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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집을 짓는 언어 ― 하이데거의 삶과 횔덜린 그리고 김춘수의 「꽃」 이 만나는 존재론적 문학 ㅡ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존재의 집을 짓는 언어 ― 하이데거의 삶과 횔덜린 그리고 김춘수의 「꽃」 이 만나는 존재론적 문학 2026.08.23
존재의 집을 짓는 언어 ― 하이데거의 삶과 횔덜린 그리고 김춘수의 「꽃」 이 만나는 존재론적 문학

존재의 집을 짓는 언어

― 하이데거의 삶과 횔덜린 그리고 김춘수의 「꽃」이 만나는 존재론적 문학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Ⅰ. 여는말

― 한 철학자의 질문은 어디에서 태어났는가

철학자의 책상에도 고향이 있다.

아무리 추상적인 사유라 해도 그 뿌리를 캐고 내려가면 어린 날 바라보던 산과 성당의 종소리와 부모의 얼굴과 젊은 날 품었던 신앙과 시대의 상처가 묻혀 있다.

마르틴 하이데거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가 평생 물었던 것은 거창하면서도 소박한 질문 하나였다.

존재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 질문은 어느 날 대학 강의실에서 갑자기 떨어진 것이 아니다.

1889년 독일 남부의 작은 마을 메스키르히에서 태어난 한 소년의 삶 속에서 아주 오래 숙성되었다.

메스키르히는 가톨릭 전통이 강한 농촌 지역이었다. 하이데거의 성장 배경에는 종교와 농촌의 생활세계가 깊게 자리했고 그는 처음에는 신학을 공부했다가 1911년 철학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이후 후설의 조교가 되었고 프라이부르크와 마르부르크에서 철학자로 성장했다. 1927년 발표한 《존재와 시간》은 그를 국제적으로 알려진 철학자로 만들었다.

이 삶의 궤적을 살펴보면 하이데거의 철학이 어디에서 태어났는지 조금씩 보인다.

성당에서 신을 찾던 젊은이는 철학으로 옮겨가 존재를 찾기 시작했다.

신학의 문을 나섰지만 근원을 찾으려는 열망까지 버린 것은 아니었다.

질문의 대상이 바뀌었다.

“신이 있느냐는 질문에서

있다는 것은 무엇이냐”

는 질문으로 깊어진 셈이다.

철학은 때때로 사람이 버린 것에서 시작된다.

하이데거에게 신학은 떠난 집이면서 동시에 평생 그림자를 드리운 오래된 고향이었다.

Ⅱ. 메스키르히

― 존재철학에도 흙냄새가 있었다

하이데거 철학은 난해하다.

“현존재

피투성

세계ㅡ내ㅡ존재

존재망각

알레테이아”

철학 용어만 따라가면 돌산을 오르는 기분이 든다.

그런데 그의 생애를 함께 읽으면 그 돌산 사이로 흙길 하나가 나타난다.

“메스키르히다.”

농촌의 작은 마을에서 자란 사람에게 나무는 추상적 개념이 아니다.

길도 그렇다.

들판도

우물도

숲도

종소리도 그렇다.

후기 하이데거의 글에 반복해서 등장하는

“대지

하늘

거주”

같은 말들이 단순한 철학적 장식어가 아니었던 까닭도 여기에 있다.

하이데거의 존재론에는 묘하게 농촌의 냄새가 남아 있다.

철학은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데 언어는 자꾸 땅으로 내려온다.

“집

다리

그릇

신발

오솔길”

그는 존재를 설명하기 위해 오히려 가장 오래된 생활의 사물들을 불러온다.

그것은 문학적으로도 대단히 중요한 태도다.

깊은 사상일수록 반드시 어려운 사물을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다.

작은 우물 하나에서도 인간의 생애가 열릴 수 있고

낡은 신발 한 켤레에서도 한 시대가 일어설 수 있다.

하이데거의 철학에는 이 역설이 있다.

가장 큰 질문을 가장 작은 사물 앞에서 다시 시작한다.

Ⅲ. 신학에서 철학으로

― 신을 향하던 질문이 존재를 향하다

하이데거는 처음부터 철학자가 되려고 한 사람은 아니었다.

젊은 시절 예수회에 잠시 몸담았으며 프라이부르크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이후 철학으로 전공을 바꾸었다. 아리스토텔레스와 중세 스콜라철학에서 시작된 존재에 대한 물음은 후설의 현상학과 만나면서 그의 독자적인 사유로 발전했다.

