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을 지운 동굴에서 이타카까지, 영화 《오디세이》
말을 지운 동굴에서 이타카까지, 영화 《오디세이》 2026.08.18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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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간다는 것은 처음의 자리로 되돌아가는 일이 아니다 ― 말을 지운 동굴에서 이타카까지, 영화 《오디세이》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바다에는 길이 없다.
사람이 지나간 자리에 발자국 하나 남겨주지 않고, 어제 건너온 물결조차 오늘이면 제 얼굴을 지운다. 육지의 길은 뒤돌아보면 지나온 자취라도 남지만 바다는 지나온 사람에게 아무런 증명서를 발급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인간은 배를 띄운다. 돌아가야 할 곳이 있기 때문이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오디세이》는 호메로스의 오래된 서사를 빌려왔지만, 모험을 보여주는 영화라기보다 돌아간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한참 들여다보게 하는 영화에 가깝다.
트로이 전쟁을 끝낸 오디세우스가 고향 이타카로 돌아가는 길에는 폭풍이 있고 괴물이 있으며 유혹과 죽음이 기다린다.
전쟁은 끝났는데 그의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적의 성벽을 무너뜨리는 일보다 더 어려운 것은 몸 안에 남아 있는 전쟁을 끝내는 일인지도 모른다.
병사는 전쟁터에서 돌아올 수 있다. 영웅도 개선문을 통과할 수 있다. 그런데 한 인간이 전쟁 이전의 자기 자신에게 돌아가는 일은 전혀 다른 문제다.
그 점에서 《오디세이》의 바다는 단순한 지중해가 아니다. 한 인간의 내부에 출렁이는 바다다.
배가 흔들릴 때마다 마음속 확신 하나가 흔들리고, 돛이 찢어질 때마다 자신이 믿어왔던 세계의 한 조각이 찢어진다. 물결은 오디세우스를 목적지로 실어 나르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붙어 있던 것들을 하나씩 벗겨낸다.
명예도 벗겨지고, 오만도 벗겨지고, 영웅이라는 갑옷도 벗겨진다.
그렇게 남은 한 사람이 이타카를 향한다.
유난히 마음에 머문 곳은 바다보다도 한 동굴이었다.
오디세우스와 외눈박이 괴물 키클롭스가 맞닥뜨리는 곳이다.
호메로스의 원전에서 이 장면은 언어의 싸움이기도 하다. 오디세우스는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이름을 속이고,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괴물을 머리와 언어로 넘어선다.
영화는 그 많은 말을 과감하게 걷어낸다. 말이 있어야 할 자리에 어둠이 들어앉는다. 설명해야 할 곳에 숨소리가 놓이고, 논리 대신 몸의 떨림이 남는다. 이 생략은 단순한 축약으로 읽히지 않는다. 동굴에 들어선 순간 인간의 말은 이미 상당 부분 쓸모를 잃는다.
괴물에게 정의를 설명해 무엇하겠는가. 예의를 말해 무엇하며, 이성을 설득해 무엇하겠는가. 자기 세계 하나로 가득 찬 존재 앞에서는 아무리 좋은 언어도 들어갈 자리가 없다.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은 귀가 없다는 뜻이 아니다. 마음 안에 남의 말을 들여놓을 빈방 하나 없다는 뜻이다.
그런 점에서 키클롭스의 외눈은 기묘한 상징으로 다가온다. 그에게 눈은 하나뿐이다. 세상을 하나의 눈으로만 본다. 자기가 보는 것이 전부이며, 자기가 믿는 것이 진실의 전부다.
두 눈을 가졌으면서도 한쪽 생각만 붙들고 살아가는 순간 인간 역시 외눈박이가 될 수 있다. 내 생각만 옳다고 고집할 때, 남의 아픔을 자기 기준으로만 재단할 때, 자신의 경험 하나를 세상 전체의 진실이라고 우길 때, 우리 마음 어딘가에도 키클롭스의 동굴이 생긴다. 괴물은 신화 속에만 사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확신 속에서도 자란다. 너무 단단해진 신념 안에서도 자라고, 상처받았다는 이유로 닫아버린 마음 안에서도 자란다.
