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찰

대문호의 서재에 들어온 열한 번째 조교 ㅡ 황석영

대문호의 서재에 들어온 열한 번째 조교 ㅡ 황석영 2026.08.13
대문호의 서재에 들어온 열한 번째 조교 ㅡ 황석영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대문호의 서재에 들어온 열한 번째 조교 ― 황석영의 AI 활용을 바라보는 문학의 기대와 두려움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한 노작가의 서재에

낯선 견습생 하나가 들어왔다.

잠을 자지 않는다. 월급을 달라고 하지 않는다. 수천 권의 책을 뒤적이는 데 몇 초면 족하다. 자료를 찾아 책상 위에 펼쳐놓고, 문장을 분류하고, 초고의 골격을 세우며, 같은 질문을 백 번 던져도 얼굴빛 하나 바꾸지 않는다.

그 견습생의 이름은 AI다. 한국문학의 거장 황석영이 텔레비전 화면에 모습을 드러냈다. 긴 세월을 문장과 함께 살아온 얼굴이었다. 세월이 그의 머리칼을 희게 만들었을망정 문학을 대하는 기세까지 늙게 만들지는 못한 듯했다.

그 자리에서 뜻밖의 말이 흘러나왔다. 박사학위를 가진 조교 열 명을 해고한 셈이라는 취지의 말이었다. 이제 AI를 조교처럼 활용하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듣는 순간

귀를 한번 의심하게 된다. 젊은 작가도 아니다. 디지털 문명의 한복판에서 성장한 세대도 아니다. 『장길산』 과 『객지』, 『삼포 가는 길』 같은 작품으로 한국 현대사의 흙먼지와 민중의 체온을 문장 속에 들여놓았던 노작가가 인공지능을 자기 서재의 새로운 일꾼으로 불러들인 것이다.

세상이 AI를 두려워하며 문학의 죽음을 걱정하는 때에, 노작가는 문을 걸어 잠그지 않았다. 문을 열었다. 바로 그 대목이 흥미롭다.

Ⅰ. 붓을 버린 것이 아니라 새로운 먹돌을 들인 것이다

작가에게 도구는 언제나 있었다. 옛 문인은 먹을 갈았다. 근대의 작가는 원고지를 펼쳤다. 타자기가 들어왔고 워드프로세서가 뒤를 이었다. 검색엔진과 전자사전이 책상 한켠을 차지했다.

그때마다 문학은 한 번씩 호들갑스러운 장례식을 치렀다. 타자기가 등장했을 때 손글씨의 영혼이 사라진다고 했고, 컴퓨터가 등장했을 때 문장의 체온이 식을 것이라 했다.

문학은 죽지 않았다. 도구만 바뀌었다. AI 역시 그러한 계보 위에서 바라볼 여지가 있다. 현재 한국 교육현장에서도 AI를 단순한 금지 대상이 아니라 비판적 평가 · 창의적 활용 · 윤리적 역량을 함께 길러야 할 대상으로 다루려는 움직임이 이미 본격화되고 있다.

교육부도 2026년 전국 1,141개 AI 중점학교 운영을 발표하며 책임 있는 활용과 AI 윤리교육을 주요 방향으로 제시했다.

문제는 AI를 쓰느냐 쓰지 않느냐가 아니다. 누가 AI를 부리느냐다. 황석영 같은 작가가 AI에게 자료를 정리시키고 연표를 확인시키며 시대적 배경을 비교하게 하고 방대한 문헌의 윤곽을 찾아내게 한다면, 그것은 창작의 포기라기보다 작가의 시간을 본질적인 영역에 집중시키는 방식이 될 수 있다.

과거 열 명의 조교가 며칠 동안 하던 자료 분류를 AI가 몇 분 만에 해낼 수 있다면, 작가는 절약된 시간을 인물의 눈빛 하나, 한 시대의 비애 하나, 문장 끝의 숨 하나에 더 사용할 수도 있다.

