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찰

장준하 선생 서거 51주기와 《사상계》 복간에 부쳐

장준하 선생 서거 51주기와 《사상계》 복간에 부쳐 2026.08.17
장준하 선생 서거 51주기와 《사상계》 복간에 부쳐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아직 끝나지 않은 질문 ― 장준하 선생 서거 51주기와 《사상계》 복간에 부쳐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한 사람은 떠난 뒤에야 비로소 한 시대의 높이가 되는가.

1975년 8월 17일, 약사봉의 바위 하나가 대한민국의 가슴을 오래 눌렀다.

그날 한 육신은 멈추었으나 한 문장은 멈추지 않았다.

장준하.

당신은 총을 들기 전에 조국을 품었고 펜을 들기 전에 양심을 세웠다.

일본군의 군복을 벗어던지고 광복군이 되어 중국 대륙의 먼 길을 걸을 때,

발밑에는 흙먼지가 있었고 가슴에는 아직 오지 않은 대한민국이 있었다.

해방은 왔으나 자유는 완성되지 않았고,

나라의 문은 열렸으나 사람의 입에는 다시 보이지 않는 자물쇠가 채워졌다.

당신은 그때 칼 대신 활자를 들었다.

《사상계》

그 얇은 종이 위에 한 시대의 대학을 세우고 한 민족의 생각을 깨웠다

청년은 그 책에서 민주주의를 배웠고

지식인은 그 책에서 침묵의 부끄러움을 배웠으며

권력은 그 책장을 넘기며 자신의 그림자를 두려워했다

당신의 펜은 먹물만 묻힌 펜이 아니었다

시대의 상처를 찍어 역사의 여백에 내리누른 양심의 인장이었다

권력이 벽이 되면 문장이 문이 되었고

법이 사람을 누르면 양심이 법보다 먼저 일어섰다

당신에게 글은 책상 위에서 끝나는 일이 아니었다

문장을 썼으면 그 문장 앞에 몸을 세웠고

자유를 말했다면 자유가 매 맞는 자리에 먼저 서 있었다

그리하여 당신의 생은 한 권의 잡지가 되었고 당신의 죽음은 아직 덮지 못한 마지막 페이지가 되었다

쉰한 해가 흘렀다

《사상계》를 읽던 청년들은 백발이 되었고

그 책을 가슴에 품었던 독자들의 손에는 세월의 주름이 깊어졌다

종이는 누렇게 바랬고 활자는 오래된 서가 속에 잠들었다.

허나 사상은 늙지 않았다

양심은 폐간되지 않았다

질문은 한 번도 발행을 멈춘 적이 없었다

그리하여 오늘 우리는 다시 《사상계》의 이름을 부른다

복간

그것은 옛 잡지 한 권을 다시 찍어내는 일이 아니다

낡은 제호를 되살리는 일도 아니다

장준하가 세웠던 생각의 기둥을 다시 일으키는 일

권력보다 진실을 먼저 보았던 언론의 눈을 다시 뜨게 하는 일

침묵보다 발언을 편승보다 비판을 진영보다 양심을 앞세웠던 그 정신을 오늘의 언어로 다시 쓰는 일이다

《사상계》를 복간한다는 것은 과거로 돌아가는 일이 아니다

장준하가 미처 쓰지 못한 다음 페이지를 오늘의 우리가 이어 쓰는 일이다

당신이 던졌던 질문을 새로운 세대의 책상 위에 다시 올려놓는 일이다

언론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지식인은 무엇을 두려워해야 하는가.

권력은 누구 앞에 머리를 숙여야 하는가

자유는 얻는 것으로 끝나는가

민주주의는 제도인가 매일 살아내야 하는 양심인가

오늘 파주의 하늘 아래 사람들이 다시 머리를 숙인다

국화 한 송이를 놓으며 당신을 보내기 위해서가 아니다

당신이 남겨놓은 그 질문을 다시 받아 들기 위해서다

장준하 선생이시여

당신은 산에서 내려오지 못했으나 당신의 뜻은 아직 대한민국의 골짜기를 건너고 있다

당신의 육신은 흙이 되었으나 당신의 문장은 아직 이 나라의 심장 가까이에서 뜨겁다

그리고 이제 오래 잠들어 있던 《사상계》가 다시 책장을 열려한다

첫 장에는 당신의 이름이 있을 것이며

그다음 장에는 오늘을 사는 사람들의 질문이 놓일 것이다

복간된 《사상계》가 당신을 기리는 가장 아름다운 꽃이 되기를

권력의 책상 위에 놓이는 장식이 아니라 시민의 책상 위에서 생각을 깨우는 한 권의 불편한 양심이 되기를

누군가의 편을 드는 잡지가 아니라 진실의 편에 서는 잡지가 되기를

박수받는 문장보다 필요한 문장을 먼저 싣는 시대의 거울이 되기를 빈다

쉰한 번째 8월 17일.

당신은 떠나 계시지만 당신의 질문은 아직 이 땅에서 발행 중이다

사람이 떠난 자리에 무덤만 남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한 나라가 오래 걸어가야 할 길 하나를 남긴다

어떤 사람은 한 시대가 끝내 버리지 못할 문장 하나를 남긴다

장준하

당신은 지금도 그 길의 이름이며

다시 펼쳐질 《사상계》 첫 페이지의 가장 깊은 문장이다

□ 장준하 선생 장남 장호권 전 광복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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