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

내가 내게 들려주는 말 ㅡ청람

내가 내게 들려주는 말 ㅡ청람 2026.09.05
내가 내게 들려주는 말 ㅡ청람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깨달은 자의 모습?

ㅡ내가 내게 들려주는 말

청람 김왕식

깨달았다는 사람들을 만나보면 대개 짐이 많다

경전 몇 권 어록 몇 권 선지식 몇 사람 수행 연한 몇십 년

머릿속 서가가 웬만한 도서관보다 높다

누가 한마디 꺼내면 곧바로 몇 장 몇 절이 튀어나오고 문장이 끝나기도 전에 정답이 먼저 도착한다

세상의 말들은 그들이 공부한 책 안에서만 통행증을 얻는다

책에 있으면 진리이고 책에 없으면 미혹이다

이상한 일이다

그 책도 처음에는 누군가의 맨손에서 나온 한 문장이었을 텐데

후세 사람들은 그 문장을 유리관에 넣고 절을 하며 외운다

외우는 일이 깊어질수록 얼굴에는 힘이 들어가고

한 구절 놓칠까 눈썹은 서로 가까워지고

상대가 다른 말을 꺼내면 금세 마음속에 불합격 도장이 찍힌다

깨달음이 깊다는데 왜 표정은 자꾸 좁아지는지

비웠다는데 왜 자기 생각으로 방 안을 가득 채우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더 우스운 것은 침묵마저 기술이 되는 순간이다

눈을 반쯤 감고 뜸을 들이고 뜻 모를 한마디를 던진 뒤 상대가 알아듣지 못하면 그것마저 상대의 공부 부족이 된다

선문답도 때로는 잘 차려입은 무대가 된다

침묵에도 폼이 붙으면 침묵은 이미 말보다 시끄럽다

정작 깊이 닿은 사람은 다른 모양일지 모른다

누가 제 생각과 다른 말을 해도 얼굴부터 고치지 않는다

끝까지 듣는다

말허리를 자르지 않고 자기 경전을 꺼내 들지 않고 상대의 문장 안에 잠시 앉아본다

맞장구도 크지 않다

그저 고개 한 번 끄덕인다

네 말에도 까닭이 있겠지

저 사람 말에도 그 사람이 살아온 만큼의 하늘이 있겠지

산은 자기 높이를 설명하지 않는다

강은 자기 흐름이 옳다고 돌멩이를 설득하지 않는다

달도 자기 빛을 믿으라고 밤새 강연하지 않는다

다만 제 자리에 있을 뿐이다

깨달은 사람도 그쯤이면 좋겠다

자기 답을 들고 남의 입을 막는 사람이 아니라

남의 말을 들을 수 있을 만큼 자기 안이 비어 있는 사람

무엇이 옳은지 먼저 판결하지 않고

사람 하나가 왜 그런 말을 하게 되었는지 그 사정을 볼 줄 아는 사람

깨달음의 끝에는 아마 박수도 논쟁도 증명서도 없을 것이다

말 한마디 덜 얹고 표정 하나 덜 세우고

누군가의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그 앞에 머물러 주는 것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깊이 깨달은 사람은 아무도 그가 깨달았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일지 모른다

ㅡ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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