AI는 광산의 곡괭이가 될 수 있다. 금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 수천 미터 아래 묻힌 광맥까지 가는 노동을 덜어줄 뿐이다.

Ⅱ. AI가 『장길산』 을 쓸 수 없는 까닭

여기서 경계선 하나를 아주 깊게 그어야 한다. AI가 자료를 찾아주는 것과 AI가 작가 대신 작품을 쓰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니다. 문학에는 데이터만으로 건너지 못하는 강이 있다.

황석영의 문학에는 한국 근현대사의 상처가 있다. 분단, 산업화, 노동, 도시 빈민, 떠돌이, 전쟁, 이산이 있다. 그 세계의 언어는 사전에서 골라낸 낱말의 조합만으로 생겨난 것이 아니다.

사람들과 부대끼며 얻은 체취가 있었고, 시대의 먼지를 실제 폐 속으로 들이마신 한 인간의 시간이 있었다.

AI에게 만 권의 전쟁소설을 읽힐 수는 있다. 총알이 옆 사람의 몸을 뚫고 지나가는 순간 인간의 심장이 어떻게 무너지는지는 대신 살아낼 수 없다. 어머니의 장례식에 관한 수십만 편의 문장을 학습시킬 수도 있다. 관 뚜껑이 닫히는 순간 한 인간의 세계에서 어머니라는 지명이 영영 사라지는 슬픔까지 생애로 갖지는 못한다.

이곳이 인간 문학의 마지막 국경이다. AI에는 자료가 있고 인간에게는 상처가 있다. 자료는 정리할 수 있다. 상처는 살아내야 한다. 문학은 바로 그 살아낸 자리에서 태어난다.

Ⅲ. 가장 두려운 것은 AI의 문장이 아니라 인간의 게으름이다

AI 시대 문학에서 더 무서운 것은 기계가 천재가 되는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사람이 생각하기를 포기하는 일이다. 작가가 첫 문장부터 마지막 문장까지 AI에게 맡기고 이름만 자기 것으로 얹는 순간, 창작은 생산으로 추락한다.

수백 편의 시를 하루 만에 만들어내고, 장편소설 한 권을 며칠 만에 뽑아냈다는 숫자가 문학적 성취의 척도가 되기 시작한다면 문학은 심각한 질병을 앓게 된다.

문학은 속도의 예술이 아니다. 한 문장을 쓰지 못해 밤을 넘겨본 사람에게서 문장의 무게가 생긴다. 시어 하나를 원고지 위에 놓았다 다시 지워본 손끝에서 시의 체온이 생긴다. AI는 그 고통까지 없애준다. 바로 그 친절함이 위험하다.

문학에서 고통은 언제나 제거해야 할 불량품만은 아니다. 때로는 작품이 태어나기 위해 지불해야 하는 정신의 등록금이다. 너무 유능한 조교는 주인을 게으르게 만들 수 있다.

AI가 작가의 팔이 되는 순간에는 유용하다. AI가 작가의 머리가 되는 순간부터 위험하다. AI가 작가의 심장까지 대신 뛰기 시작하는 순간에는 더 이상 그 작품을 누구의 문학이라 불러야 하는지 경계가 흐려진다.

Ⅳ. 저작권보다 먼저 다루어야 할 것은 ‘저자성’이다

앞으로 문단이 맞닥뜨릴 가장 큰 질문 가운데 하나는 표절 여부만이 아닐 것이다.

누가 썼는가. 이 오래된 질문이 훨씬 복잡해진다. 작가가 발상을 제시하고 AI가 초고를 썼다면 누구의 문장인가. AI가 여러 문체를 제시하고 작가가 하나를 골라 손질했다면 창작자는 누구인가. 자료 조사만 맡겼다면 비교적 분명하다. 구조와 문장과 비유와 결말까지 생성하게 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문학계에는 이제 새로운 창작윤리가 필요하다. AI 사용을 일률적으로 금지하는 규율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어디까지를 자료 활용으로 볼 것인지, 어느 지점부터 공동생산의 성격을 갖는지, 출판 과정에서 AI 활용 사실을 어느 범위까지 밝힐 것인지에 대한 문화적 합의가 필요하다.