이 이동은 단순한 전공 변경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종교가 궁극적인 존재를 신에게서 찾는다면 하이데거는 한 걸음 물러나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무엇인가’

를 캐묻기 시작했다.

이 질문의 자세가 중요하다.

이미 주어진 답에서 출발하지 않는 것이다.

철학자는 답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질문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이다.

문학도 그러하다.

좋은 시는 반드시 정답을 가지고 태어나지 않는다.

어떤 시는 질문 하나를 제대로 품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어머니란 무엇인가

죽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사랑한 사람을 잊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꽃 한 송이가 내 앞에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문학에서 깊이는 답의 크기보다 질문의 깊이에서 생길 때가 많다.

하이데거의 삶은 바로 그 질문의 이동을 보여준다.

신에게서 존재로

교리에서 물음으로

확신에서 사유로 옮겨간 것이다.

Ⅳ. 후설의 제자에서 자기 철학으로

― 보는 것에서 존재하게 하는 것으로

하이데거의 철학적 성장에서 에드문트 후설을 빼놓을 수 없다.

하이데거는 후설의 조교를 지냈으며 현상학으로부터 결정적인 영향을 받았다. 이후 후설이 은퇴한 1928년 프라이부르크대학교의 후임 교수가 되었다. 《존재와 시간》 역시 후설에게 존경과 우정의 뜻으로 헌정되었다.

후설의 현상학에는 유명한 정신이 있다.

사물 자체로 돌아가려는 태도다.

이미 갖고 있는 편견과 이론으로 사물을 덮기 전에 나타나는 것 자체를 보려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여기서 더 나아갔다.

단순히

‘무엇이 나타나는가’

가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가’

를 물었다.

이 차이는 문학에서도 중요하다.

시인은 꽃을 본다.

첫 단계는 꽃의 색과 모양을 보는 일이다.

다음 단계는

꽃이 그 자리에 피어 있다는 사실이 내 세계에서 무엇을 열어놓는지를 보는 일이다.

바로 이곳에서 하이데거와 김춘수가 만날 준비가 시작된다.

Ⅴ. 《존재와 시간》

― 인간은 세상 한가운데 던져진 존재다

1927년 발표된 《존재와 시간》 은 하이데거의 이름을 20세기 철학의 중심으로 끌어올렸다. 이 책은 이후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와 가다머의 해석학, 데리다를 비롯한 여러 현대철학 흐름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하이데거는 인간을 현존재 Dasein라고 불렀다.

그 인간은 생각만 하는 머리가 아니다.

밥을 먹고

사람을 사랑하고

실패하고

일하고

늙으며

죽어가는 존재다.

더 중요한 것은 인간이 혼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미 세계 속에 있다.

언어가 있고

가족이 있으며

역사가 있고

몸이 있다.

하이데거는 이것을 세계ㅡ내ㅡ존재라고 했다.

인간이 세계를 구경하는 관광객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미 세계의 한가운데 들어가 살아가고 있다.

문학에서 한 인물을 제대로 그리려면 바로 이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

한 노인을 쓰면서 주름만 묘사해서는 부족하다.

그 주름 속에

전쟁이 있었는지

가난이 있었는지

자식을 기다린 밤이 있었는지

사랑했던 한 사람이 있었는지를 보아야 한다.

몸은 시간의 문서다.

사람 하나를 깊게 쓴다는 것은 그 사람 속에 들어 있는 세계 전체를 읽는 일이다.

Ⅵ. 피투성Geworfenheit

― 인생은 첫 문장을 스스로 쓰지 못한다

하이데거는 인간이 세계에 던져져 있다고 말한다.

“피투성 Geworfenheit이다.”

누구도 자기가 태어날 날짜를 고르지 못한다.

부모를 선택하지 못하고

나라를 선택하지 못하며

몸도

시대도

첫 언어도 선택하지 못한다.

인생이라는 책을 받아 들었을 때 이미 몇 페이지는 쓰여 있는 셈이다.

어떤 페이지에는 가난이 적혀 있고

어떤 페이지에는 전쟁이 있으며

어떤 페이지에는 병과 상실이 쓰여 있다.

사람은 그 다음 페이지부터 자기 몫의 문장을 써야 한다.

꽃도 피어날 자리를 선택하지 않는다.

