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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은 왜 반드시 《금강경》 을 공부해야 하는가 ?

현대인은 왜 반드시 《금강경》 을 공부해야 하는가 ? 2026.08.22
현대인은 왜 반드시 《금강경》 을 공부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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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현대인은

반드시

《금강경》 을 공부해야 하는가 ― 움켜쥔 손을 펴는 공부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Ⅰ. 여는말 ― 세상을 손안에 넣었는데, 정작 마음 둘 곳을 잃어버린 사람들

현대인은 너무 많은 것을 손에 넣었다. 손바닥만 한 휴대전화 한 대 속에 은행도 있고, 시장도 있고, 신문도 있고, 학교도 있고, 세계의 광장도 있다. 지구 반대편의 전쟁과 한 사람의 저녁 식탁이 몇 초 차이로 눈앞에 도착한다. 인간은 이전 어느 시대보다 많은 것을 보고, 듣고, 소유하며 살아간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세상은 손안으로 들어왔는데, 마음은 자꾸 손밖으로 빠져나간다. 집은 넓어졌는데 마음 둘 방 하나가 좁아지고, 연락처는 수천 개가 되었는데 정작 아픈 밤 한 사람에게 전화를 걸기 어려워졌다. 사진은 구름 저장소에 넘쳐나는데 한 장면을 오래 바라보는 눈은 희미해지고, 말은 강물처럼 쏟아지는데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자꾸 마른 강바닥이 생긴다.

현대인의 불행은 가진 것이 적어서만 생기지 않는다. 너무 많이 붙들고 있기 때문에 생기기도 한다.

돈을 붙든다. 이름을 붙든다. 직함을 붙든다. 사랑했던 사람을 붙들고, 미워했던 사람도 놓지 못한다. 젊은 날의 영광을 붙들고, 오래전 상처의 못까지 뽑지 않은 채 가슴에 간직한다.

손은 두 개인데 평생 붙드는 것은 백 가지가 넘는다. 그러니 마음이 피곤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금강경》 은 바로 그 손을 바라보게 하는 책이다. 더 움켜쥐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손가락 사이로 무엇이 새어나가는지 두려워하기 전에, 애초에 무엇을 그토록 힘주어 잡고 있었는지 돌아보게 한다.

이 오래된 경전은 세상을 버리는 법을 말하는 책이 아니다. 세상에 붙잡히지 않는 법을 말한다. 사람을 떠나는 법이 아니라, 사람을 소유하지 않고 사랑하는 법을 말한다. 삶을 포기하는 책이 아니라, 삶을 너무 무겁게 짊어지지 않는 법을 건넨다. 21세기의 인간에게 《금강경》 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는 너무 많이 배웠지만 놓는 법은 배우지 못했다. 너무 빨리 달리는 법은 익혔지만 멈추는 법은 배우지 못했다. 세상의 문을 수없이 열었지만 자기 마음의 문턱에서는 자주 길을 잃는다. 《금강경》 은 그 문턱에 놓인 오래된 등불이다.

Ⅱ. 금강金剛 ― 부수어야 할 것은 세상이 아니라, 굳어버린 생각이다

금강은 단단하다. 보석 가운데 가장 단단한 것에 빗대어, 허망한 집착을 끊는 지혜를 상징한다. 《금강경》 을 처음 접하면 무언가 거대한 것을 깨뜨리는 경전처럼 느껴질 수 있다. 그런데 이 경전이 깨뜨리려는 것은 산도 아니고, 집도 아니고, 세상도 아니다. 가장 단단하게 굳어 있는 것은 인간의 생각이다.

사람은 한 사람을 만나기도 전에 이름표부터 붙인다.

저 사람은 성공한 사람. 저 사람은 실패한 사람. 저 사람은 내 편. 저 사람은 미운 사람. 저 사람은 배운 사람. 저 사람은 별 볼 일 없는 사람.

이름표를 붙이는 순간 사람은 사라지고 분류만 남는다.

사람은 살아 움직이는데, 판단은 액자 속에서 굳어버린다. 《금강경》 의 유명한 구절,

“凡所有相 皆是虛妄 범소유상 개시허망.”