한국의 교육정책 역시 AI 활용 확대와 동시에 ‘안전하고 책임 있는 활용’과 윤리교육을 병행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이것은 문학장에서도 참고할 만한 태도다.

Ⅴ. 황석영이 던진 것은 답이 아니라 폭탄이다

황석영의 발언이 흥미로운 까닭은 AI를 잘 사용한다는 사실 하나에 있지 않다. 한국문단의 가장 오래된 방에 가장 새로운 기계를 들여놓았다는 데 있다. 젊은 작가가 AI를 사용했다면 시대의 자연스러운 풍경으로 지나갔을 수도 있다.

한국 현대문학의 긴 시간을 몸으로 통과한 노작가가 그것을 자기 작업실에 들여놓았다는 사실은 상징성이 크다. 문학의 전통과 기술의 미래가 한 책상에서 마주 앉은 장면이기 때문이다.

그 장면 앞에서 무조건 박수를 칠 필요도 없다. 돌부터 던질 이유도 없다. 문학은 원래 낯선 것이 문 앞에 왔을 때 가장 깊어졌다. 사진이 등장했을 때 회화는 죽지 않았다. 회화가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영화가 등장했다고 소설이 사라지지 않았다. 소설만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더 치열하게 찾게 되었다.

AI 역시 문학을 없애기보다 문학을 문학답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 앞에 다시 세울 가능성이 크다.

Ⅵ. 문학의 마지막 한 줄은 사람이 써야 한다

나는 AI 시대의 작가에게 한 가지 원칙을 제안하고 싶다. AI에게 발을 빌릴 수는 있어도 심장을 맡기지는 말자. 자료를 찾게 하라. 연표를 만들게 하라. 수천 장의 기록을 분류하게 하라. 문장의 오류를 찾게 하고 낯선 관점을 제안하게 하며 자기 생각의 허점을 공격하게 하라. 그 모든 것을 통과한 마지막 자리에서 작가는 혼자 남아야 한다.

한 인간만이 쓸 수 있는 한 줄 앞에서다. 누군가를 잃어본 사람만이 쓸 수 있는 문장. 한 시대의 폭력을 몸으로 통과한 사람만이 새길 수 있는 문장. 평생 한 사람을 사랑한 이의 손끝에서만 떨릴 수 있는 문장. AI가 아무리 거대한 언어의 바다를 품는다 해도 인간이 흘린 눈물 한 방울의 생애를 대신 가질 수는 없다. 황석영의 서재에 들어간 AI를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그보다 먼저 살펴야 할 것은 그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인간이다. 도구가 거대해질수록 작가는 더 깊은 인간이어야 한다. 기계가 영리해질수록 문학인은 더 많이 살아야 한다.

AI가 백만 개의 문장을 내놓는 시대일수록, 인간은 백만 개 가운데 왜 하필 이 한 문장을 세상에 남겨야 하는가를 자기 생으로 증명해야 한다.

어쩌면 황석영의 선언은 열 명의 조교를 해고했다는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문학의 서재에 열한 번째 조교를 들였다는 선언에 가깝다.

첫 번째부터 열 번째까지의 조교와 다른 점이 하나 있다. 열한 번째 조교는 너무나 유능하다. 그 유능함 때문에 이제 작가에게 더욱 무거운 책임이 돌아온다. 무엇을 기계에게 맡기고 무엇만큼은 끝내 인간의 몫으로 남겨둘 것인가.

21세기 문학의 운명은 바로 그 가느다란 경계 위에 놓여 있다. 펜의 시대가 끝나는 것이 아니다. 펜을 쥔 손의 책임이 전보다 훨씬 무거워지고 있다.

ㅡ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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