그렇다면 영화가 이 장면에서 대화를 덜어낸 이유도 조금 달리 읽힌다. 말을 줄였기에 외려 질문이 커졌다.
오디세우스와 괴물이 해야 했을 말이 스크린 밖으로 밀려나 관객에게 넘어온 것이다. 누구와 말이 통하지 않는가. 그보다 더 서늘한 것은 그 다음이다. 혹시 내가 누군가에게 그 외눈박이 괴물은 아니었는가.
좋은 영화는 모든 것을 설명하지 않는다. 좋은 시가 행과 행 사이에 빈자리를 남겨두듯 영화 또한 대사를 걷어낸 자리에 관객의 생각이 들어가 앉도록 한다. 말을 지웠는데 의미가 더 커진다. 소리를 낮췄는데 동굴은 더 깊어진다. 괴물의 눈은 하나인데 화면을 바라보는 사람에게는 전에 없던 또 하나의 눈을 요구한다.
《오디세이》가 품고 있는 다른 괴물과 유혹도 마찬가지다. 세이렌은 바다 위에서 노래하는 신화적 존재에 머물지 않는다. 돌아가야 할 곳을 잊게 만드는 모든 달콤한 목소리가 세이렌이다. 조금만 더 머물라고 하는 안락함, 조금만 더 가지라고 속삭이는 욕망, 지금 가진 것이 부족하다고 부추기는 세상의 목소리도 어느 순간 세이렌의 노래가 된다.
키르케의 섬도 특별한 곳에만 있지 않다. 떠나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 머물고 싶어지는 자리,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 현재의 안온함에 몸을 맡기고 싶은 순간마다 인간 앞에 작은 키르케의 섬 하나가 생긴다. 인간의 가장 위험한 난파는 배가 부서지는 데 있지 않을지도 모른다. 돌아가야 할 곳을 잊어버리는 데 있다. 그런 까닭에 이타카는 단순한 고향이 아니다. 그곳에는 페넬로페가 있고, 텔레마코스가 있으며, 오디세우스가 오디세우스였던 시간이 남아 있다. 사람이 돌아간다는 것은 어떤 지명으로 복귀하는 것과 다르다.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시간으로 돌아가는 일이다. 자신이 무엇을 사랑했고, 무엇을 지키려 했으며, 어떤 사람으로 살고자 했는지를 다시 마주하는 일이다.
페넬로페의 기다림 또한 이 영화에서 쉽게 지나칠 수 없는 또 하나의 항해다. 오디세우스가 바다 위에서 표류하는 동안 페넬로페는 시간 속에서 표류한다.
한 사람은 파도를 견디고, 한 사람은 세월을 견딘다.
귀환은 돌아오는 사람 혼자 만드는 사건이 아니다. 누군가 돌아갈 수 있으려면 누군가는 그 자리를 없애지 않아야 한다. 사랑의 가장 깊은 모습도 이와 닮았다. 사랑은 언제나 붙잡아 두는 것이 아니다. 먼 길을 돌아온 사람이 다시 앉을 수 있도록 의자 하나를 치우지 않는 일일 수 있다. 불 하나를 꺼뜨리지 않는 일일 수 있다. 문 하나를 완전히 닫아버리지 않는 일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기다리는 사람도 여행자다. 단지 그의 바다에는 물이 없을 뿐이다.
세월이 파도다.
《오디세이》가 수천 년을 건너 살아남은 까닭은 괴물이 흥미로워서만은 아니다. 인간 누구에게나 이타카가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어머니일 수 있다. 어떤 사람에게는 어린 시절 뛰놀던 마당일 수 있고, 젊은 날 품었던 꿈일 수도 있다. 평생 한 번도 버리지 못한 신념일 수도 있다. 너무 멀리 와버린 뒤에 비로소 생각나는 자기 자신의 오래된 얼굴일 수도 있다. 젊은 날에는 멀리 가는 사람이 대단해 보인다. 높이 올라간 사람이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더 많이 가진 사람이 인생을 잘 산 것처럼 보인다. 세월이 조금씩 사람의 어깨 위에 앉기 시작하면 질문이 달라진다. 얼마나 멀리 갔는가보다 무엇을 잃지 않고 돌아오는가가 더 무거워진다.