무릇 형상 있는 것은 모두 허망하다는 이 문장을 단순히 “세상은 모두 헛되다.”라는 체념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

꽃이 거짓이라는 뜻이 아니다. 꽃을 영원한 꽃이라 붙드는 마음이 문제다. 사람이 허망하다는 뜻도 아니다. 한 사람의 한 장면을 붙잡아 그 사람 전체라고 단정하는 마음이 허망하다.

오늘의 인간은 사진 한 장과 문장 한 줄로 사람을 재판한다. SNS의 짧은 영상 하나가 사람의 전 생애를 대신하고, 기사 제목 몇 글자가 한 인간의 인격 전체를 결정한다.

《금강경》 은 그 성급한 판결문 앞에 붓을 내려놓게 한다. 세상은 언제나 우리가 붙인 이름보다 넓다. 사람은 언제나 우리가 내린 판단보다 깊다. 한 번 피었다 진 꽃을 보고 꽃의 전 생애를 다 보았다고 말할 수 없듯, 사람 역시 한 사건으로 다 읽을 수 없다. 《금강경》 은 인간의 눈에 붙어 있는 낡은 라벨을 떼는 공부다.

Ⅲ. 현대인은 마음에 너무 많은 가구를 들여놓았다 ― 집착은 마음의 공간을 빼앗는다

사람은 집을 정리하면서 필요 없는 물건은 버린다. 오래 입지 않은 옷도 버리고, 쓰지 않는 가구도 치운다. 그런데 마음의 창고는 좀처럼 비우지 않는다.

십 년 전 들은 모욕도 그대로 두고, 오래전 실패도 먼지를 덮어쓴 채 보관한다. 누구에게 받은 칭찬도 버리지 못하고, 누구에게 받은 상처도 내보내지 않는다. 마음속 방마다 낡은 가구가 가득하다. 앉을 자리조차 없는데 새로운 사람을 들이려 한다. 바로 여기서 《금강경》 의 집착에 대한 통찰이 살아난다.

집착은 소유의 다른 이름이 아니다. 불안의 또 다른 얼굴이다. 잃을까 두려워 붙들고, 떠날까 두려워 붙들고, 잊힐까 두려워 자기 이름을 자꾸 세상에 새긴다.

사랑도 붙들면 소유가 된다. 명예도 붙들면 사슬이 된다. 신념도 붙들면 벽이 된다. 심지어 상처도 오래 붙들면 자기 정체성이 된다.

어떤 사람은 상처가 아파서 놓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너무 오래 품은 나머지 그 상처가 사라지면 자기 자신 일부까지 없어지는 것처럼 느낀다.

《금강경》 은 마음의 이 오래된 창고에 문을 연다. 버리라고 윽박지르지 않는다. 다만 하나씩 꺼내어 보여준다.

이것이 정말 아직 필요한가. 이 이름이 지금의 나인가. 이 상처가 오늘까지 나를 설명해야 하는가. 놓는다는 것은 없애는 것이 아니다. 놓을 자리를 찾아주는 것이다. 떠나간 사람은 기억의 자리에 두고, 지나간 명예는 지난 계절의 액자 속에 두며, 실패는 교훈의 서랍에 넣어두는 것이다. 모든 것을 품에 안고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Ⅳ.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 ― 닻은 내리지 않되, 항해는 멈추지 않는 마음

《금강경》 의 심장과도 같은 문장이 있다.

應無所住 而生其心 응무소주 이생기심.

어디에도 머물지 말고, 그 마음을 내라는 뜻이다. 이 문장을 가만히 바라보면 이상한 긴장이 있다. 머물지 말라고 하면서 마음을 내라고 한다. 떠나라고 하면서 사랑하라고 한다. 비우라고 하면서 살아 있으라고 한다. 여기에 《금강경》 의 깊이가 있다.

