혀에는 뼈가 없지만 사람을 꺾는다
혀에는 뼈가 없지만 사람을 꺾는다 2026.08.28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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혀에는 뼈가 없지만 사람을 꺾는다
혀에는 뼈가 없다. 부드럽다. 몸 안에서 가장 유연한 기관 가운데 하나다. 허나 사람을 꺾는 데는 단단한 뼈가 필요하지 않다. 한마디면 된다.
사람은 주먹에 맞으면 맞은 자리를 짚는다. 칼에 베이면 피가 난 곳을 찾는다. 말에 베이면 어디를 짚어야 할지 모른다. 가슴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깊고 마음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넓다. 상처는 분명한데 피가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상처는 남에게 설명하기 어렵다.
“그 말 때문에 아직도 아프다” 누군가는 대수롭지 않게 말한다. “그걸 아직도 마음에 두고 있어?” 그 한마디가 두 번째 칼이 된다. 처음에는 말에 베이고 다음에는 아파하는 자신까지 부정당한다.
상처가 깊어지는 것은 칼날이 날카로워서만이 아니다. 아픔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을 때 상처는 안쪽으로 더 깊어진다. 사람의 몸에는 상처가 나면 딱지가 생긴다. 마음에는 딱지가 없다. 다 아문 줄 알았던 오래된 말이 비슷한 목소리 하나를 만나면 다시 살아난다.
“너는 왜 그렇게 못났니” 수십 년 뒤 누군가의 사소한 지적 앞에서 이유 없이 크게 흔들릴 수 있다. 오늘의 말만 듣는 것이 아니다. 과거의 수많은 말이 그 한마디 뒤에서 함께 일어난다. 사람의 귀는 현재에 있지만 마음의 귀는 오래된 방들까지 열어놓고 산다. 하여 한마디는 언제나 한마디로 끝나지 않는다. 그 말이 어디에 닿을지 말하는 사람은 모른다. 상대의 가슴 안에 어떤 오래된 상처가 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말은 보이는 사람에게 하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그 사람 안에 숨어 있는 수많은 기억에게까지 닿는다. 이것이 말 앞에서 겸손해야 하는 까닭이다. 사람을 가장 깊이 꺾는 말은 큰 욕설만이 아니다. 때로는 아주 평범한 말이다.
“원래 너는 그래.” “네가 그렇지 뭐.” “넌 안 바뀌어.” “그 정도밖에 안 돼?” 이런 문장에는 판결이 들어 있다. 사람을 현재의 한 장면에 붙잡아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것이라고 못 박는다. 사람의 가능성에 마침표를 찍는다. 실수를 지적하는 것과 사람 전체를 규정하는 것은 다르다.
“이번 행동은 잘못됐다” “넌 원래 잘못된 사람이야” 사람은 잘못보다 낙인 때문에 더 깊이 무너질 때가 있다. 잘못은 고칠 수 있지만 존재 전체가 부정당하면 어디에서 다시 시작해야 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에게 함부로 마침표를 찍지 말아야 한다. 사람은 아직 쓰이고 있는 문장이다. 오늘의 오자가 그 사람의 마지막 문장은 아니다. 말의 폭력 가운데 가장 교묘한 것 하나가 농담이다.
“농담인데 뭘 그래.” 이 말 뒤에는 얼마나 많은 상처가 숨어 있는가.
외모를 건드리고 가난을 건드리고 학력을 건드리고 나이를 건드리고 가족을 건드리고 실패를 건드린다.
사람들이 웃으면 한 번 더 웃긴다. 상대가 웃지 않으면 예민하다고 말한다. 농담은 원래 함께 웃기 위한 것이다. 한 사람이 웃고 한 사람이 견뎌야 한다면 그것은 농담의 옷을 입은 모욕에 가깝다.
웃음에도 품격이 있다. 누군가를 밟고 올라가야 생기는 웃음은 높은 웃음이 아니다. 자기 자신을 낮추어 남을 편안하게 하는 웃음이 더 귀하다. 사람을 즐겁게 하는 재주는 훌륭하다. 허나 사람의 자존을 희생시켜 얻는 웃음은 너무 비싸다.
말은 권력을 만나면 더 위험해진다. 같은 말이라도 누가 하느냐에 따라 무게가 달라진다.
부모가 아이에게 하는 말 교사가 학생에게 하는 말 상사가 부하에게 하는 말 지도자가 구성원에게 하는 말
그 말들은 대등한 관계의 말과 같지 않다. 위에 있는 사람의 한마디는 아래에 있는 사람에게 문장이 아니라 환경이 된다.
상사가 회의 자리에서 “이것도 못 합니까?” 라고 한 번 말했을 뿐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듣는 사람에게는 그 한마디가 수십 개의 시선을 등에 얹는다.
