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디세이》를 현대인의 자기통치학으로 다시 읽다
― 《오디세이》를 현대인의 자기통치학으로 다시 읽다 2026.08.23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
세이렌의 시대, 인간은 무엇에 자신을 묶을 것인가 ― 《오디세이》 를 현대인의 자기통치학으로 다시 읽다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Ⅰ. 여는말 ㅡ오늘의 인간에게는 바다가 없다고 누가 말하는가
오디세우스는 바다를 건넜다. 현대인은 화면을 건넌다. 오디세우스 앞에는 폭풍과 괴물이 있었고, 오늘의 인간 앞에는 정보와 욕망과 속도가 있다. 형태만 달라졌을 뿐 인간을 길에서 벗어나게 만드는 힘은 여전히 존재한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휴대전화를 바라본다. 누군가의 성공이 보이고, 누군가의 여행이 보이며, 더 좋은 집과 더 비싼 자동차와 더 젊은 얼굴이 나타난다. 손가락 하나를 움직일 때마다 새로운 세상이 펼쳐진다. 세상은 이전보다 훨씬 넓어졌는데 사람의 마음은 이상하게 더 좁아졌다. 많이 보지만 깊이 보지 못하고, 많은 사람과 연결되어 있으면서 한 사람의 아픔을 오래 들여다보기 어려워졌다. 욕망의 속도는 빨라졌고 마음의 귀가는 늦어졌다.
이에 《오디세이》 를 다시 읽을 필요가 있다. 그동안 오디세우스는 흔히 모험의 영웅, 지략의 인간, 귀향의 주인공으로 읽혔다.
이제 조금 다른 곳에 등을 밝혀볼 필요가 있다. 《오디세이》 는 고대의 모험담이기 이전에 인간이 자기 자신을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오래된 자기통치의 교과서다.
트로이 목마는 창의성을 말하고 세이렌은 욕망을 말하며 돛대의 밧줄은 절제를 말하고 칼립소는 성공이라는 이름의 체류를 말한다. 페넬로페의 베틀은 지속을 가르치고 이타카는 인간이 끝내 돌아가야 할 본래의 자리를 상징한다. 현대인은 더 이상 목선을 타지 않는다. 그럼에도 모두가 자기만의 오디세이를 항해하고 있다.
Ⅱ. 트로이 목마 ㅡ힘이 아니라 관점을 바꾸어야 문이 열린다
그리스군은 10년 동안 트로이 성벽 앞에서 싸웠다. 수많은 창이 날아갔다. 칼이 부딪혔다. 사람이 죽었다. 성벽은 그대로였다. 오디세우스는 어느 순간 전쟁의 방식을 바꾼다. 성벽을 더 세게 두드리는 대신 성벽이라는 생각 자체에서 벗어난다. 문을 부술 수 없다면 스스로 문을 열게 만들면 된다. 트로이 목마는 거기에서 태어났다. 현대인의 삶에도 트로이 성벽이 많다. 직장에서 인정받지 못한다고 더 오래 일한다. 관계가 틀어지면 더 많은 말로 상대를 설득하려 한다.
글이 써지지 않으면 더 많은 수식어를 붙인다. 사업이 어려우면 규모부터 키우려 한다. 자녀가 말을 듣지 않으면 목소리를 높인다. 우리는 문제 앞에서 대개 힘을 더한다.
오디세우스는 힘을 더하지 않았다. 방향을 바꾸었다. 여기에 현대인이 배울 첫 번째 삶의 원리가 있다. 해결되지 않는 문제 앞에서는 노력을 의심하기 전에 방법을 의심해야 한다. 愚公移山도 귀하지만 세상의 모든 산을 삽으로 옮길 필요는 없다. 산을 돌아가는 길이 있다면 그것 또한 지혜다. 인생에는 성실만으로 풀리지 않는 문제가 있다. 성실에 관점이 더해져야 한다.
열심히 사는 것과 잘 사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니다. 노를 빨리 젓는 것보다 배의 방향을 확인하는 일이 먼저다. 삶이 막힐 때 현대인은 더 큰 힘을 찾기보다 다른 각도의 눈을 가져야 한다.