씨앗이 돌틈에 떨어지면 돌틈이 삶의 자리다.

김춘수의 「꽃」 을 이 시각으로 읽으면 또 다른 의미가 나타난다.

꽃은 이미 그 자리에 있었다.

아무도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도 존재했다.

다만 그 존재가 아직 한 사람의 관계 속으로 들어오지 않았을 뿐이다.

하이데거의 피투성이 존재의 주어진 조건을 말한다면 김춘수의 꽃은 그 주어진 존재가 관계와 언어 속에서 새롭게 모습을 얻는 순간을 보여준다.

Ⅶ. 불안과 죽음

― 삶의 가장자리가 삶의 중심을 가르친다

하이데거는 불안을 단순한 심리적 증상으로 보지 않았다.

두려움에는 대상이 있다.

불은 불이 두렵고

질병은 질병이 두렵다.

불안에는 뚜렷한 대상이 없다.

어느 날 세상 전체가 낯설어진다.

늘 걷던 길이 낯설고

평생 살아온 집에서도 낯선 기운이 느껴진다.

그때 평소 당연하게 여기던 삶의 바닥이 흔들린다.

하이데거는 그 흔들림에서 인간이 자신의 존재와 대면할 가능성을 보았다.

죽음도 마찬가지다.

그는 인간을 죽음을 향한 존재로 설명했다.

죽음은 모든 사람에게 오지만 누구도 다른 사람의 죽음을 대신 죽어줄 수 없다.

죽음 앞에서 인간은 가장 고독하게 자기 자신의 존재가 된다.

이 사상에는 분명 삶의 가치철학이 들어 있다.

죽음을 기억한다는 것은 죽음에 사로잡혀 살라는 뜻이 아니다.

유한하기 때문에 오늘이 귀하다는 것

여기에 하이데거 실존철학의 중요한 힘이 있다.

끝이 없는 하루는 귀하지 않다.

헤어지지 않는 사람이라면 마지막 손길도 없다.

꽃이 지지 않는다면 봄도 지금처럼 절실하지 않을 것이다.

문학이 죽음을 오래 써온 까닭은 죽음을 사랑해서가 아니다.

죽음을 통하여 삶의 체온이 더욱 선명해지기 때문이다.

Ⅷ. 세인과 자기 삶

― 남들이 사는 삶에서 빠져나오기

하이데거는 세인 das Man이라는 독특한 표현을 사용했다.

쉽게 말하면

‘남들’

이다.

“남들이 다 그렇게 하니까

남들도 그렇게 생각하니까

원래 세상이 그런 것이니까”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익명의 판단 속으로 들어간다.

오늘의 언어로 말하면

“유행

평판

조회 수

집단취향

사회적 성공 기준”

같은 것들이다.

하이데거에게 실존의 중요한 과제는 이런 익명적 삶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의 가능성을 떠맡는 것이었다.

문학도 같은 문제를 가진다.

남들이 꽃을 사랑이라 쓴다고 꽃을 사랑이라고 쓰고

남들이 달을 그리움이라고 쓰니 달을 그리움이라고 쓴다면

시인은 자기 눈을 잃는다.

문학의 개성은 기발한 표현에서만 생기지 않는다.

남들이 보고 지나가는 곳에 혼자 멈춰서는 힘

거기에서 시작한다.

김춘수가 꽃 앞에 멈춰 선 것도 그러하다.

꽃을 단순히 아름다운 자연물로 지나치지 않았다.

그 꽃을 통해

“이름

존재

관계

욕망”

이라는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까지 밀고 들어갔다.

Ⅸ. 하이데거의 흑림

― 철학자는 왜 산속 오두막으로 갔는가

하이데거의 사유를 이야기할 때 독일 흑림 Schwarzwald의 풍경을 빼놓기 어렵다.

그는 토트나우베르크의 산속 오두막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에게 그곳은 단순한 휴양지가 아니었다.

세계의 소음에서 떨어져 사유가 자기 속도로 걸을 수 있는 장소였다.

후기 하이데거의 글에서

“숲길

빈터

고향

거주”

같은 이미지가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우연으로만 볼 수 없다.

숲에는 고속도로처럼 목적지가 크게 적혀 있지 않다.

길을 걸어야 한다.

때로 길이 끊기는 것처럼 보이고

돌아가야 할 때도 있다.

하이데거의 철학도 그러하다.

그에게 사유는 가장 빨리 결론에 도착하는 기술이 아니다.

