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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가 빛을 얻을 때, 시는 사람에게 돌아온다 ― 지은경 시인 시의 사랑 미학과 씨네포엠이 열어 보인 새로운 문학의 지평 ㅡ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상처가 빛을 얻을 때, 시는 사람에게 돌아온다 ― 지은경 시인 시의 사랑 미학과 씨네포엠이 열어 보인 새로운 문학의 지평 2026.09.08
상처가 빛을 얻을 때, 시는 사람에게 돌아온다 ― 지은경 시인 시의 사랑 미학과 씨네포엠이 열어 보인 새로운 문학의 지평

상처가 빛을 얻을 때, 시는 사람에게 돌아온다

― 지은경 시인 시의 사랑 미학과 씨네포엠이 열어 보인 새로운 문학의 지평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1. 들어가는 말

시는 종이에서 완성되지 않는다

한 편의 시가 책장을 빠져나와 스크린으로 걸어 나오는 순간, 시는 더 이상 활자의 소유물이 아니다.

문장은 빛이 되고, 행간은 음악이 되며, 말하지 않은 침묵은 배우의 눈빛과 화면의 공기로 되살아난다.

2026년 9월 2일 서울 서초문화원 대강당에서 열린 ‘제1회 포엠아트영화제 특별상영회―특별수요시네마 씨네포엠’은 이를 보여준 자리였다.

이날 상영된 여덟 편의 작품 가운데 지은경 시인의 〈사람아, 사랑아〉는 단순히 한 시인의 작품을 영상으로 번역한 결과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40여 년 동안 한 시인이 사람과 상처와 사랑을 바라보아 온 시선이 영상 미학과 만나 다시 태어난 하나의 사건에 가까웠다.

특히 최근 제17시집 《여기, 그리고 지금》 을 펴낸 지은경 시인의 문학을 돌아볼 때 〈사람아, 사랑아〉는 그의 시세계를 압축해 보여주는 중요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지은경 시의 중심에는 언제나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이 사랑받는 사람일 때도 있고, 상처 입은 사람일 때도 있으며, 배반한 사람일 때도 있고, 끝내 용서해야 할 사람일 때도 있다.

중요한 것은 지은경의 시가 사람을 쉽게 판결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의 시는 사람을 재판하는 법정이 아니라, 상처 입은 존재가 잠시 앉았다 갈 수 있는 작은 의자에 가깝다.

  1. 깨어진 유리잔의 시학

상처는 지은경 시에서 결손이 아니라 빛의 다른 방식이다

지은경 시의 가장 뚜렷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상처를 바라보는 방식이다.

상처를 찬양하지도 않고, 고통을 아름답게 포장하지도 않는다. 아픔은 분명히 아픔이다.

그럼에도 그의 시에서 상처는 삶의 최종 결론이 아니다.

〈고통의 빛남〉에 나타난 깨어진 유리잔은 이 시학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유리는 깨지는 순간 본래의 기능을 잃는다.

잔은 더 이상 물을 담지 못한다.

생활의 논리로 보자면 실패한 사물이다.

그런데 빛은 이상하게도 온전한 유리보다 깨어진 파편에서 더 많이 갈라진다.

상처가 기능을 망가뜨렸지만, 빛의 방향은 늘어났다.

지은경 시의 역설이다.

삶은 사람을 깨뜨릴 수 있다.

사랑의 배반, 관계의 상실, 세월의 쇠잔, 존재의 외로움은 인간을 예전 모습으로 돌려놓지 않는다.

그런데 지은경은 그 깨짐 이후를 본다.

깨어진 사람이 반드시 어두워지는 것은 아니다.

금이 간 자리로 전혀 다른 빛이 들어올 수도 있다.

이것은 단순한 낙관주의가 아니다.

아픔을 통과한 존재만이 타인의 아픔을 함부로 말하지 않게 된다는 체험적 윤리다.

지은경 시에서 상처는 훈장이 아니다.