Ⅲ. 현대의 세이렌
지금 세이렌은 노래하지 않는다, 알림음을 울린다. 오디세우스에게 가장 위험한 존재는 칼을 든 거인이 아니었다. 아름답게 노래하는 세이렌이었다. 여기에서 인간에 관한 오래된 역설 하나가 드러난다. 우리에게 가장 위험한 것은 대개 위험하게 생기지 않았다.
현대의 세이렌도 마찬가지다. 세이렌은 이제 바위섬에 앉아 있지 않는다. 손바닥 안에 들어와 있다. 휴대전화 알림음이 세이렌의 노래가 되었다. 조회 수가 노래한다. 좋아요 숫자가 노래한다. 돈이 노래한다. 명예가 노래한다. 젊음이 노래한다. 비교가 노래한다.
세상은 끊임없이 말한다. 더 가져라. 더 보여라. 더 유명해져라. 더 빨리 가라. 남보다 앞서라. 이 노래가 무서운 까닭은 듣기 좋기 때문이다.
사람은 명령에는 저항하지만 유혹에는 스스로 걸어간다. 칼은 피할 수 있어도 달콤한 칭찬은 피하기 어렵다. 오디세우스는 자신의 귀와 의지를 과신하지 않았다. 부하들에게 말했다. 자신을 돛대에 묶으라고. 풀어 달라고 소리쳐도 풀지 말라고. 바로 이것이 현대인에게 필요한 두 번째 지혜다. 의지가 아니라 구조로 자신을 지켜야 한다. 공부해야 할 사람이 휴대전화를 책상 위에 올려둔 채 집중력을 탓하는 것은 세이렌 앞에 배를 세워두고 마음만 굳게 먹는 것과 비슷하다. 절제해야 할 소비가 있다면 결제를 어렵게 만들어야 한다. 말을 줄여야 한다면 즉시 답하지 않는 습관을 만들어야 한다. 글을 써야 한다면 하루의 일정한 시간을 문장 앞에 묶어두어야 한다. 건강을 지키려면 기분 좋은 날에만 운동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 속에 시간을 박아두어야 한다.
현대인의 돛대는 습관이고 밧줄은 원칙이며 밀랍은 거리 두기다. 진정 강한 사람은 모든 유혹을 이길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 아니다. 자신이 약해질 수 있다는 사실까지 삶의 설계에 넣는 사람이다. 극기복례克己復禮가 먼 고전의 말이 아닌 까닭이 여기에 있다. 자기를 이긴다는 것은 자신을 학대하는 일이 아니다. 본래 있어야 할 자리에서 욕망이 주인 노릇하지 못하도록 하는 일이다.
Ⅳ. 칼립소의 섬
ㅡ성공도 오래 머물면 난파가 된다
칼립소의 섬은 지옥이 아니었다. 아름다운 곳이었다. 오디세우스를 사랑하는 존재가 있었고 부족할 것이 없는 곳이었다. 불멸까지 약속된 삶이었다. 그런데 그는 떠나고 싶어 했다. 이 장면을 현대적으로 읽으면 매우 낯선 의미가 열린다.
사람을 망치는 것은 실패만이 아니다. 성공도 사람을 붙잡아둘 수 있다. 한 번 얻은 직위 한때의 명성 과거의 수상 경력 젊은 시절의 성공 사람들이 붙여준 호칭 이 모든 것이 칼립소의 섬이 될 수 있다.
처음에는 쉼터였는데 어느 날 감옥이 된다. 사람은 실패에서만 길을 잃는 것이 아니다. 성공한 자리에서도 길을 잃는다. 특히 작가는 더욱 그렇다. 한 작품이 호평받았다고 그 문체 안에 평생 머물면 자신의 문장이 자신을 가두는 섬이 된다. 박수를 오래 들으면 귀가 변한다. 박수 없는 방에서는 글을 쓰지 못하게 된다. 독자가 아니라 반응을 기다리게 된다. 문학이 자기 성찰의 방에서 나와 자기 과시의 진열장에 눕는 순간, 펜은 이미 칼립소의 섬에 정박한 것이다. 현대인에게 필요한 세 번째 원리는 명확하다. 좋은 자리에서도 떠날 때를 알아야 한다.