사람은 실수보다 공개적으로 작아졌다는 사실을 더 오래 기억한다. 권력을 가진 사람은 자기 말의 크기를 모를 때가 많다. 자기에게는 작은 돌멩이였는데 아래에서 받는 사람에게는 바위가 된다. 높이 올라갈수록 말을 낮춰야 하는 이유다. 높은 자리는 말을 크게 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라 말의 무게를 더 많이 책임져야 하는 자리다.
부모의 말도 그렇다. 부모는 아이에게 세상 최초의 언어가 된다. 아이에게 부모의 말은 의견이 아니라 세계다. 어린아이는 부모의 말을 비판적으로 걸러낼 힘이 없다.
“너는 착한 아이야” 라는 말을 오래 들으면 자기 안에 선한 가능성을 믿는다. “너는 왜 이렇게 문제야” 라는 말을 오래 들으면 자기가 문제라고 믿을 수 있다.
부모는 아이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사람만이 아니다. 매일의 말로 아이 안에 또 다른 이름을 붙인다.
겁쟁이 말썽꾸러기 똑똑한 아이 착한 아이 실망스러운 아이
그 이름이 오래 반복되면 아이는 어느 순간 그 이름대로 자신을 바라본다. 언어는 설명을 넘어 정체성을 만든다. 그래서 사랑한다면 사랑한다는 마음만으로 충분하지 않을 때가 있다. 사랑하는 방식도 배워야 하고 사랑하는 말도 배워야 한다. 사랑이 깊어도 말이 거칠면 사랑은 상대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못한다. 좋은 마음이 좋은 말로 번역되지 않으면 상대는 원문을 읽을 수 없다.
가까운 관계일수록 말은 더 조심해야 한다. 사람들은 낯선 사람에게 예의를 갖추면서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말을 함부로 한다. 가족이니까 부부니까 오래된 친구니까 이해할 거라고 생각한다. 가까움이 예의를 면제해 주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가까울수록 더 많은 것을 알고 있기에 더 깊이 상처 줄 수 있다.
낯선 사람은 내 약점을 잘 모른다. 사랑했던 사람은 안다. 어디를 찌르면 가장 아픈지 안다. 분노한 순간 그 약점을 꺼내 쓰는 사람이 있다. 논쟁에서는 이길 수 있다. 관계에서는 큰 것을 잃는다. 가까운 사람의 약점을 싸움의 무기로 쓰지 않는 것 그것도 사랑의 한 형태다. 사랑은 좋은 날의 다정함만이 아니다.
화가 났을 때 얼마나 잔인해지지 않을 수 있는가에서도 드러난다. 말을 많이 삼켜본 사람은 침묵의 무게를 안다. 입술까지 올라온 독한 말을 다시 내려보낸 적이 있는 사람 분노 때문에 밤새 문장을 만들었다가 아침에 지워본 사람 상대에게 돌려주고 싶은 상처를 끝내 돌려주지 않은 사람 그런 사람의 침묵은 비어 있지 않다. 그 안에는 자기와 싸운 흔적이 들어 있다. 사람은 타인과 싸우는 것보다 자기 혀와 싸우는 일이 더 어렵다. 타인은 밖에 있지만 혀는 늘 자기 안에 있기 때문이다. 화를 내는 순간에는 독한 말을 하는 것이 쉽다.
참는 일이 어렵다. 이기기 위해 말하는 것은 쉽다. 관계를 남겨두기 위해 한마디를 버리는 일이 어렵다. 말을 삼키는 순간 겉으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허나 안에서는 큰일이 일어난다. 분노가 자존심을 부르고 자존심이 혀를 밀어 올리고 혀가 말을 세상 밖으로 내보내려는 순간 마음 한구석에서 작은 손 하나가 그 말을 붙든다.
“하지 마라” 여기까지 가면 돌아오기 어렵다 그 작은 손을 키우는 일이 어쩌면 평생의 공부인지도 모른다. 침묵한다고 모든 것이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말해야 할 때 침묵하면 그 침묵 또한 폭력이 될 수 있다.
부당한 일을 보고도 말하지 않는 것 약자가 모욕당하는데 외면하는 것 자기 잘못을 사과하지 않고 입을 닫는 것 책임을 피하기 위해 침묵하는 것 이런 침묵은 절제가 아니다. 도피다. 말을 삼킨다는 것은 모든 말을 없애는 일이 아니다.