상처는 타인의 상처 앞에서 목소리를 낮추게 하는 낮은 문턱이다.

그 문턱을 넘어선 뒤에야 사람은 비로소 다른 사람의 아픔을 이해할 자격을 조금 얻게 된다.

  1. 찌그러진 깡통에 꽂힌 장미

아름다움은 좋은 환경에서만 피는 것이 아니다

〈사람아, 사랑아〉 의 영상 가운데 특히 인상적인 장면은 화려한 꽃병이 아니라 찌그러진 깡통에 꽂힌 붉은 장미다.

이 장면은 지은경 시의 미학을 거의 한 컷으로 설명한다.

보통 꽃은 아름다움의 상징이고, 꽃병은 그 아름다움을 돋보이게 하는 장치다.

그런데 지은경의 세계에서 꽃은 좋은 그릇만을 요구하지 않는다.

찌그러진 깡통에서도 장미는 핀다.

삶이 완전한 사람만 사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상처 없는 사람만 아름다울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뜻이다.

세상에는 깡통 같은 시간이 있다.

눌리고, 찌그러지고, 버려진 것처럼 느껴지는 시간이다.

그럼에도 어떤 사람은 그 안에 꽃 한 송이를 세워놓는다.

지은경의 시가 바로 그러하다.

상처를 지우는 시가 아니라 상처가 놓인 자리에도 꽃 한 송이 설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것이 그의 시가 지닌 따뜻함이다.

따뜻함은 현실을 모르는 사람이 쉽게 내놓는 위안이 아니다.

지은경의 따뜻함은 현실을 다 보고도 사람을 버리지 않는 쪽을 선택하는 데서 생긴다.

  1. 속아주는 사랑

지은경의 사랑은 소유보다 연민에 가깝다

지은경의 시에서 사랑은 낭만적 감정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의 사랑에는 상처와 배반, 기다림과 용서가 함께 들어 있다.

〈속고 사는 기쁨〉 에서 나타나는 ‘알면서도 속아주는 사랑’은 자칫 잘못 읽으면 무조건적인 희생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조금 다르게 읽어야 한다.

이 시의 중요한 지점은 ‘속음’이 아니라 ‘알고 있음’이다.

모르기 때문에 속는 것이 아니라, 알면서도 상대의 허술함까지 품으려는 마음이다.

이 사랑은 눈먼 사랑이 아니라 눈뜬 연민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상대가 완전하다고 믿는 일이 아니다.

그의 모자람까지 보면서도 사람 하나를 완전히 폐기하지 않는 일이다.

지은경의 시는 바로 이에서 윤리적 깊이를 얻는다.

현대 사회는 너무 빨리 사람을 분류한다.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 내 편과 네 편, 성공한 사람과 실패한 사람을 잘라놓는다.

문학마저 그 판단의 속도를 따라가면 시는 또 하나의 판결문이 되고 만다.

지은경의 시는 판결을 서두르지 않는다.

한 사람 안에 사랑받을 부분과 미워할 부분이 함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인간은 한 줄로 정리되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1. 〈내 고향은요〉 와 확장된 고향의식

고향은 출생지가 아니라 꽃필 수 있는 자리다

〈내 고향은요〉 는 지은경 시세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 작품에서 고향은 행정구역이나 지리적 장소로 한정되지 않는다.

산일 수도 있고, 바다일 수도 있으며, 대한민국일 수도 있고, 지구촌 전체일 수도 있다.

여기서 고향의 개념은 획기적으로 확장된다.

고향은 태어난 장소가 아니라 존재가 자신답게 꽃필 수 있는 장소다.

이러한 인식은 매우 현대적이면서도 보편적이다.

오늘의 인간은 끊임없이 이동한다.

태어난 곳과 사는 곳이 다르고, 뿌리를 내린 장소와 마음이 머무는 장소가 다르다.

디아스포라와 이주가 일상이 된 시대에 고향을 출생지로만 정의하는 것은 점점 협소해진다.

지은경은 그 오래된 개념에 작은 균열을 낸다.