머물 줄 아는 능력이다.

현대인은 속도를 지식으로 착각한다.

“빨리 찾고

빨리 읽고

빨리 판단한다.”

하이데거의 후기 사유는 그 반대편에서 말을 건다.

“사물 앞에 오래 머물 것

바로 결론 내리지 말 것

존재가 자기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 기다릴 것”

이것은 철학의 자세이면서 동시에 시인의 자세다.

Ⅹ. 1933년

― 위대한 철학에도 치명적인 그림자가 있다

하이데거의 생애에서 반드시 짚어야 할 어두운 장면이 있다.

1933년 그는 나치당에 가입하고 프라이부르크대학교 총장이 되었다. 총장 재임은 이듬해 끝났지만 나치당에서는 탈퇴하지 않았고 당시 그의 일부 연설에는 나치즘의 언어와 그의 철학적 표현이 뒤섞여 있었다. 전후에는 비나치화 절차를 거쳐 한동안 대학 강의가 금지되었다. 더구나 후기 저술에서도 국가사회주의와 자신의 관계에 대한 충분하고 명백한 자기비판을 찾기 어렵다는 점은 오늘날까지 하이데거 연구에서 중대한 논쟁거리다.

이 사실은 덮어서는 안 된다.

철학자의 사상과 철학자의 삶이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존재의 진정성을 말한 사람이 시대의 가장 위험한 집단정치 앞에서 중대한 오판을 했다.

세인의 익명성을 비판했던 철학자가 거대한 정치적 광기의 한복판에 들어갔다.

여기에 하이데거의 생애가 남긴 거대한 역설이 있다.

깊이 사유한다고 반드시 바르게 행동하는 것은 아니다.

이 한 문장은 문학인에게도 무겁다.

훌륭한 글을 쓴다는 것과 훌륭한 사람이라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니다.

인간의 존엄을 노래하면서 가까운 사람을 모욕할 수도 있고

자유를 쓰면서 다른 사람의 자유를 외면할 수도 있다.

문학의 수준이 인간의 수준을 자동으로 보증하지 않는다.

하이데거의 생애는 이 불편한 사실을 증언한다.

문학과 철학에는 사유의 깊이만큼 삶의 윤리가 필요하다.

그의 철학을 높이 평가하는 일과 그의 정치적 과오를 비판하는 일은 동시에 가능해야 한다.

그 둘 가운데 하나를 없애버리는 순간 비평은 비평이 아니라 숭배나 단죄가 되고 만다.

Ⅺ. 삶의 실패 뒤에 찾아온 사유의 전회

― 지배에서 거주로

《존재와 시간》 이후 하이데거의 사유에는 이른바 전회 Kehre라고 불리는 변화가 나타난다.

초기의 질문이

“인간이 존재를 어떻게 이해하는가”

에 가까웠다면

후기에는

“존재가 어떻게 인간에게 드러나는가”

라는 방향이 더욱 중요해진다. 이 변화의 정확한 시기와 의미를 두고 연구자들 사이에 논쟁이 있지만 1930년대부터 변화가 진행되어 1940년대에 뚜렷해졌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후 그의 언어에는

“지배보다 기다림

정복보다 거주

의지보다 내맡김”

이 더욱 강해진다.

특히 후기의 ‘거주’ 개념은 민족국가보다 인간의 유한한 삶과 지역적 삶의 자리 쪽으로 옮겨간다는 해석도 제시된다.

이 변화는 문학적으로도 중요하다.

젊은 하이데거가 존재를 향해 달려간 철학자였다면 후기 하이데거는 존재 앞에서 조금씩 걸음을 늦춘 철학자처럼 보인다.

사물에게 말하라고 재촉하지 않는다.

기다린다.

이 기다림의 사유가 횔덜린과 만난다.

Ⅻ. 횔덜린

― 시인은 세계를 소유하지 않고 거주한다

후기 하이데거에게 프리드리히 횔덜린은 특별한 시인이었다.

횔덜린의 시에 등장하는

“강

고향

하늘

대지”

는 단순한 풍경이 아니다.

인간이 세계 안에서 어떤 존재로 살아야 하는지 보여주는 자리다.

하이데거가 횔덜린을 통해 깊이 사유한 말 가운데 하나가

“시적으로 거주한다”

는 명제다.

여기에서 ‘시적으로’란 꽃과 달을 사랑하며 낭만적으로 살라는 뜻이 아니다.

