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신발 ㅡ청람 김왕식
바람의 신발 2026.08.25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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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신발
김왕식
무서리 지나간 감나무 우듬지 붉은 등 하나 남아 있었다
손 닿지 않는 높이는 때로 자비라는 이름을 얻는다
까치가 와 저녁 한쪽을 파먹고 갔다
배부른 부리는 남은 것을 하늘의 몫으로 두었다
사람들은 아름다운 이야기를 먼저 지었다
감나무는 가지 끝을 조금 흔들 뿐이었다
해가 기울 무렵 바람이 왔다
산등성이의 먼지를 털고 논둑의 마른 숨을 뒤집고 골목마다 낡은 냄새를 밀어내느라
하루 종일 발바닥 하나 없이 돌아다닌 몸
속 빈 감에 한 발을 넣었다
붉은 신발이 되었다
바람은 한참을 서 있었다
세상에서 처음 자기 몫을 받은 사람처럼
감나무 쪽으로 한 번 까치가 간 쪽으로 한 번 사람 사는 쪽으로 한 번 몸을 낮췄다
아무도 그 인사를 받을 자격이 없었다
밤새 감의 속살은 더 말라갔고
아침이면 누군가는 또 그 장면에 이름을 붙일 것이다
배려 나눔 은혜
바람은 그 말을 모른 채 신발 한 짝 벗어두고
다시 맨발로 세상을 밀러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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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것이 미담이 되는 사회 ― 「바람의 신발」이 비추는 왜곡된 선의의 풍경
문학평론가 김기량
우듬지 끝에 남은 감 하나가 있다.
사람은 그것을 까치를 위해 남겼다고 말한다. 실상은 너무 높아 따지 못했을 뿐이다.
까치는 배가 부를 때까지 먹고 자리를 뜬다. 남은 감은 바람의 몫이 되었다고 해석된다.
실상은 더 먹지 못했을 뿐이다.
이 짧은 장면 속에 오늘의 현실이 묘하게 겹친다. 못한 일이 배려로 바뀌고, 남은 것이 나눔으로 둔갑하며, 우연한 결과가 애초부터 계획된 선의처럼 포장된다. 현실보다 해석이 먼저 달리고, 사실보다 미담이 더 빨리 완성되는 세상이다.
「바람의 신발」의 날카로움은 바로 여기에 있다.
이 시에는 악인이 없다. 거짓말을 작정한 사람도 없고, 누군가를 속이려는 까치도 없다. 그럼에도 진실은 조금씩 비틀린다. 사람들은 사실 그 자체보다 듣기 좋은 이야기를 더 사랑하기 때문이다.
손이 닿지 않아 남은 감은 ‘배려’가 되고, 배가 불러 남긴 감은 ‘양보’가 된다.
현실은 그렇게 스스로 미화된다.
더 흥미로운 것은 정작 가장 많이 일한 바람이다.
바람은 하루 종일 산을 넘고 들을 지나고 골목의 먼지를 밀어낸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노동을 한다. 그 바람이 우연히 까치가 파먹은 감에 발을 넣고는 신발을 얻었다며 감사한다.
바람만 모른다.
그 신발이 누구의 배려도 아니었다는 것을.
여기서 바람은 우리 사회의 수많은 이름 없는 사람들을 닮는다.
묵묵히 일하는 사람, 제 몫을 제대로 받지 못하면서도 작은 혜택 하나에 감사하는 사람, 누군가의 잉여와 실수와 우연이 자신에게 흘러왔을 때 그것을 은혜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주어진 것이 애초부터 정당한 몫이었는지, 누군가의 선의였는지, 단순히 남은 것인지조차 따져볼 겨를이 없다.
고맙다는 말을 먼저 배웠기 때문이다.
이 시가 불편한 이유는 현실의 익숙한 장면을 너무 정확히 닮았기 때문이다.
권력은 못한 일을 절제로 말하고, 가진 자는 남은 것을 나눔이라 부르며, 조직은 우연한 성과를 치밀한 계획이었다고 설명한다.
기업도, 정치도, 문단도, 사회도 때때로 이런 식으로 자기 서사를 만든다. 본래의 이유는 사라지고, 보기 좋은 명분만 살아남는다.