꽃 피울 수 있는 곳이면 모두 고향이라는 발상은 인간 존재의 자유를 넓힌다.

고향은 돌아가야 하는 과거가 아니라, 살아낼 수 있는 현재가 된다.

이는 최근 시집 《여기, 그리고 지금》 의 정신과도 자연스럽게 맞닿는다.

과거를 애도하느라 오늘을 잃지 않고, 오지 않은 미래를 걱정하느라 현재를 놓치지 않는 태도다.

지은경의 시에서 ‘지금’은 시간이 아니라 존재 방식이다.

  1. 《여기, 그리고 지금》

현재를 견디는 사람이 생명을 긍정한다

지은경 시의 40년은 상처에서 사랑으로, 사랑에서 수용으로 이동해온 시간이라 할 수 있다.

초기의 서정이 감정의 떨림에 가까웠다면, 원숙기에 이른 그의 시는 존재 전체를 바라보는 쪽으로 넓어지고 있다.

『여기, 그리고 지금』이라는 제목은 그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여기에는 거창한 철학적 선언보다 삶을 대하는 하나의 자세가 있다.

인생은 지금밖에 살 수 없다는 사실이다.

사람은 어제에 살 수 없고, 내일에도 아직 살 수 없다.

몸이 실제로 서 있는 곳은 언제나 여기이며, 생명이 숨 쉬는 시간은 지금뿐이다.

지은경의 시는 바로 이 단순한 진실을 허투루 지나치지 않는다.

상처 역시 과거의 사건이지만, 그것을 끌어안는 행위는 지금 일어난다.

사랑도 기억 속에 존재할 수 있지만, 용서는 지금 해야 한다.

이에

지은경 시의 현재성은 단순한 시간 감각이 아니라 윤리다.

오늘 사랑하지 못하면 사랑은 관념이 되고, 지금 위로하지 못하면 위로는 수사가 된다.

  1. 씨네포엠과 제3의 예술

시는 읽히는 것에서 보이고 들리는 것으로 확장된다

연홍식 총예술감독이 강조한 ‘30%의 언어와 70%의 비언어’라는 개념은 씨네포엠의 성격을 잘 설명한다.

시가 활자만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시에는 쓰이지 않은 부분이 더 많다.

행간, 침묵, 정서의 진폭, 말하기 직전의 숨, 문장을 끝낸 뒤 남는 공백이 그것이다.

영상은 그 보이지 않는 부분을 이미지와 소리로 확장한다.

따라서 씨네포엠은 단순한 시 낭송 영상과 다르다.

원작 시를 설명하는 것도 아니다.

한 편의 시를 다른 예술 언어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재창조에 가깝다.

지은경의 시가 씨네포엠과 특히 잘 만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의 시는 사물 이미지가 분명하고 정서적 파장이 크다.

유리잔, 깡통, 장미, 폭풍, 고향 같은 이미지들은 활자 안에 머물지 않고 쉽게 시각적 상징으로 전환된다.

이때 중요한 것은 연출이 시를 압도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영상이 너무 많은 것을 설명하면 시의 여백은 죽는다.

좋은 씨네포엠은 시를 번역하지 않는다.

시가 미처 말하지 않은 것을 다른 감각으로 흔들어 깨운다.

〈사람아, 사랑아〉 는 이 점에서 문학과 영상이 만나는 유의미한 사례였다.

  1. 사람을 향한 40년

지은경 시의 본령은 인간에 대한 신뢰다

지은경은 이날 관객과의 대화에서 시가 사람을 사랑하고 사람을 이해하려는 노력 속에서 피어난다는 취지의 말을 전했다.

이 말은 그의 시력 전체를 관통하는 중요한 열쇠다.

지은경의 시에는 자연도 있고, 고향도 있고, 상처도 있다.

그럼에도 모든 길은 사람에게 돌아온다.

