직도 궁금하기는 하다. 왜 하필 메뚜기였을까. 다음 세상에서 옛 어른들을 만나면 꼭 한번 여쭤볼 생각이다.
다만 그때도 답이 “글쎄다.” 라고 한다면, 아마 웃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좋은 질문에는 정답보다 오래 사는 것이 있으므로.
ㅡ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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