나무를 목재로만 보지 않고

강을 전력으로만 보지 않으며

사람을 노동력이나 숫자로만 보지 않는 것이다.

사물이 사물로 머물 수 있게 하는 것

인간이 세계의 주인처럼 군림하기보다 세계의 한 존재로 머무는 것이다.

하이데거 생애와 연결하면 이 말에는 더욱 무거운 울림이 생긴다.

한때 거대한 정치적 의지와 역사의 운동에 자신을 결부시켰던 철학자가 후기에 이르러

“거주

보존

기다림”

을 이야기했다.

그 변화를 면죄부로 삼을 수는 없다.

그럼에도 그의 후기 철학에서 지배의 철학보다 머무름의 철학이 커져간 것은 주목할 만하다.

횔덜린은 그 변화의 중심에 있었다.

XIII.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 하이데거가 마지막까지 돌아온 곳

후기 하이데거의 유명한 명제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라는 말이다.

이때 언어는 정보를 운반하는 트럭이 아니다.

존재가 모습을 드러내는 집이다.

생각해보면 인간은 이름 없는 세계에서 살지 않는다.

“산

고향

어머니

사랑

죽음”

모두 언어를 통해 우리 안에 자리를 얻는다.

언어가 달라지면 세계의 모습도 달라진다.

길가에 앉은 사람을

노숙자라고 부를 때와

한 사람이라고 부를 때와

그의 이름을 부를 때

우리 앞에 나타나는 세계는 같지 않다.

이에 김춘수의 「꽃」 이 하이데거의 언어론 곁으로 걸어온다.

ⅩⅣ. 김춘수의 「꽃」

― 이름 하나가 존재의 문을 연다

김춘수의 「꽃」 은 한국 현대시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 가운데 하나지만 너무 익숙하게 읽어서는 그 깊이가 쉽게 닳아버린다.

흔히 사랑시로만 읽는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이 시의 심층에는

언어와 존재의 관계

가 놓여 있다.

꽃은 이름을 부르기 전에도 존재한다.

그런데 한 존재가 다른 존재를 불러주는 순간 관계가 생긴다.

익명이 고유성으로 바뀐다.

수많은 존재 가운데

‘그것’이

‘너’가 된다.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존재를 새로 만드는 일이 아니다.

그 존재가 내 세계 안에서 의미 있게 나타날 자리를 마련하는 일이다.

이에서 김춘수의 꽃은 하이데거의 언어철학과 묘하게 조응한다.

언어가 존재의 집이라면

이름은 그 집의 문패가 아니다.

문을 여는 손잡이에 가깝다.

이름이 불리는 순간 존재와 존재 사이에 통로가 생긴다.

ⅩⅤ. 횔덜린의 강과 김춘수의 꽃

― 거주와 부름의 시학

횔덜린에게 강은 인간이 머무는 세계를 연다.

강은 흘러가면서 고향을 기억하게 하고

시간의 흐름과 인간의 유한성을 함께 드러낸다.

김춘수에게 꽃은 관계를 연다.

한 송이 꽃에서

“이름

부름

존재

그리움”

이 열린다.

횔덜린이

“인간은 세계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를 묻는다면

김춘수는

“한 존재는 어떻게 다른 존재의 세계에 들어가는가”

를 보여준다.

횔덜린은 거주의 시인이고

김춘수는 부름의 시인이라 할 수 있다.

그 두 사람의 사이에 하이데거가 서 있다.

그는 횔덜린에게서 세계에 머무는 법을 읽었고

김춘수의 「꽃」을 통해서는 직접 말하지 않았지만 그의 언어철학을 적용하여 존재가 이름 속에서 관계의 세계로 들어가는 방식을 새롭게 읽어낼 수 있다.

셋이 만나는 지점은 하나다.

존재를 함부로 소비하지 않는 것이다.

ⅩⅥ. 하이데거의 기술문명 비판

― 산을 산으로 두지 못하는 시대

후기 하이데거는 현대 기술문명에 대해서도 깊이 사유했다.

그가 비판한 것은 기계 그 자체가 아니었다.

세상의 모든 존재를 사용 가능한 자원으로만 바라보게 되는 태도였다.

강은 발전량이 되고

숲은 목재량이 되며

땅은 개발면적이 된다.

더 무서운 것은 사람마저 같은 방식으로 보게 되는 일이다.

