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찰

저울은 무게를 만들지 않았다 ㅡ청람 김왕식

저울은 무게를 만들지 않았다 2026.08.14
저울은 무게를 만들지 않았다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저울은 무게를 만들지 않았다 ― 세상의 다툼을 합의로 옮기는 도구에 대하여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저울이 세상에 나오기 전에도 돌은 무거웠고 깃털은 가벼웠다. 사람이 이름 붙이지 않았다고 산의 무게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었으며, 저울추가 없었다고 한 가마니의 곡식이 제 몸의 무게를 잃는 것도 아니었다.

무게는 이미 사물의 몸속에 들어 있었다. 다만 사람에게 그것을 함께 바라볼 하나의 눈이 없었다.

한 사람은 무겁다 하고 다른 사람은 가볍다 했다. 장사꾼은 이만큼이라 했고 손님은 그보다 더 나간다 했다. 같은 물건 하나를 가운데 두고 서로의 눈대중이 맞섰다. 목소리가 커지고 얼굴이 붉어졌다.

그때 사람 사이에 작은 저울 하나가 놓였다. 저울은 누구의 편도 들지 않았다. 장사꾼의 체면도 손님의 억울함도 헤아리지 않았다. 한쪽 접시에 물건을 놓고 다른 쪽에 추를 얹었을 뿐이다. 기울던 두 팔이 마침내 수평을 이루는 순간, 사람의 언성이 낮아졌다.

참으로 놀라운 것은 저울이 아니다. 수평이다. 문명의 시작은 어쩌면 거대한 발명품보다 이 작은 수평에서 비롯되었는지도 모른다. 저울은 무게를 발명하지 않았다. 이미 존재하던 무게를 사람과 사람이 함께 받아들일 수 있는 언어로 바꾸었다.

여기에 도구의 본질이 있다. 좋은 도구는 세상에 없던 진실을 만들어내지 않는다. 사람마다 다르게 주장하던 것을 함께 확인할 수 있게 한다. 감정의 영역에 놓여 있던 것을 검증의 자리로 옮기고, 힘센 사람의 목소리에 매달려 있던 판단을 공동의 기준 앞으로 데려온다.

자는 길이를 만들지 않았다. 시계가 시간을 만들지 않았다. 온도계가 더위와 추위를 발명하지 않았다. 망원경이 별을 하늘에 매달아 놓은 것도 아니다. 그것들은 오래전부터 존재하던 것을 사람이 서로 다투지 않고 바라볼 수 있도록 하나의 창을 내주었다.

이에 문명의 역사는 발명의 역사이면서 동시에 합의의 역사다. 더 무서운 것은 무게를 모르는 일이 아니다. 자기 손바닥의 감각만을 절대적인 저울로 믿는 일이다. 사람 사이의 수많은 갈등도 여기서 시작된다.

내가 보았으니 사실이고, 내가 느꼈으니 옳으며, 내가 오래 살았으니 내 판단이 맞고, 내가 높은 자리에 있으니 내 말이 기준이라고 여기는 순간, 사람의 가슴속에는 보이지 않는 독선의 저울이 들어선다.

그 저울에는 이상한 추가 달려 있다. 내 허물은 가볍게 달리고 남의 허물은 무겁게 달린다. 내 상처에는 쇳덩이를 얹으면서 남의 상처에는 깃털 하나 올려놓는다. 내 수고는 산처럼 재면서 타인의 수고는 모래알처럼 취급한다.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저울은 고장 난 저울이 아니다. 자신이 기울어져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저울이다. 사람에게도 수평이 필요하다. 법이 필요한 까닭도 그 때문이다. 학문이 필요한 까닭도 같다. 기록과 통계와 토론과 언론과 비평이 존재해야 하는 까닭도 마찬가지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너무 커져 진실의 무게까지 대신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다. 좋은 사회란 모든 사람이 같은 생각을 하는 곳이 아니다.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가운데 놓인 하나의 저울을 인정하는 곳이다. 그 저울이 사실일 수도 있고, 증거일 수도 있으며, 양심일 수도 있다. 때로는 법이고 때로는 상식이며, 가장 깊은 자리에서는 인간에 대한 존엄일 것이다.

