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찰

달리는 말[言], 기는 말씀[語]

달리는 말[言], 기는 말씀[語] 2026.08.19
달리는 말[言], 기는 말씀[語]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달리는 말[言], 기는 말씀[語]

말[言]은 달리고 싶어 한다

입술을 떠난 순간 제 발을 얻은 짐승처럼 앞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람과 사람 사이를 내달린다

빠른 말은 대개 자신이 빠른 줄만 안다

누구의 마음을 밟았는지, 어느 가슴에 흙먼지를 일으켰는지, 돌아볼 겨를이 없다

젊은 날에는 말을 잘하는 사람이 큰 사람인 줄 알았다

남보다 빨리 대답하고 남보다 크게 말하고 남보다 많은 것을 아는 듯 말하면 그것이 능력인 줄 알았다

세월을 몇 번 건너고 보니 정작 사람을 움직인 것은 달리는 말이 아니었다

천천히 오는 말이었다

한참을 생각한 뒤 낮은 자리에서 겨우 몸을 일으키는 말

상대의 마음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제 몸을 낮추고 무릎으로 기어가는 말

그것이 말씀이었다

말과 말씀 사이에는 속도의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높이가 있었다

말은 자기를 드러내려 하고

말씀은 상대를 살피려 한다

말은 이기기 위해 달리고 말씀은 함께 가기 위해 기다린다

말은 입에서 태어나지만 말씀은 가슴에서 오래 숙성된다

깊은 사람의 말이 더딘 까닭도 아마 거기에 있을 것이다

그는 한마디를 내놓기 전에 그 말이 누구를 다치게 할지 먼저 자기 안에서 몇 번 아파본다

한 문장을 건네기 전에 상대의 자리에 자신의 마음을 잠시 앉혀본다

그러고도 말하지 않아도 될 것은 끝내 삼킨다

산은 소리 없이 높고

강은 낮은 곳으로 흐르며 끝내 바다에 닿는다

사람의 말도 그와 같았으면 좋겠다

높아지려 애쓰기보다 낮은 곳으로 흐르고

앞서려 하기보다 뒤에 남은 사람을 기다리고

자신의 옳음을 증명하기보다 한 사람의 상처를 덮어주는 말

그런 말은 걷지도 않는다

긴다

몸을 낮추어 가장 낮은 마음까지 찾아간다

세상은 달리는 말로 가득하다

너무 빨라 서로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너무 커 작은 신음 하나 듣지 못한다

이제는 조금 늦어도 좋겠다

입보다 마음이 먼저 도착하고, 목소리보다 온기가 먼저 가닿는 말

달리지 않아도 사람의 가슴 끝까지 닿는 말

그 한마디를 위해 오늘도 나는 입술 앞에 작은 문턱 하나 놓아둔다

말은 넘어가려 하고

말씀은 그 문턱 앞에서 한 번 몸을 낮춘다

ㅡ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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