사람은 살아 있는 동안 수없이 출항한다. 돈을 향해 배를 띄우고, 명예를 향해 돛을 올리고, 사랑과 성공과 인정이라는 섬을 찾아 헤맨다. 어떤 섬에서는 환대를 받고, 어떤 섬에서는 상처를 입으며, 어떤 바다에서는 모든 것을 잃기도 한다. 배 안에는 점점 많은 것이 쌓이는데 이상하게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흐려지는 때도 있다.
바로 그때 이 오래된 서사는 아주 단순한 질문 하나를 들이민다.
당신의 이타카는 어디인가.
영화가 끝난 뒤 내 마음에 남은 것은 거대한 전투보다 한 척의 배였다.
돛은 여러 번 찢어졌고, 함께 떠났던 사람들은 하나둘 사라졌으며, 방향조차 잃은 적이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노는 다시 물속으로 들어간다. 인생도 그 배를 닮았다. 한 번도 난파하지 않은 사람이 잘 산 사람이 아니라, 난파한 뒤에도 부서진 널빤지 하나를 붙잡고 다시 자기 방향을 찾는 사람이 끝까지 항해하는 사람인지 모른다.
이 영화는 귀환에 대해 하나의 역설을 남긴다.
오디세우스가 마침내 이타카에 도착한다고 해서 그가 떠날 때의 오디세우스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이미 너무 많은 바다를 건넜다.
사람을 잃었고, 공포를 보았고, 자신 안의 교만과 비겁함도 지나왔다.
몸에는 바다의 소금기가 배어 있고 마음에는 수많은 섬의 상처가 남아 있다.
그런 사람이 어찌 처음의 사람일 수 있겠는가.
하여 돌아간다는 것은 처음으로 되돌아가는 일이 아니다. 처음의 자리를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밟는 일이다.
여기서 귀환은 원점회귀가 아니라 변형이다. 출발했던 사람이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그 길을 견뎌낸 사람이 돌아온다. 어머니 품으로 돌아가도 어린아이가 될 수 없고, 고향집으로 돌아가도 옛날의 골목은 그대로 기다려주지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돌아가더라도 떠나기 전의 두 사람으로 만날 수는 없다. 시간은 사람을 그냥 통과시키지 않는다. 바다는 사람에게 소금을 남기고, 세월은 사람에게 주름을 남기며, 상처는 사람 안에 이전에는 없던 눈 하나를 만들어 놓는다.
어쩌면 그것이 오디세우스가 동굴에서 얻은 진짜 눈일지도 모른다. 괴물에게는 하나의 눈밖에 없었다. 수많은 동굴과 바다를 지나온 인간에게는 비로소 하나의 눈이 더 생긴다.
남의 아픔을 보는 눈. 자기 오만을 보는 눈. 돌아갈 곳을 잊지 않는 눈.
《오디세이》는 그 눈을 가진 사람에게 귀환의 문을 조금씩 열어준다. 모든 바다가 잠잠해지는 어느 저녁, 인간에게 마지막으로 남는 질문은 어쩌면 대단하지 않다. 얼마나 많은 나라를 정복했는가. 얼마나 높은 곳에 올라갔는가. 얼마나 많은 이름을 세상에 남겼는가.
그것보다 훨씬 작고 오래된 질문 하나가 남는다. 수많은 욕망을 지나고,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수많은 동굴을 빠져나온 뒤에도
“나는 나에게 돌아갈 수 있는가.”
그것이 이 영화가 내게 남긴 이타카다. 먼바다 끝의 섬 하나가 아니다. 모든 허영을 벗고, 외눈의 확신마저 내려놓은 뒤, 긴 세월을 견딘 사람이 마지막으로 찾아가는
자기 생의 가장 깊은 자리. 바다는 길을 남겨주지 않는다.
그래도 사람은 돌아간다.
길이 있어서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아직 꺼지지 않은 불빛 하나가 있기 때문이다.
그 불빛을 오래 바라보고 있으면 어느새 이름 하나가 떠오른다.
이타카.
어쩌면 그것은 고향의 이름이 아니라 한 인간이 평생을 돌아 끝내 다시 만나야 할 자기 자신의 이름일 것이다.
ㅡ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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