“인적 자원

노동력

생산성

소비계층”

인간이 숫자로 바뀐다.

이것은 오늘날 더욱 절실한 문제다.

AI 시대가 인간에게 주는 가장 위험한 유혹 가운데 하나도

빠른 것과 깊은 것을 혼동하는 데 있다.

정보가 많다고 사유가 깊은 것은 아니다.

언어를 많이 생산한다고 문학이 태어나는 것도 아니다.

하이데거가 오늘의 문학인에게 건넬 수 있는 질문은 이것이다.

“당신은 사물을 보고 있는가

사물의 용도만 보고 있는가”

시인은 나무의 시장가격을 모른다고 해서 무지한 사람이 아니다.

나무가 한 장소에서 수십 년 바람을 견딘 시간을 읽을 수 있다면 또 다른 앎을 가진 사람이다.

문학은 세상이 가격표를 붙인 사물에서 가격표를 잠시 떼어내는 일이다.

ⅩⅦ. 하이데거의 삶에서 읽는 가치철학

― 인간은 무엇으로 자기 삶을 증명하는가

하이데거의 철학과 생애를 함께 놓고 읽으면 몇 가지 삶의 가치가 드러난다.

첫째는 질문의 가치다.

그는 존재라는 하나의 질문을 평생 놓지 않았다.

사람의 삶에는 평생 품어도 다 풀리지 않는 질문 하나가 필요할지 모른다.

둘째는 유한성의 가치다.

죽음을 바라보는 것은 절망이 아니라 지금을 함부로 낭비하지 않도록 하는 일이다.

셋째는 자기 삶의 가치다.

세인의 삶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의 기준이 아니라 자기 가능성을 살아야 한다.

넷째는 머무름의 가치다.

무엇이든 소유하고 정복하려는 삶이 아니라 사람과 사물이 자기 모습으로 존재할 공간을 남겨주는 것이다.

다섯째는 언어의 가치다.

말은 단순한 소리가 아니다.

말 한마디가 한 사람을 살릴 수도 있고 존재를 지워버릴 수도 있다.

여기에 반드시 하나를 더 붙여야 한다.

성찰의 가치다.

하이데거 자신의 생애가 그것을 역설적으로 증명한다.

철학이 아무리 깊어도 삶의 선택이 잘못될 수 있다.

사유는 스스로를 끊임없이 검증하지 않으면 위험해질 수 있다.

문학인도 자기 문장을 사랑하기 전에 자기 삶이 그 문장을 배반하고 있지 않은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좋은 글보다 먼저 요구되는 것이 좋은 삶이라고 단순화할 수는 없다.

다만 글과 삶 사이의 거리를 경계하지 않는 작가는 언젠가 자기 문장에 의해 심문받게 된다.

ⅩⅧ. 문학은 존재에게 이름을 돌려주는 일이다

현대사회는 사람을 쉽게 숫자로 만든다.

“나이

연봉

점수

직급

조회 수

재산”

숫자가 사람보다 앞선다.

문학은 이 질서에 작은 저항을 한다.

통계 속 ‘노인 한 명’ 에게 이름을 돌려준다.

뉴스 속 ‘사망자 한 명’에게 가족을 돌려준다.

역사책의 ‘피난민’에게 좋아했던 노래와 첫사랑과 고향의 냄새를 돌려준다.

김춘수의 꽃이 이름을 통해 관계 속으로 들어오듯

문학은 세상이 익명으로 밀어낸 사람을 다시 불러 세운다.

하이데거적으로 말하면

문학은 존재에게 거처를 내어주는 일이다.

횔덜린적으로 말하면

세상에서 시적으로 거주할 자리를 지키는 일이다.

김춘수적으로 말하면

한 존재의 이름을 함부로 지나치지 않는 일이다.

ⅩⅨ. 오늘의 시인에게 보내는 하이데거의 질문

하이데거 철학을 오늘의 창작론으로 바꾸면 몇 가지 질문이 남는다.

“꽃을 쓰기 전에 정말 꽃을 보았는가

사람을 쓰기 전에 그 사람이 살아온 세계를 보았는가

죽음을 쓰기 전에 삶의 유한성을 견뎌보았는가

고향을 쓰기 전에 그곳의 냄새와 소리를 기억하는가

사랑을 쓰기 전에 상대를 자기 감정의 도구로 만들고 있지는 않은가

언어를 쓰기 전에 그 말이 너무 오래 닳아버린 말은 아닌가”

좋은 시인은 답을 많이 가진 사람이 아닐 수 있다.