무주는 무관심이 아니다. 강물이 돌에 닿았다고 흐름을 포기하지 않는 것과 같다. 돌을 미워하지도 않고, 돌을 등에 지고 가지도 않는다. 돌을 돌아 흐른다. 사람도 그렇게 살아야 할 때가 있다. 직함을 맡되 직함이 자기 이름 전체가 되게 하지 않고, 사랑하되 상대를 자기 소유로 만들지 않으며, 성공하되 성공이라는 높은 의자에 몸을 묶지 않는 것.

오늘날 많은 사람이 퇴직 뒤 깊은 허무를 겪는다. 명함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어제까지 “사장님”, “교수님”, “원장님”, “회장님”으로 불리다가 이름 석 자만 남았을 때 비로소 빈자리가 보인다. 그동안 직함이 사람을 입고 살았던 것이다.

《금강경》 은 직함을 버리라고 하지 않는다. 직함보다 사람이 먼저라는 사실을 잊지 말라고 한다. 옷을 벗었다고 몸이 사라지지 않는다.

명함이 없어졌다고 존재가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응무소주는 존재를 얇게 만드는 공부가 아니다. 껍질을 덜어 존재를 더 선명하게 만드는 공부다.

Ⅴ. 아상我相 ― 마음 한가운데 너무 큰 자기 동상을 세우지 말라

현대인의 마음에는 보이지 않는 광장이 하나 있다. 그 광장 한복판에 자기 동상을 세우고 사는 사람이 적지 않다.

내 생각. 내 경력. 내 성취. 내 상처. 내 작품. 내 자식. 내 신념.

모든 문장이 ‘내’에서 시작한다. 그 동상이 커질수록 타인은 작아진다.

《금강경》 의 아상我相은 바로 이 자기 절대화에 칼끝을 댄다. 자기를 없애라는 뜻이 아니다. 자신을 세계의 중심축으로 착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사람 사이의 많은 갈등은 사실 거대한 이념에서 생기지 않는다. 아주 작은 자존심의 모서리가 서로 부딪쳐 생긴다. 부부가 등을 돌리고, 형제가 멀어지고, 친구가 원수가 되는 과정에는 거창한 철학보다 “왜 나를 무시했는가.”라는 한 문장이 숨어 있는 경우가 많다. 자존심은 종이보다 얇은데, 사람은 그것을 철판처럼 들고 산다.

《금강경》 은 그 철판에 작은 구멍 하나를 낸다. 그 틈으로 타인의 사정이 들어온다.

내가 보지 못한 그의 밤. 내가 듣지 못한 그의 울음.

내가 몰랐던 그의 사정을 조금이라도 보게 된다.

자기 확신이 너무 강하면 타인의 얼굴이 흐려진다. 아상이 옅어질수록 세상에는 얼굴이 다시 생긴다.

Ⅵ. 스마트폰 시대의 무주無住 ― 우리는 하루에도 수백 번 남의 마음에 세 들어 산다

현대인은 하루 종일 남의 삶을 들여다본다. 누가 어디에 갔는지, 무엇을 먹었는지, 어떤 집에 사는지, 얼마나 성공했는지, 누구와 함께 웃고 있는지 화면을 통해 끝없이 본다. 그러는 동안 자기 하루는 자꾸 뒷줄로 밀린다. 남의 여행 사진을 보다가 자기 방이 초라해지고, 누군가의 성공 소식을 보다가 자기 인생이 늦었다고 느낀다. 실제로 가진 것을 잃은 것도 아니다. 그런데 마음은 이미 패배한다. 비교는 현대인의 가장 값비싼 소비다. 돈은 쓰지 않아도 마음을 소모한다.

《금강경》 의 무주無住는 스마트폰 시대에 더욱 절실하다. 본 것을 마음에 영주권자로 들이지 않는 것. 들은 말을 하루 종일 머릿속에 세 들어 살게 하지 않는 것. 누군가의 비난이 내 안방을 차지하게 하지 않는 것.