그 과정에서 가장 먼저 희생되는 것은 사실이다. 사실은 대개 감나무처럼 말이 없다. 자신이 왜 감 하나를 남겼는지 굳이 설명하지 않는다. 까치 역시 자신이 왜 절반만 먹었는지 해명하지 않는다.
이야기를 만드는 쪽은 사람이 된다. 사람은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의미를 붙인다.
이것이 이 시가 보여주는 가장 무서운 지점이다. 현실은 반드시 거대한 거짓말 때문에 왜곡되는 것이 아니다. 작은 미화 하나, 편리한 해석 하나, 듣기 좋은 설명 하나가 쌓이면서 진실은 조금씩 다른 얼굴을 갖게 된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 처음의 사실은 사라지고, 미담만 남는다. 우듬지의 감 하나가 어느새 인간의 자비가 되고, 까치의 포식은 나눔이 되며, 바람은 뜻밖의 은혜를 입은 수혜자가 된다.
이런 구조는 오늘의 사회에서 낯설지 않다. 실패한 정책이 ‘불가피한 선택’으로 바뀌고, 준비하지 못한 일이 ‘신중한 결정’이 되며, 남아서 처리하지 못한 몫이 ‘사회 환원’이라는 이름을 얻는다.
언어가 현실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세탁하는 순간이다. 문학은 바로 그 세탁된 언어를 다시 물에 담가보는 일이다. 얼룩이 지워진 줄 알았던 자리에서 본래의 색을 찾아내는 일이다.
「바람의 신발」은 그 일을 거창한 선언 없이 감 하나와 까치와 바람으로 해낸다. 특히 바람의 감사는 이 시의 가장 슬픈 풍자다. 가장 고생한 존재가 가장 많이 고마워한다. 가장 적게 받은 존재가 가장 크게 감사한다. 가장 많이 가진 쪽은 자신이 베풀었다고 기억하고, 가장 조금 받은 쪽은 자신이 은혜를 입었다고 생각한다.
이 역설은 웃기지만 오래 웃을 수 없다. 익살 뒤에 서늘한 현실이 서 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여기서 누구를 직접 비난하지 않는다. 그 대신 감 하나를 우듬지에 남겨둔다. 그리고 묻지 않는 방식으로 묻는다. 우리가 선의라고 부르는 것들 가운데 얼마나 많은 것이 실제 선의였는가. 우리가 나눔이라고 말하는 것들 가운데 얼마나 많은 것이 그저 남은 것이었는가. 우리가 감사해야 한다고 배운 것들 가운데 얼마나 많은 것이 본래 우리의 몫이었는가.
좋은 풍자는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다. 대상을 직접 겨누는 대신 독자의 양심 한쪽에 작은 가시를 심는다. 「바람의 신발」이 그렇다. 읽고 나면 까치보다 사람을 보게 되고, 감보다 사회를 보게 되며, 끝내 바람의 맨발을 보게 된다.
아마 이 시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는 감도 까치도 아니다.
바람이다.
누구보다 많이 움직이면서도 자기 몫을 요구하지 않는 존재. 우연히 얻은 신발 한 짝에도 고개를 숙이는 존재. 그 바람의 순진한 감사 앞에서 오히려 인간의 언어가 부끄러워진다.
세상은 아직도 수많은 ‘바람’의 노동 위에 서 있다.
그들에게 돌아가야 할 몫을 은혜라고 부르지 않는 것. 남은 것을 나눔이라 포장하지 않는 것. 못한 일을 선행이라 칭찬하지 않는 것. 그것이 문학이 현실 앞에서 지켜야 할 최소한의 정직일 것이다.
「바람의 신발」은 한 편의 생태시처럼 시작해 한 편의 사회풍자로 끝난다.
우듬지 끝 감 하나가 우리 사회의 언어를 시험하고, 까치의 부리가 인간의 명분을 벗겨내며, 맨발의 바람이 가장 마지막에 진실을 드러낸다.
그 진실은 간단하다. 누군가의 남은 것을 누군가의 선의라고 부르는 순간 현실은 이미 한 번 왜곡된다.
그리고 가장 많이 일한 바람은 오늘도 그 사실을 모른 채 고맙다고 말하며 맨발로 다음 계절을 향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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