어떤 말은 삼키고 어떤 말은 끝내 해야 하는지 아는 일이다. 비난은 삼키되 진실은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모욕은 삼키되 부당함은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자기 자랑은 삼키되 감사는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분노는 가라앉히되 상처받았다는 사실은 정중히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언어의 성숙은 말의 양을 줄이는 데 있지 않다. 말의 종류를 가려내는 데 있다. 칼은 뽑지 않아도 칼집에 있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말도 그렇다. 삼킨 말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으로 바뀔 수 있다. 분노를 삼키면 이해가 될 수도 있다. 험담을 삼키면 침묵이 될 수도 있다. 비난을 삼키면 질문이 될 수도 있다. 자랑을 삼키면 감사가 될 수도 있다.
말을 삼킨다는 것은 억압이 아니라 변환일 수 있다. 안에서 한 번 더 익혀 다른 언어로 내보내는 것이다. “왜 그렇게 했어?” 가 “그때 무슨 일이 있었어?” 로 바뀌고 “넌 항상 그래” 가 “이번 일은 많이 아쉽다” 로 바뀌고 “네가 틀렸어” 가 “다른 쪽에서도 한번 볼 수 있지 않을까” 로 바뀐다. 말 한마디가 달라지는 순간 관계의 방향도 달라질 수 있다. 말을 잘하는 사람은 많다. 말을 살려내는 사람은 드물다. 같은 사실을 말하면서도 상대에게 돌아올 길을 남겨두는 사람 잘못을 지적하면서도 존엄을 훼손하지 않는 사람 분노하면서도 상대를 인간 이하로 만들지 않는 사람 그런 사람의 말에는 칼날보다 손잡이가 먼저 있다. 진실을 전달하면서도 사람이 다치지 않도록 잡을 자리를 남겨둔다.
언어의 품격은 말을 부드럽게 꾸미는 기술이 아니다. 사람을 놓치지 않는 기술이다. 나이가 들수록 이 사실이 더 크게 보인다. 젊은 날에는 옳은 말을 하는 것이 중요했다.
세월이 흐르면 옳은 말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가 더 중요해진다. 옳은 말도 칼처럼 쓸 수 있다. 진실도 사람을 모욕하는 방식으로 전달할 수 있다. 정의라는 이름으로 자기 분노를 정당화할 수도 있다. 말이 옳다고 해서 말하는 방식까지 옳은 것은 아니다.
칼날에 ‘정의’라고 새겨두었다고 해서 베인 상처가 덜 아픈 것은 아니다. 말의 옳음과 말의 자비는 함께 가야 한다. 진실은 사람을 깨우기 위해 존재해야지 사람을 짓밟기 위해 존재해서는 안 된다. 사람은 살아가며 수많은 말을 잊는다. 자기 존재를 작게 만들었던 말은 잘 잊지 못한다.
어떤 사람은 평생 인정받기 위해 애쓴다. 어릴 적 한 번도 “잘했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칭찬을 받아도 믿지 못한다. 너무 오래 “넌 부족하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사랑받고 있어도 버림받을까 두려워한다. 오래전 누군가가 “너 같은 사람을 누가 좋아하겠어” 라고 했기 때문이다.
말은 지나갔는데 그 말의 그림자는 남았다. 그 그림자 안에서 수십 년을 사는 사람도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오늘 건네는 한마디는 생각보다 훨씬 무겁다. 지금 몇 초 동안 한 말이 누군가에게는 수십 년짜리 기억이 될 수 있다. 이쯤에서 말을 하기 전에 묻고 싶어진다. 이 말은 상대에게 무엇으로 남을까.
칼인가 흉터인가 문인가 의자인가 등불인가
모든 말을 이렇게 살피며 살 수는 없을 것이다. 사람은 실수한다. 화도 낸다. 때로는 상처도 준다. 중요한 것은 자기 말이 남긴 흔적을 외면하지 않는 일이다.
말이 지나간 뒤 뒤를 돌아볼 수 있는 사람 상처를 보았다면 다시 돌아가 사과할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은 혀의 완전한 주인은 아닐지라도 혀의 노예에서는 조금씩 벗어난다.
혀에는 뼈가 없다. 허나 뼈보다 단단한 것을 부러뜨릴 수 있다. 사람의 자존 신뢰 사랑 오랜 우정
한 번 부러진 것은 붙일 수 있어도 자국이 남는다. 그래서 깊어진 사람은 말을 줄이기보다 말의 날을 무디게 한다.
진실은 남기고 독은 덜어낸다. 충고는 줄이고 이해를 늘린다. 판단은 늦추고 사람을 오래 본다. 세상을 오래 살수록 무서운 것은 큰 소리가 아니라 사소하게 던진 한마디라는 사실이 보인다.
말은 작다. 입술을 떠나는 데 한순간이면 충분하다. 그 말이 사람 안에서 사라지는 데는 한 생이 걸릴 수도 있다. 말하기 전에 그 한 생을 잠시 생각할 수 있다면 혀는 비로소 사람을 꺾는 도구가 아니라 사람을 세우는 손이 된다.
ㅡ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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