칭찬도 마찬가지다. 비난만 독이 되는 것이 아니다. 칭찬도 오래 붙들면 중독이 된다. 박수가 멈추는 순간 자신이 사라진 듯 느끼기 때문이다. 현대인은 집 현관문에는 비밀번호를 걸어두면서 마음에는 비밀번호를 두지 않는다. 낯선 사람의 댓글 하나가 그대로 들어와 하루를 차지한다. 뉴스 한 줄이 분노를 데리고 들어오고, 광고 하나가 열등감을 데리고 들어온다.

《금강경》 은 마음의 주인이 누구인지 다시 확인하게 한다. 세상의 모든 말을 막을 수는 없다. 다만 모든 말을 안방까지 들이지 않을 수는 있다.

Ⅶ. 인간관계 ― 사람을 기억 속 박제 剝製 표본標本으로 만들지 말라

사람은 상대를 현재의 모습보다 과거의 기억으로 볼 때가 많다. 십 년 전 실수한 사람은 여전히 실수 많은 사람이고, 한 번 배신한 사람은 영원히 배신자로 남는다. 자녀가 다 자랐는데도 부모의 눈에는 어린 시절의 서툰 아이로 남아 있고, 부부는 수십 년 전의 잘못을 오늘 식탁 위에 다시 꺼내놓는다.

“당신은 원래 그런 사람이야.”

이 말은 무서운 문장이다. 한 인간의 변화 가능성을 닫아버리기 때문이다.

《금강경》 의 상相에 대한 경계는 인간관계에서 더욱 절실하다. 사람은 사진이 아니다. 강물이다. 흐르고, 흔들리고, 돌아가고, 깊어진다.

어제의 그와 오늘의 그가 완전히 같을 수 없다. 그런데 우리는 타인을 마음속 액자에 넣고 한 번 찍은 사진으로 평생 대한다. 관계가 답답해지는 까닭이다. 사람에게 새로운 계절이 올 가능성을 인정하는 것. 그것 역시 무상無相의 한 모습일 수 있다. 낙엽이 떨어졌다고 나무가 끝난 것은 아니다. 겨울나무를 보고 봄꽃까지 부정해서는 안 된다. 사람도 그렇다.

Ⅷ. 성공한 사람일수록 금강경 앞에 오래 앉아야 한다 ― 정상은 가장 바람이 센 곳이다

가난한 사람만 집착하는 것이 아니다. 성공한 사람의 집착은 때때로 더 크다. 정상에 올라간 사람은 내려가는 길을 패배라고 생각하기 쉽다. 박수를 오래 받은 사람은 박수가 자기 권리라고 착각하기 쉽다. 명예가 옷이었는데 어느 순간 피부가 되어버린다. 그때부터 사람은 늙는 것이 아니라 자리를 지키느라 굳어진다. 높이 오른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더 높은 사다리가 아니다. 내려갈 계단이다.

《금강경》 은 그 계단을 보여준다. 얻었으되 얻은 것에 자신을 묶지 않는 것. 공을 세웠으되 공적비를 자기 가슴에 세우지 않는 것. 장량이 한나라 창업을 도운 뒤 권력의 중심에서 조금씩 물러난 공성신퇴功成身退의 지혜도 여기와 맞닿는다.

정상에는 난간이 없다. 높아질수록 바람은 세다. 자기 이름을 붙든 두 손으로는 난간 없는 정상에서 몸을 지탱하기 어렵다. 손 하나쯤 비워야 한다. 사람을 붙잡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다.

Ⅸ. 작가에게 《금강경》 은 퇴고의 경전이다 ― 문장은 채우는 일보다 덜어내는 일에서 깊어진다

작가에게 《금강경》 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문학은 말을 사용하는 예술이다. 그런데 좋은 문장은 말을 많이 넣는다고 태어나지 않는다.

좋은 시는 가장 빛나는 단어 하나를 남기기 위해 열 개를 버리는 데서 완성되기도 한다. 문장은 채우는 기술보다 덜어내는 용기가 필요하다. 작가 역시 아상에 빠질 수 있다. 자기 문체를 사랑하는 일이 지나치면 자기 문체의 포로가 된다. 자기 해석을 믿는 일이 지나치면 작품보다 평론가가 앞으로 걸어나온다.