功成身退.
일을 이루었으면 한 발 물러날 줄 알아야 한다는 오래된 지혜다. 꽃은 피어 있는 동안 아름답지만 꽃이 평생 가지에 매달려 있다면 열매가 올 자리가 없다. 성공을 지키려다 생을 잃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인생은 한 번의 정상에서 끝나는 등산이 아니다. 산을 내려와 다시 사람의 마을로 돌아오는 데까지가 한 번의 완전한 산행이다.
Ⅴ. 페넬로페의 베틀
ㅡ위대한 삶은 대부분 반복으로 이루어진다
페넬로페는 칼을 들지 않았다. 바다를 건너지 않았다. 괴물과 싸우지도 않았다. 그녀는 매일 베를 짰다. 낮에 짜고 밤에 풀었다. 화려하지 않다. 영웅담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그런데 그 반복이 스무 해의 시간을 견뎠다.
현대인은 새로운 것을 좋아한다. 새로운 직장 새로운 관계 새로운 유행 새로운 정보 새로운 목표.
새것을 찾는 능력은 커졌지만 한 가지를 오래 지켜내는 힘은 약해졌다. 문학도 크게 다르지 않다. 한 편의 좋은 시는 영감 한 번으로 태어나지 않는다. 버리고 고치고 덜어내는 시간이 필요하다. 한 문장을 백 번 바라보는 노동이 필요하다. 대패가 나무의 겉살을 한 겹씩 밀어내듯 글도 자신의 허영을 한 겹씩 벗겨내야 한다.
페넬로페의 베틀은 이 시대에 지속의 윤리를 가르친다. 천재성보다 오래 버티는 힘. 속도보다 반복. 박수보다 축적. 생은 대개 거창한 날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평범한 날들에 의해 만들어진다. 한 사람을 사랑하는 일도 그러하다. 한 직업을 지키는 일도 그러하다. 글 한 편을 완성하는 일도 그러하다. 하루의 작은 바느질이 모여 한 생의 옷이 된다.
Ⅵ. 오디세우스가 버려야 했던 것 ㅡ현대인은 무엇을 더 얻을 것인가보다 무엇을 버릴 것인가를 먼저 정해야 한다
오늘의 사회는 추가의 문명이다. 더 배운다. 더 가진다. 더 연결한다. 더 저장한다. 더 보여준다.
삶은 계속 무거워진다. 오디세우스의 항해는 그 반대 방향으로 흘러간다. 처음에는 왕이었다. 군대를 거느렸다. 배도 많았다. 부하도 많았다. 항해가 길어질수록 하나씩 잃는다. 배를 잃는다. 동료를 잃는다. 재산을 잃는다. 신분마저 내려놓는다. 마침내 거지 차림으로 자기 고향에 돌아온다. 놀랍게도 모든 것을 잃어갈수록 오디세우스는 이타카에 가까워진다.
여기에 현대사회가 가장 불편해할 질문이 숨어 있다. 인간은 무엇을 얻어야 자기 자신에게 가까워지는가. 혹은 무엇을 버려야 자기 자리로 돌아갈 수 있는가. 평생 채우는 공부만 한 사람에게는 비우는 공부가 필요하다. 말을 많이 배운 사람에게는 침묵을 배울 때가 있다. 높아지는 일만 익힌 사람에게는 낮아지는 공부가 필요하다. 자기 이름을 세상에 크게 쓰려는 사람일수록 타인의 이름을 읽어주는 연습이 필요하다.
문학 역시 더 화려한 비유를 얻는 데만 있지 않다. 좋은 문장은 때로 한 문장을 더 쓰는 데서 나오지 않고 한 문장을 버리는 데서 완성된다. 비움은 빈곤이 아니다. 본질이 앉을 자리를 만드는 일이다.