꽃은 사람의 마음을 비추기 위해 피고, 폭풍은 사람의 상처를 드러내기 위해 지나가며, 고향은 사람이 다시 살아갈 자리를 찾기 위해 확장된다.

그의 시는 사물에서 시작해 사람에게 귀착된다.

바로 이 점에서 지은경은 서정시의 오래된 본령을 지키면서도 오늘의 언어를 찾는다.

시는 사람을 버리지 않는 예술이다.

세상이 사람을 등급으로 나누고, 알고리즘이 취향을 분류하며, 관계마저 빠르게 소비되는 시대에 시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어쩌면 한 사람을 끝까지 한 사람으로 바라보는 일일 것이다.

지은경의 문학은 그 자리를 지킨다.

  1. 문단의 새로운 역할과 지은경의 선택

시단은 문을 지키는 곳이 아니라 문을 넓히는 곳이어야 한다

지은경 시인이 한국문인협회 시분과 회장에 도전하겠다는 뜻을 밝힌 점도 그의 문학적 행보와 분리해 볼 수 없다.

문단의 직책은 명예만을 위한 자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

한 세대가 쌓아온 문학적 경험을 다음 세대와 연결하고, 새로운 매체와 독자를 받아들이는 통로가 되어야 한다.

오늘의 시는 책 안에서만 살아갈 수 없다.

낭송, 영상, 공연, 영화, 디지털 플랫폼, AI 기반 예술 등 새로운 매체가 문학의 바깥이 아니라 문학이 확장될 수 있는 또 다른 방이 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새로움 자체가 아니다.

새로운 기술 안에서도 시의 정신을 잃지 않는 일이다.

지은경이 씨네포엠을 통해 보여준 경험은 이 가능성을 상징한다.

전통을 버리고 새로움으로 가자는 것이 아니다.

전통의 뿌리를 가진 채 가지를 넓히자는 것이다.

나무는 뿌리만 깊다고 숲이 되지 않는다.

가지가 햇빛을 만나야 한다.

한국 시단 역시 마찬가지다.

  1. 나오는 말

한 편의 시는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 존재한다

지은경 시의 궁극적 가치는 화려한 수사에 있지 않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의 시가 끝내 사람 쪽을 바라본다는 사실이다.

상처를 겪었기에 상처 입은 사람을 알아보고, 사랑에 속아보았기에 사랑의 허술함을 품으며, 고향을 하나의 장소에 가두지 않기에 누구에게나 살아갈 자리를 내어준다.

그의 시에서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태도다.

시 역시 장식이 아니라 사람을 향한 행동이다.

〈노래여 노래여〉 에서 자신의 시들이 누군가의 눈물을 닦아주는 노래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지은경 시의 본질을 가장 정확하게 보여준다.

좋은 시는 독자의 감탄을 받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한 사람의 마음을 조금 덜 춥게 해야 한다.

한 사람의 상처를 함부로 부끄러워하지 않게 해야 한다.

무너진 자리에서도 다시 꽃이 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어야 한다.

지은경의 시는 바로 그 일을 해왔다.

씨네포엠 〈사람아, 사랑아〉 는 그 시세계가 스크린이라는 새로운 몸을 입은 사건이었다.

깨어진 유리잔이 빛을 쪼개고

찌그러진 깡통에 장미가 피고

한 사람의 고향이 지구촌으로 넓어지는 동안

시도 달라졌다.

책 속의 시가

관객의 눈과 귀와 가슴으로 이동했다.

어쩌면 문학의 미래는

거창한 신기술에 있지 않을지 모른다.

아무리 매체가 달라져도

한 사람을 끝내 사람으로 바라보는 마음

바로 그 마음을

새로운 방식으로 다시 살려내는 데 있을 것이다.

지은경의 시는 그 진실을

새로운 화면 위에 다시 써 보이고 있다.

상처가 빛을 얻는 순간

시는 비로소 사람에게 돌아온다.

그것이 지은경 시의 40년이 우리에게 남기는

가장 따뜻하고도 단단한 문학적 대답이다.

ㅡ 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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