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찰

생각이 얕다, 입이 바쁘니

생각이 얕다, 입이 바쁘니 2026.08.19
생각이 얕다, 입이 바쁘니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생각이 얕다, 입이 바쁘니

말이 먼저 나간 날은 마음이 뒤늦게 따라와 빈 의자에 한참을 앉아 있었다

입은 세상에서 가장 성급한 문이었다

생각이 문턱까지 오기도 전에 그 문을 벌컥 열어 사람을 내보내고 후회를 들여놓았다

젊어서는 말을 많이 아는 것이 지혜인 줄 알았다

누군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내 문장을 준비했고 침묵하는 사람 앞에서는 내가 이긴 줄도 알았다

세월이 혀끝을 몇 번 데리고 지나간 뒤에야 말에도 그늘이 있음을 비로소 보았다

한마디가 사람의 하루를 무너뜨리고

무심코 던진 몇 음절이 누군가의 가슴에서 십 년을 살기도 했다

깊은 우물은 소리를 자랑하지 않는다

산은 자신의 높이를 설명하지 않고

나무는 열매가 익을수록 가지를 낮춘다

사람의 생각도 그와 비슷해야 하지 않을까

입으로 다 말하지 못한 것들이 가슴 안에서 한 철을 보내고

때로는 겨울까지 견딘 뒤에야 한 문장이 되어 나오는 것

그쯤 되어야 말 한마디에도 사람의 온기가 묻는다

요즘 어렵사리 말보다 먼저 침묵을 입에 넣어 본다.

삼키고 또 삼키고

끝내 남는 말만 세상 밖으로 보낸다

생각이 깊어져서 입이 느려지는 것이 아니라

입이 느려져야 비로소 생각이 제 깊이를 찾아가는지도 모른다

말하지 않은 한마디가 말한 백 마디보다 사람을 살리는 날이 있다

입술을 닫는 일은 패배가 아니다

내 안의 얕은 물을 지나 조금 더 깊은 곳으로 내려가는 일이다

오늘도 혀끝까지 올라온 말을 다시 돌려보낸다

그 말이 가슴 한 바퀴 돌아 사람을 품을 만큼 따뜻해지면

그때 한 마디쯤 세상에 놓아도 늦지 않으리

ㅡ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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