사물 앞에서 오래 질문할 줄 아는 사람일 수 있다.

“꽃 한 송이 앞에서 금방 사랑이라고 쓰지 않는 것

비가 내린다고 곧바로 눈물이라고 쓰지 않는 것

달을 보자마자 그리움이라고 부르지 않는 것”

그 익숙한 의미를 잠시 걷어내는 데서 새로운 시가 시작된다.

ⅩⅩ. 맺음말

― 한 철학자의 오두막에서 한 송이 꽃까지

하이데거는 평생 존재를 물었다.

메스키르히의 가톨릭적 환경에서 성장하여 신학을 공부했고

철학으로 방향을 돌렸으며

후설에게서 현상학을 배웠다.

《존재와 시간》 으로 20세기 철학의 중심에 섰고

1933년에는 나치즘과 결부되는 치명적인 정치적 과오를 범했다.

전후에는 다시 언어와 예술과 기술과 거주의 문제를 깊이 파고들었다. 그의 생애는 위대한 사유와 인간적 오류가 한 사람 안에서 동시에 존재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의 삶을 아름답게만 포장해서는 안 된다.

빛이 크다고 그림자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림자가 있다고 빛 자체를 보지 않을 이유도 없다.

비평은 두 가지를 함께 바라보는 일이다.

하이데거가 남긴 가장 귀한 유산 가운데 하나는 인간에게 다시 머무는 법을 생각하게 했다는 데 있다.

“빠르게 지나가지 않는 것

함부로 이름 붙이지 않는 것

사물을 당장 쓸모로 환산하지 않는 것

죽음을 외면하지 않는 것

자기 삶을 남들의 삶에 맡기지 않는 것

언어를 함부로 쓰지 않는 것”

그 모든 것이 하나의 가치철학으로 모인다.

“존재 앞에 머물 줄 아는 삶”

횔덜린은 그 삶을 시적 거주라고 보여주었다.

김춘수는 한 송이 꽃 앞에서 이름을 부르는 행위로 그것을 우리 가까이에 가져왔다.

횔덜린의 강가에는 인간이 머물 집이 있다.

김춘수의 꽃 앞에는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문이 있다.

하이데거는 그 집과 문 사이에서 언어의 의미를 오래 생각했다.

그렇다면 시인이 하는 일은 무엇인가.

세상에 없는 꽃을 만들어내는 일이 아닐 것이다.

이미 피어 있으나 아무도 바라보지 않는 꽃 앞에 멈춰 서는 일일 것이다.

그 꽃을 꺾어 자기 시의 장식으로 삼기 전에

꽃에게 꽃의 시간을 돌려주는 일일 것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한 사람을 소재로 만들기 전에

그가 살아온 세월 앞에 의자 하나를 내어놓는 것

그가 자기 목소리로 자기 존재를 드러낼 때까지 기다려주는 것”

문학의 품격은 바로 그 기다림에서 생긴다.

하이데거의 철학은 완전한 인간의 철학이 아니다.

그 자신부터 완전하지 않았다.

그 점이 역설적으로 더 큰 질문을 남긴다.

“깊이 생각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제대로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아름다운 문장을 쓴다는 것은 아름답게 사는 일과 얼마나 가까워야 하는가”

이 질문 앞에서 철학과 문학은 다시 만난다.

횔덜린은 강을 흐르게 하고

김춘수는 꽃 한 송이를 피워놓는다.

하이데거는 흑림의 오두막에서 오래 그 존재의 소리를 듣는다.

그 사이에 사람이 있다.

“한 번 태어나

사랑하고

잘못을 범하고

후회하며

늙어

마침내 사라지는 사람”

문학이 끝내 놓쳐서는 안 될 것도 그 사람이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 했다.

그렇다면 좋은 문학은 거창한 궁전이 아니다.

비를 맞고 온 한 사람이 들어와

젖은 신발을 벗어놓을 수 있는 작은 처마면 충분하다.

횔덜린의 강도

김춘수의 꽃도

하이데거의 숲길도

그 처마 아래에서 만난다.

존재를 함부로 지나치지 말 것

어쩌면 그것이

하이데거의 삶과 철학과 문학을 통과하고 남는 가장 오래된 한 문장일 것이다.

ㅡ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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