Ⅶ. 이타카 ㅡ목적지가 아니라 인간의 내부에 있어야 할 기준점
오디세우스에게 이타카는 작은 섬이었다. 제국도 아니었다. 세계의 중심도 아니었다. 그런데 그는 수많은 풍요로운 섬보다 그곳을 원했다. 현대인은 이타카를 잃어가고 있다. 어디에 살 것인지는 정하지만 어떤 사람으로 살 것인지는 미뤄둔다. 퇴직 계획은 세우면서 삶의 품격에 대한 계획은 적다. 노후 자금은 계산하지만 노후에 어떤 얼굴을 가진 사람이 될지는 좀처럼 계산하지 않는다. 자녀의 대학은 걱정하면서 그 아이가 어떤 어른이 될지는 성적표 뒤로 밀려난다. 작가는 몇 권의 책을 낼 것인지는 생각하면서 자기 글이 사람에게 어떤 온도를 남길 것인지는 놓치기도 한다.
이타카는 주소가 아니다. 삶의 기준점이다. 돈을 벌어도 돌아갈 자리. 유명해져도 돌아갈 자리. 분노했을 때도 돌아갈 자리. 누군가를 비평할 때도 돌아갈 자리. 상처받았을 때도 다시 앉아야 할 마음의 자리다.
이를 고전의 말로 옮기면 반구저기反求諸己와 가까워진다. 문제가 생길 때 화살부터 바깥으로 날리지 않고 먼저 자신에게 돌아오는 태도다. 특히 글을 쓰는 사람에게 이타카는 더욱 엄중하다. 남의 문장을 재단하기 전에 자기 문장의 마음부터 살펴야 한다. 타인의 미숙함을 말하기 전에 자신의 오만이 문장 끝에 묻어 있지 않은지 살펴야 한다. 비평의 칼은 날카로워야 하나 칼을 잡은 손에는 체온이 있어야 한다. 문학은 사람을 베어 쓰러뜨리는 검술이 아니라, 사람의 상처 곁에 작은 등잔 하나 놓는 일이기 때문이다.
사무사思無邪.
사특함이 없는 마음. 작가에게 이것보다 앞서는 문장 기술은 많지 않다.
Ⅷ. 움직일 수 없는 침대 ㅡ한 사람에게 반드시 하나쯤 있어야 할 것
《오디세이》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것은 전쟁이 아니다. 올리브나무다. 오디세우스와 페넬로페의 침대는 살아 있는 올리브나무를 중심으로 만들어졌다.
옮길 수 없다. 바다는 움직였다. 배도 움직였다. 세월도 움직였다. 사람의 얼굴도 변했다. 그 집 한가운데 뿌리내린 나무 하나만은 움직이지 않았다. 이 장면이 《오디세이》 전체를 떠받치는 가장 깊은 은유인지도 모른다.
현대인은 너무 쉽게 움직인다. 직장도 바뀐다. 도시도 바뀐다. 관계도 바뀐다. 생각도 유행을 따라 바뀐다. 변화 자체가 잘못은 아니다. 문제는 너무 많은 것이 움직여서 무엇을 움직이지 않게 둘 것인지조차 잊어버렸다는 데 있다. 한 사람에게도 옮길 수 없는 침대 하나가 필요하다. 돈 때문에 바꾸지 않을 원칙. 유명해져도 버리지 않을 사람. 분노해도 넘어서는 안 될 선. 손해를 보더라도 지킬 약속. 아무도 보지 않아도 지킬 양심.
그것이 삶의 올리브나무다. 뿌리가 없는 사람은 자유로운 사람이 아니라 바람이 부는 대로 이동하는 사람일 수 있다. 진정한 자유는 어디든 갈 수 있는 능력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어디로 돌아와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에게 비로소 자유가 생긴다.
Ⅸ. 현대인을 위한 새로운 오디세이 ㅡ인생의 목표를 성공에서 귀환으로 바꾸어야 한다
우리는 성공을 삶의 정상으로 교육받아왔다. 더 높은 곳. 더 많은 것. 더 빠른 성취. 그런데 《오디세이》는 정반대 방향을 보여준다. 오디세우스의 위대함은 트로이를 정복한 데서 끝나지 않는다. 정복 이후에 집으로 돌아왔다는 데 있다. 현대인의 삶 역시 성공보다 귀환의 관점에서 다시 설계할 필요가 있다.
