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는 시인의 전유물이 아니다 ㅡ청람 김왕식
시는 시인의 전유물이 아니다 2026.08.26
ㅡ청람 김왕식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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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시인의 전유물이 아니다
시는 시인의 전유물인가.
세상은 오래도록 시인이라는 이름에 일정한 문턱을 세워왔다. 주요 일간지의 신춘문예를 통과한 사람, 각종 문예지를 통해 이름을 올린 사람, 기성 유명 문인의 추천을 받아 추천 완료의 절차를 밟은 사람 등을 우리는 흔히 정통 시인이라 부른다. 물론 이러한 등단 제도는 문학적 역량을 검증하고 새로운 작가를 발굴하는 중요한 통로다. 그 문턱을 넘기 위해 오랜 시간 절차탁마한 노력 또한 결코 가볍지 않다.
다만 등단이라는 사실과 좋은 시를 쓰는 일은 等値될 수 없다.
시인의 이름을 얻었다고 모든 문장이 시가 되는 것은 아니며, 아직 어떤 문단의 문패도 달지 않았다고 해서 그 사람의 언어가 시에서 멀리 있는 것도 아니다.
시는 제도보다 먼저 태어났다.
문예지가 생기기 전에도 사람은 노래했고, 신춘문예가 없던 시대에도 슬픔과 기쁨을 운율에 실었다. 시집이라는 물성이 존재하기 훨씬 전부터 사람들은 사랑과 이별, 노동과 죽음, 기다림과 그리움을 짧은 말속에 눌러 담았다.
여염집 아낙이 새벽 부엌에서 아궁이 불을 지피며 혼잣말처럼 흘린 한마디가 있다.
“불은 다 꺼졌는데 식구들 밥은 또 익네.”
그 한마디에는 한 사람의 생애가 들어 있을 수 있다. 자신은 타들어가면서도 가족의 끼니를 익혀낸 세월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바다에 나간 늙은 어부가 그물을 걷으며 흥얼거린 말도 그렇다.
“고기는 바다 것이고 빈 그물만 내 것이구나.”
그것을 누가 원고지에 옮겨 적는다면 이미 한 편의 시가 될 만하다. 삶의 허무와 욕망의 한계가 몇 마디 안에 들어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다툼 속에서도 시는 튀어나온다.
“내가 먼저 봤으니까 내 거야.”
다른 아이가 대꾸한다.
“먼저 본다고 네 것이면 하늘도 네 거냐.”
어른이 평생 책을 읽어도 얻기 어려운 문장이 철없는 아이의 입에서 불쑥 나오는 순간이 있다.
시는 바로 그런 곳에 숨어 있다.
논두렁에 허리를 굽힌 농부의 한숨에도 있고, 시장 좌판을 걷는 노파의 손등에도 있으며, 병실 창문에 오래 머문 눈빛에도 있다. 누군가 떠난 뒤 밥그릇 하나를 치우지 못하는 사람의 망설임에도 시는 있다.
문제는 시가 어디에 있는가가 아니다. 그것을 누가 발견하는가에 있다. 시인은 세상에 없는 것을 만들어내는 사람만은 아니다. 이미 세상 곳곳에 놓여 있는 슬픔과 환희, 노동과 사랑, 상처와 기다림 속에서 아직 이름 붙지 않은 떨림을 알아보고 그것을 언어의 자리로 옮겨놓는 사람에 가깝다.
등단은 시인의 자격증이 될 수는 있어도 시심의 보증서는 아니다.
문학상 역시 작품의 한 시점에 대한 평가일 뿐, 한 사람의 언어 전체를 영원히 증명해 주는 훈장은 아니다.
좋은 시는 명함에서 나오지 않는다.
얼마나 깊이 살아냈는가 얼마나 오래 바라보았는가 얼마나 함부로 말하지 않았는가 그 사람의 삶이 문장 속에서 스스로 드러날 때 비로소 시의 체온이 생긴다.
시를 쓰는 사람보다 먼저 시를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꽃이 피는 순간보다 꽃이 지는 순간을 오래 바라보고, 떠나는 사람의 뒷모습을 함부로 해석하지 않으며, 이름 없는 사람의 작은 울음을 지나치지 않는 마음.
그 마음이 있다면 부엌도 시인의 서재가 되고, 어선도 원고지가 되며, 아이들의 골목도 한 권의 시집이 된다.
시는 특정한 사람의 소유물이 아니다. 삶이 먼저 쓰고 사람이 뒤늦게 받아 적는 것이다. 시인은 그 받아쓰기를 조금 더 오래 연습한 사람일 뿐이다 ㅡ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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