시인이 자기 감동을 과도하게 설명하면 독자가 들어갈 자리가 사라진다. 좋은 작품에는 빈 의자가 있어야 한다. 독자가 앉을 자리다. 한 줄의 여백이 때로는 열 줄의 해설보다 깊다.

《금강경》 의 무주와 무상無相은 문학의 본질과도 닮아 있다. 쓰되 소유하지 않는 것. 보여주되 강요하지 않는 것. 말하되 독자의 해석이 들어올 문 하나를 남겨두는 것.

문학도 비움에서 깊어진다. 가득 찬 방에는 새로운 사람이 들어갈 수 없다. 가득 찬 문장에는 독자의 숨이 들어갈 자리가 없다. 작가는 마지막에 붓을 놓을 줄 알아야 한다. 그 붓을 놓는 순간부터 작품은 독자에게 걸어가기 시작한다.

Ⅹ. 금강경은 허무의 책이 아니라 사랑을 살리는 책이다 ― 꽃이 질 것을 알기에 더 오래 바라본다

《금강경》 을 잘못 읽으면 모든 것이 허망하니 아무것에도 마음 주지 말라는 책처럼 보일 수 있다. 그것은 매우 거친 독법이다. 꽃이 진다고 꽃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노을이 곧 사라질 것을 안다고 하늘을 바라보지 않는가. 부모가 영원히 곁에 있을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효도를 미루어야 하는가. 유한하다는 사실은 사랑을 줄이는 이유가 아니라, 사랑을 서두르게 하는 이유가 된다. 꽃이 지지 않는다면 봄은 지금처럼 눈부시지 않을 것이다. 사람이 영원히 떠나지 않는다면 오늘 건네는 안부가 그토록 귀하지 않을 것이다.

《금강경》 의 무상無常과 무상無相의 사유는 삶을 차갑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붙들지 않고 사랑할 수 있게 한다. 소유하지 않고 가까이할 수 있게 한다. 떠날 수 있음을 알기에 지금의 손을 더 따뜻하게 잡게 한다. 비움 끝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다. 자리가 남는다.

사랑이 앉을 자리. 용서가 들어올 자리, 타인의 고통이 잠시 쉬어갈 자리.

마음을 비운다는 것은 빈집이 되는 일이 아니다. 누군가를 맞을 수 있는 집이 되는 일이다.

Ⅺ. 고통 앞에서 《금강경》 을 공부해야 하는 까닭 ― 첫 번째 화살보다 두 번째 화살이 더 깊다

인생에는 피할 수 없는 화살이 있다.

늙음. 질병. 이별. 실패. 죽음.

문명이 아무리 발달해도 이 화살을 모두 막을 수는 없다.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면 아프다. 몸이 병들면 힘들다. 실패하면 가슴이 무너진다.

《금강경》 은 그 아픔이 없다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첫 번째 화살을 맞은 뒤 자기 손으로 두 번째 화살을 다시 꽂지 않게 한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었다.” “모든 것은 끝났다.”

이런 생각이 실제 고통 위에 또 하나의 고통을 얹는다. 사람은 사건 때문에 한 번 아프고, 그 사건에 대한 자기 생각 때문에 다시 아프다.

《금강경》 은 첫 번째 화살을 없애주는 마법이 아니다. 두 번째 화살을 들고 있는 자기 손을 바라보게 한다. 삶에는 되돌릴 수 없는 강이 있다. 그 강 앞에서 밤새 물을 거꾸로 밀어 올린다고 상류로 돌아가지는 않는다. 때로는 물을 보내야 한다. 강물은 떠나보내는 법을 알고 있기 때문에 바다에 닿는다.

Ⅻ. 현대인은 《금강경》 을 어떻게 공부해야 하는가 ― 경전을 책장에서 꺼내 하루의 식탁 위에 올려놓아야 한다

《금강경》 은 많이 외운 사람보다 한 구절을 삶에 옮긴 사람에게 더 깊이 열린다.