돈을 벌되 돈을 벌기 전의 사람을 잃지 않는 것. 지위를 얻되 사람을 내려다보는 눈을 갖지 않는 것. 지식을 쌓되 모르는 사람을 업신여기지 않는 것. 글을 쓰되 글 때문에 인간을 잃지 않는 것. 유명해지되 자기 이름의 그림자 안에 갇히지 않는 것. 늙어가되 젊은 사람에게 자리를 내줄 줄 아는 것. 상처받되 상처를 다른 사람에게 유산으로 물려주지 않는 것.
이것이 현대인의 귀환이다. 인생의 성공을 한 문장으로 다시 쓴다. 많이 가진 채 죽는 것이 아니라, 많이 지나온 뒤에도 사람다운 얼굴로 돌아오는 것.
Ⅹ. 맺음말 ㅡ그대의 돛대는 무엇이며 그대의 이타카는 어디인가
오디세우스에게는 세이렌이 있었다. 현대인에게는 끝없는 욕망이 있다. 오디세우스에게는 칼립소의 섬이 있었다. 현대인에게는 떠나기 싫은 성공의 자리가 있다. 오디세우스에게는 페넬로페의 베틀이 있었다. 현대인에게는 매일 되풀이해야 할 성실이 있다. 오디세우스에게는 이타카가 있었다. 현대인에게는 끝내 돌아가야 할 인간의 품격이 있어야 한다.
세상을 사는 일은 어쩌면 배 한 척을 운항하는 일과 닮았다. 바람을 선택할 수는 없다. 파도를 명령할 수도 없다. 세이렌에게 노래하지 말라고 할 수도 없다. 다만 키를 잡을 수 있다.
자신을 묶어둘 돛대를 세울 수 있다. 버려야 할 짐을 내려놓을 수 있다. 어디로 돌아갈 것인지를 마음 깊은 곳에 새길 수 있다. 삶에 필요한 것은 더 빠른 배가 아닐지도 모른다. 방향을 잃지 않는 작은 나침반 하나다.
작가에게 그 나침반은 문장 이전의 마음이며 지도자에게는 권력 이전의 양심이고 부모에게는 성적 이전의 사람됨이며 한 인간에게는 성공 이전의 품격이다. 트로이 목마가 세상을 통과하는 지혜라면 세이렌의 밧줄은 자신을 다스리는 절제이고 페넬로페의 베틀은 하루를 견디는 성실이며 올리브나무 침대는 끝내 버리지 말아야 할 삶의 뿌리다.
이 네 가지를 가진 사람은 세상이 아무리 거칠어도 완전히 난파하지 않는다. 이 시대의 가장 큰 비극은 길을 잃는 데 있지 않다. 내비게이션은 얼마든지 길을 찾아준다. 더 큰 비극은 돌아갈 곳 자체를 잃는 데 있다.
인간은 멀리 가기 위해 태어난 존재이면서 동시에 돌아오기 위해 사는 존재다. 청춘에는 세상으로 떠나는 용기가 필요하다. 중년에는 세이렌 앞에서 자신을 묶는 절제가 필요하다. 노년에는 무엇을 내려놓아야 하는지를 아는 지혜가 필요하다. 생의 마지막에는 한 가지면 충분하다. 수많은 바다를 지나왔어도 세상의 박수와 야유를 다 지나왔어도 마지막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자신의 올리브나무가 아직 그 자리에 서 있는 것.
그것이면 한 생의 항해는 결코 헛되지 않다. 인생의 위대함은 세상을 얼마나 많이 정복했느냐에 있지 않다. 세상 끝까지 갔다가도 인간이라는 본래의 자리로 돌아올 수 있느냐에 있다.
ㅡ청람
댓글
로그인 없이 바로 남길 수 있습니다. 나중에 본인이 수정·삭제하려면 이 댓글의 비밀번호를 정해 주세요. 서로 예의를 지켜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