문학도 한 자루의 오래된 저울인지 모른다. 시인은 세상의 무게를 새로 만들지 않는다. 가난은 시인이 쓰기 전에도 아팠고, 이별은 시가 태어나기 전부터 사람을 울렸다. 늙음의 쓸쓸함도, 노동자의 굽은 등도, 어머니의 손등에 번진 검버섯도 문학 이전부터 존재했다.

문학은 그것을 한쪽 접시에 올려놓는다. 사람들이 너무 오래 보지 않았던 것, 너무 익숙하여 무게조차 잊어버린 것들을 가만히 얹는다. 그 순간 깃털처럼 취급되던 한 사람의 생애가 천근의 무게를 얻는다. 좋은 문장은 그래서 세상을 가르치려 들지 않는다. 다만 저울 하나를 사람들 가운데 놓는다. 그리고 독자의 마음이 어느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는지를 스스로 바라보게 한다.

오늘의 시대에는 새로운 저울이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있다. 인공지능도 그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인공지능이 인간의 지혜를 발명한 것은 아니다. 지식도, 질문도, 사유도 오래전부터 인간에게 있었다. 다만 흩어져 있던 수많은 정보와 경험을 비교하고 연결하며, 눈대중으로만 헤아리던 것들을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게 하는 새로운 측정의 틀을 제공할 뿐이다.

문제는 언제나 도구 이후에 남는다.

그 저울을 누가 들 것인가. 무엇을 올려놓을 것인가. 어떤 추를 사용할 것인가.

아무리 정교한 저울도 마음이 기울어진 사람이 사용하면 공정함을 보장하지 못한다.

마지막 저울은 인간 안에 있다. 양심이다. 세상의 모든 저울이 숫자를 가리킨 뒤에도 마지막으로 남는 무게가 있다. 사람의 무게다. 그것은 킬로그램으로 잴 수 없다. 한 사람의 눈물 한 방울이 어느 날 한 도시보다 무거울 수 있고, 병상에서 건넨 손 하나가 금덩이보다 귀할 수 있다. 평생 남몰래 베푼 작은 친절이 세월이 지난 뒤 한 인간의 생을 떠받치는 거대한 저울추가 되기도 한다.

문명이 깊어진다는 것은 더 정밀한 저울을 만드는 일만을 뜻하지 않는다. 무엇을 재어야 하는지를 분별하는 마음이 깊어지는 일이다. 돈의 무게만 재고 사람의 눈물을 재지 못한다면 그 문명은 아직 미숙하다. 성과는 정확히 계산하면서 희생을 헤아리지 못한다면 그 조직의 저울은 이미 한쪽으로 기울었다. 자신의 공로는 소수점까지 기록하면서 타인의 아픔을 눈대중으로 넘겨버린다면 그 삶 또한 수평에서 멀어져 있다. 저울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다만 기울어진다. 그 침묵이 때로 백 마디 웅변보다 정확하다.

삶도 그러하다. 끝내 사람을 드러내는 것은 자신이 옳다고 외친 목소리의 크기가 아니다. 한평생 무엇을 무겁게 여기며 살았는가에 있다.

돈인가 명예인가 권력인가 사람인가

생의 마지막 저녁, 우리가 지나온 날들을 하나씩 저울 위에 올려놓는다면 끝내 가장 무겁게 남아야 할 것은 거창한 업적 몇 줄이 아닐 것이다. 내 곁을 지나간 사람을 얼마나 귀하게 여겼는가. 아마 그 한 가지가 오래 흔들리던 생의 저울을 마지막 수평으로 돌려놓을 것이다. 저울은 무게를 만들지 않았다. 다만 인간에게 가르쳐 주었다. 세상에는 목소리보다 무거운 것이 있고, 주장보다 오래 남는 것이 있으며, 끝내 모든 다툼을 멈추게 하는 것은 힘이 아니라 수평이라는 사실을.

ㅡ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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