화를 낼 때 아상을 살펴보는 것. 누군가를 미워할 때 그 사람을 하나의 상으로 굳혀놓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는 것. 칭찬을 받을 때 그 박수를 자기 존재 전체로 착각하지 않는 것. 비난을 받을 때 그 비난 한 줄을 자기 인생의 판결문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 자녀를 사랑하되 자녀의 삶까지 대신 살려 하지 않는 것. 돈을 벌되 통장 잔액이 자기 인격의 높이가 되지 않게 하는 것. 글을 쓰되 자기 문장이 진리의 마지막 문장이라고 여기지 않는 것.

이것이 현대적인 《금강경》 공부다. 경전을 향 냄새 나는 책상 위에만 놓아둘 필요는 없다. 회의실에도 가져가야 한다. 가정의 식탁에도 가져가야 한다. SNS 화면 앞에도 가져가야 한다. 병실의 밤에도 가져가야 한다. 박수받는 단상 위에도 가져가야 한다. 사람이 가장 흔들리는 자리가 바로 경전이 가장 필요한 자리다.

ⅩⅢ. 맺음말 ― 두 손을 펴야 사람 하나를 안을 수 있다

현대인은 너무 오래 주먹을 쥐고 살아왔다.

돈을 쥐고, 명예를 쥐고, 상처를 쥐고, 자존심을 쥐고, 자기 생각을 쥐고, 떠나간 시간의 옷자락까지 쥐고 산다.

주먹을 오래 쥐고 있으면 손바닥 안에도 상처가 생긴다. 《금강경》 은 그 손을 억지로 벌리지 않는다. 다만 한참 바라보게 한다.

왜 이렇게 힘을 주고 있는가. 무엇을 빼앗길까 두려운가. 그것이 정말 내 것인가. 끝까지 가져갈 수 있는 것인가.

이 질문 앞에서 손가락의 힘이 조금씩 풀린다. 그때 비로소 손바닥이 보인다.

사람을 잡을 수 있는 손. 눈물을 닦아줄 수 있는 손. 떠나는 사람에게 흔들어줄 수 있는 손. 누군가를 품에 안을 수 있는 손.

《금강경》 의 마지막 목적은 빈손이 되는 데 있지 않다. 따뜻한 손이 되는 데 있다.

세상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의 거리를 바로 세우는 일. 사람을 놓아버리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소유하지 않고 사랑하는 일. 명예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명예가 자신의 주인이 되지 못하게 하는 일. 죽음을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유한한 오늘을 더 귀하게 사는 일.

“범소유상 개시허망凡所有相 皆是虛妄.”

눈앞의 형상에 갇히지 말라는 말은 결국 보이는 것 너머의 사람을 보라는 뜻으로 다가온다.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

어디에도 붙들려 살지 않되, 세상을 향한 마음만은 살아 있게 하라는 이 한 문장은 21세기의 인간에게 여전히 뜨겁다. 현대문명은 인간에게 세상을 움켜쥐는 법을 가르쳤다. 《금강경》 은 세상을 움켜쥔 손으로 자기 목까지 조르지 않는 법을 가르친다.

우리가 금강경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는 산문 밖에 있지 않다. 오늘 아침 건넨 말 한마디에 있고, 상대에게 품은 오래된 미움에 있고, 비워내지 못한 서랍 하나에 있고, 아직도 내려놓지 못한 이름 하나에 있다.

인생은 결국 무엇을 더 쌓았는가보다, 마지막에 무엇을 내려놓을 수 있었는가로 깊이를 얻는다. 가득 찬 항아리는 더 받을 수 없다. 꽉 쥔 손은 누구도 안을 수 없다. 그러므로 《금강경》 은 현대인에게 오래된 경전이 아니다.

너무 많이 가진 시대에 찾아온 가장 절실한 비움의 교과서이며, 너무 빨리 달리는 시대에 놓인 하나의 디딤돌이고, 너무 크게 자기 이름을 쓰는 시대에 남겨진 작은 여백이다. 그 여백에서 비로소 사람의 숨이 들어온다. 그리고

그 숨이 머무는 자리에서, 우리는 다시 사람에게로 돌아갈 수 있다.

ㅡ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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