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본령에 대하여 ― 청람 김왕식
문학의 본령에 대하여 2026.08.25
― 청람 김왕식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문학의 본령에 대하여 ― 잘 쓰는 문장보다 먼저, 사람을 향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문학은 종이 위에 세운 집이 아니다. 사람의 가슴속에 잠시 머물다 가는 체온이다. 문장이 아무리 빼어나도 그 안에 사람의 냄새가 없으면 오래 남기 어렵다. 반대로 다소 투박한 문장이라도 삶을 오래 견딘 사람의 숨결이 배어 있으면 이상하게 독자의 마음을 잡는다. 문학에는 기술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체온이 있다. 문학의 본령을 말할 때 가장 먼저 돌아보아야 할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문학은 무엇을 얼마나 화려하게 썼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무엇을 바라보았으며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았는가의 문제다.
공자는 《시경》 삼백여 편을 한마디로 묶어 “사무사思無邪”라 했다. 생각에 사특함이 없다는 뜻이다. 이것은 단순히 착한 글을 쓰라는 도덕 교훈이 아니다. 사물을 보고 사람을 대하는 마음의 바탕이 흐리지 않아야 한다는 뜻에 가깝다. 좋은 문장은 손끝에서 나오기 전에 마음에서 먼저 숙성된다.
글을 잘 쓰는 재주가 뛰어나도 타인을 깎아내리기 위해 문장을 사용한다면 그것은 언어의 승리가 아니라 언어의 오용이다. 지식이 많아도 그것을 사람 위에 올라서는 사다리로 사용한다면 문학은 그 순간부터 권력이 된다.
문학은 칼보다 깊이 들어갈 수 있다. 칼은 상처 난 자리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지만, 말이 남긴 상처는 어디서 피가 나는지조차 알기 어렵다. 그런 까닭에 글을 쓰는 사람에게는 재능보다 먼저 절제가 필요하다.
문학의 첫 번째 본령은 사람을 함부로 재단하지 않은 데 있다. 누군가의 한 문장을 읽고 그 사람의 전 생애를 판단하지 않는 것, 한 편의 시를 읽고 시인의 인격까지 단정하지 않는 것, 자신의 미학적 기준을 세상의 유일한 자로 만들지 않는 것이 문학인의 기본적인 품격이다. 사람에게는 저마다 보이지 않는 문장이 있다. 가난이라는 문장, 상처라는 문장, 실패라는 문장, 기다림이라는 문장, 말하지 못한 가족사라는 문장까지 한 사람의 생애는 수많은 퇴고로 이루어진 한 권의 책과 같다. 그 책을 몇 줄 읽고 결론부터 써버리는 일은 비평이 아니라 오독일 수 있다.
문학의 두 번째 본령은 사물을 새롭게 보는 데 있다. 꽃을 보고 아름답다고 쓰는 순간 시는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낙엽을 보고 쓸쓸하다고 말하는 것 역시 수천 년 동안 반복되어 온 감상의 문턱에 머문다. 문학은 익숙한 사물을 한 뼘 비틀어 보는 데서 태어난다. 빗방울에서 하늘의 낙서를 보고, 빈 의자에서 한 사람의 부재를 보고, 오래된 밥그릇에서 가족의 역사를 읽어내는 눈. 그것이 문학의 눈이다. 작가는 세상에 없는 것을 발명하는 사람이 아니라, 모두가 보고도 지나친 것을 처음 본 사람처럼 다시 보여주는 사람이다. 신의新意는 그래서 새 단어를 만드는 기술이 아니다. 오래된 세계를 새롭게 바라보는 마음의 각도다.
문학의 세 번째 본령은 진실이다. 여기서 말하는 진실은 사실의 나열과 다르다. 신문의 진실이 사건의 정확성을 요구한다면 문학의 진실은 인간 마음의 정확성을 요구한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날짜를 정확하게 기록했다고 해서 좋은 문학이 되는 것은 아니다. 어머니가 떠난 뒤 밥상 한쪽에 놓인 빈 수저 하나가 어떻게 한 사람의 저녁을 무너뜨렸는지를 보여줄 때 문학적 진실이 발생한다. 문학은 사실을 넘어 정서의 사실에 닿아야 한다. 그리하여 좋은 작품을 읽으면 독자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이것은 저 사람의 이야기인데 어째서 내 이야기처럼 아픈가.’ 문학의 위대한 힘은 타인의 생을 자신의 가슴으로 옮겨놓는 데 있다. 이에 문학은 공감이 된다.
문학의 네 번째 본령은 낮아짐이다. 잘 쓴 글일수록 자신을 앞세우지 않는다. 작가가 문장 앞에서 자꾸 얼굴을 내밀면 작품 속 인물과 사물이 숨을 쉬기 어렵다. 물은 낮은 곳으로 흐른다. 문학도 낮은 곳으로 흘러야 한다. 소외된 사람, 실패한 사람, 말하지 못하는 사람, 아무도 이름을 불러주지 않는 사람의 자리로 내려갈 때 문학은 비로소 큰 강이 된다. 높은 곳에서 세상을 설명하는 글보다 낮은 곳에서 함께 비를 맞는 문장이 더 오래 살아남는다. 문학은 훈계가 아니라 동행이기 때문이다.
문학의 다섯 번째 본령은 여백이다. 모든 것을 설명한 글은 독자가 들어갈 자리가 없다. 시인이 울음의 이유를 끝까지 설명하면 독자는 그 울음의 구경꾼이 된다. 한두 군데 비워두면 독자는 자신의 기억을 들고 그 자리로 들어간다. 좋은 문학은 독자에게 해답을 주기보다 빈 의자를 하나 내어준다. 그 의자에 각자의 삶을 앉히게 한다. 말하지 않은 문장이 말한 문장보다 오래 남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불립문자不立文字라는 말 역시 문자를 버리라는 뜻으로만 읽을 필요는 없다. 문자 너머에 있는 것을 보라는 요청으로 읽을 수 있다. 문학도 그러하다. 문장은 문장을 넘어야 한다.
문학의 여섯 번째 본령은 책임이다. 작가는 자유롭게 쓸 수 있다. 동시에 자신이 쓴 문장이 누군가의 삶에 닿는 순간 책임도 함께 생긴다. 표현의 자유는 타인을 함부로 상처 입힐 자유와 동일하지 않다. 풍자와 조롱은 다르고, 비판과 모욕은 다르며, 해학과 비하는 다르다. 좋은 작가는 그 미세한 경계를 안다. 문장은 총알처럼 한번 발사되면 돌아오지 않는다. 그렇기에 글을 세상에 내놓기 전 한 번쯤 물어야 한다. 이 문장이 사람을 살리는가. 이 문장이 불필요하게 누군가를 베고 있지는 않은가. 이 문장 속에 분노를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한 흔적은 없는가. 문학은 인간을 향해야 한다. 인간을 외면한 문학은 아무리 화려해도 장식에 머물기 쉽다.
문학의 마지막 본령은 결국 사랑에 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감상적인 미사여구가 아니다. 사람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태도다. 악한 사람 속에서도 그의 상처를 살펴보는 눈, 실패한 사람에게도 다시 일어설 한 칸의 공간을 남겨두는 마음, 미운 사람을 그저 미운 사람 하나로 끝내지 않는 깊이가 문학적 사랑이다. 대자대비大慈大悲도 타인의 아픔을 자신의 일처럼 바라보는 마음이며, 성경의 사랑 역시 가장 작은 자에게 다가가는 데서 시작된다. 좋은 문학은 사상과 종교의 경계를 넘어 결국 한 지점에서 만난다. 사람이다. 문학은 사람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 시도 사람에게서 오고, 소설도 사람에게서 오며, 수필과 평론 역시 사람의 삶을 통과한다. 그렇기에 문학인은 세상의 어느 누구보다 먼저 사람 공부를 해야 한다.
책을 많이 읽는 것보다 사람을 오래 바라볼 줄 알아야 하고, 말을 많이 하는 것보다 침묵 속의 표정을 읽을 줄 알아야 하며, 타인의 작품을 평가하기 전에 자신의 마음부터 퇴고할 줄 알아야 한다. 절차탁마切磋琢磨는 문장에만 필요한 일이 아니다. 사람도 끊임없이 자신을 깎고 다듬어야 한다. 글보다 사람이 먼저 익어야 한다. 사람이 익지 않은 채 문장만 능숙해지면 언어는 때때로 교만의 도구가 된다. 사람이 깊어지면 짧은 한 문장에도 삶의 그늘과 햇살이 함께 들어간다. 문학의 길은 자기 마음을 오래 닦는 길과 다르지 않다.
천 편의 시를 쓴 사람보다 한 사람의 눈물을 제대로 이해한 사람이 더 시인다운 순간이 있다. 수백 편의 비평을 쓴 사람보다 한 편의 작품 앞에서 함부로 말하지 않는 사람이 더 깊은 평론가일 수 있다. 문학의 크기는 원고지의 양으로 측정되지 않는다. 한 문장이 사람의 마음에 얼마나 오래 머무는가로 측정된다.
좋은 문학은 독자를 감탄시키고 떠나지 않는다. 독자가 책을 덮은 뒤 자신의 삶을 한번 돌아보게 한다. 미워하던 사람을 조금 다르게 보게 하고, 당연하다고 여겼던 하루를 다시 만져보게 하고, 오래 연락하지 못했던 사람에게 안부 한마디 건네게 한다. 그때 문학은 작품을 넘어 삶이 된다.
문학의 본령은 멀리 있지 않다.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지 않는 것. 익숙한 세계를 새롭게 바라보는 것. 자신의 문장을 의심할 줄 아는 것. 말보다 침묵을 존중하는 것. 상처 입은 존재에게 의자 하나 내어주는 것. 그리고 끝끝내 사람을 포기하지 않는 것. 문학은 글을 잘 쓰는 사람의 소유물이 아니다.
세상을 오래 바라보고 사람의 아픔 앞에서 잠시 말을 낮출 줄 아는 사람에게 문학은 비로소 자신의 문을 연다. 좋은 문장은 손끝에서 태어나지만 위대한 문학은 사람을 대하는 마음에서 태어난다. 그것이 문학이 오래 살아남아야 할 까닭이며 문학인이 끝내 돌아가야 할 본령이다.
ㅡ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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