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은 향기를 설명하지 않는다 ㅡ청람
꽃은 향기를 설명하지 않는다 ㅡ청람 2026.08.28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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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은 향기를 설명하지 않는다
꽃은 자기 향기를 설명하지 않는다 향기를 증명하려 애쓰지도 않는다 그저 피어 있을 뿐이다 바람이 지나가면 향기가 따라가고 누군가 곁에 서면 말없이 스며든다
좋은 사람도 그렇다 자기 선함을 말하지 않는다 자기희생을 계산하지 않는다 자기 겸손을 설명하지 않는다 그가 사람을 대하는 방식 약한 사람 앞에서 낮아지는 태도 자기 공을 남에게 돌리는 습관 누군가의 실수를 들추지 않는 배려 그런 것들이 향기처럼 먼저 간다
사람의 인품은 자기소개서보다 오래 남는 냄새다 세상에는 자기를 설명하는 말이 너무 많다 좋은 사람입니다 정직하게 살아왔습니다 늘 남을 먼저 생각합니다 겸손하려고 노력합니다 이런 말들이 때로는 필요할 수도 있다 허나 정말 깊은 덕은 설명이 길지 않다 겸손을 오래 말할수록 겸손은 조금 멀어지고 선행을 오래 설명할수록 선행의 중심도 흔들릴 수 있다
향기는 자기 존재를 알리기 위해 퍼지는 것이 아니다 피어 있으니 그저 흘러나오는 것이다 사람도 그래야 한다 좋은 마음이 오래 익으면 말투와 표정과 행동에서 자연히 배어난다
나무는 제 뿌리가 얼마나 깊은지 말하지 않는다 폭풍이 불 때 그 깊이가 드러난다 사람도 평소에는 누구나 그럴듯해 보일 수 있다 문제는 흔들리는 순간이다 손해를 볼 때 자존심이 상할 때 인정받지 못할 때 자기보다 어린 사람에게 무시당했다고 느낄 때 그 순간 사람의 뿌리가 드러난다
평소에는 겸손을 말하던 사람이 작은 무시 앞에서 크게 흔들리고 사랑을 말하던 사람이 가까운 사람에게 잔인해진다 그때 말이 아니라 뿌리가 보인다 인품은 평온한 날보다 바람 부는 날 더 정확히 드러난다
사람은 칭찬받고 싶어 한다 자기가 한 일을 알아주기를 바란다 그 마음은 자연스럽다 허나 인정받지 못한다고 해서 좋은 일이 나쁜 일이 되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를 도왔다면 도움은 이미 끝났다 거기에 박수까지 받아야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선행을 오래 붙잡고 있으면 선행이 어느 순간 자기 공로가 된다
“내가 해줬다” 라는 말이 자라기 시작한다 그때부터 도움은 조금씩 거래가 된다 꽃이 향기를 내고 누가 맡았는지 확인하지 않듯 깊은 사람은 자기 선의를 오래 뒤돌아보지 않는다
말하지 않는 선함에는 독특한 힘이 있다 누군가 어려운 사람을 도왔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도움을 받은 사람만 안다 그 일은 세상에서 거의 사라진다 그런데도 그 행동의 가치는 줄지 않는다 사람은 자꾸 보여야 존재한다고 믿는다
사진을 찍고 기록을 남기고 알리고 칭찬을 받아야 일이 완성된 것처럼 느낀다
세상에는 아무도 모르는 아름다움이 많다 누군가 몰래 낸 병원비 이름 없이 보낸 장학금 친구의 체면을 위해 감춰준 실수 부모가 자식에게 끝내 말하지 않은 희생 그런 것들은 세상의 박수를 받지 못한다 삶의 향기는 대개 그런 데서 난다
꽃은 다른 꽃과 향기를 겨루지 않는다 장미가 국화를 비난하지 않고 매화가 목련에게 늦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저마다 자기 계절에 피어난다
사람은 다르다 비교한다 내가 더 많이 했고 내가 더 오래 견뎠고 내가 더 깊이 알고 내가 더 좋은 사람이라고 증명하려 한다 비교가 시작되면 향기는 경쟁이 된다 선함도 순위를 갖고 겸손도 과시가 된다 사람의 마음이 무거워지는 이유다
깊은 사람은 자기 향기를 남의 향기와 비교하지 않는다 그저 자기 자리에서 자기 몫을 다한다 말을 줄인다고 사람이 향기로워지는 것은 아니다 침묵도 자기 과시가 될 수 있다 말을 적게 하면서 “나는 너희와 다르다”는 마음을 품을 수 있다
검소하게 살면서 검소함을 우월감으로 삼을 수 있다 선행을 숨기면서 자기 은밀함을 자랑스러워할 수도 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형식이 아니다 마음의 방향이다
향기는 억지로 만들지 않는다 좋은 흙 충분한 빛 오랜 시간 그것들이 쌓이면 자연히 나온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겸손하려 애쓰기보다 자기가 모든 것을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오래 받아들이고 선하려 애쓰기보다 사람의 아픔을 오래 바라보며 침묵하려 애쓰기보다 불필요한 자기를 조금씩 덜어내는 것 그 과정 끝에서 말의 결도 달라진다
깊은 사람은 자기 이야기를 줄이는 대신 타인의 이야기를 더 잘 듣는다 그의 대화에는 자기 이름이 자주 등장하지 않는다 누군가 힘든 일을 말하면 자기 경험으로 덮지 않고 누군가 좋은 일을 했다고 하면 자기 성취를 덧붙이지 않는다 그 사람의 이야기가 그 사람의 것으로 남게 해 준다 이것은 생각보다 어렵다 사람은 대화 속에서 자기를 드러내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나도 그런 적 있어” “나는 더 힘들었어” “내가 예전에…” 이런 말들이 상대의 이야기를 조금씩 자기 쪽으로 끌어온다
깊은 사람은 그 충동을 줄인다 대화의 중심을 빼앗지 않는다 그 사람 곁에서 자기가 한 걸음 옆으로 물러난다 그 물러남이 향기다
사람의 인품은 강한 사람 앞보다 약한 사람 앞에서 더 정확히 드러난다 자기보다 힘센 사람에게 공손한 것은 어렵지 않다 문제는 아무 도움도 줄 수 없는 사람 앞이다 청소하는 사람에게 식당 직원에게 운전기사에게 어린아이에게 실수한 후배에게 그때 어떤 말투를 쓰는가 그 말투가 그 사람의 향기를 결정한다
높은 사람 앞에서 향기로운 척하는 것은 쉽다 낮은 곳에서 같은 온도를 유지하는 것은 어렵다 사람의 품격은 직함이 사라진 자리에서 드러난다
꽃은 자기 향기를 저장하지 않는다 아낌없이 흘려보낸다 사람의 좋은 말도 그래야 한다 칭찬할 일이 있으면 아끼지 않고 말하고 고마우면 제때 고맙다고 한다 사랑하면 너무 늦기 전에 사랑한다고 한다 침묵이 품격이라는 이유로 좋은 말까지 아껴서는 안 된다
향기는 밖으로 나가야 향기다 감사는 말해야 상대에게 도착한다 칭찬은 마음속에만 있으면 상대가 모른다 깊은 침묵과 따뜻한 표현은 서로 반대가 아니다 오히려 함께 있어야 한다
자기 자랑은 줄이고 타인의 수고는 말해주는 것 험담은 삼키고 칭찬은 꺼내는 것 분노는 늦추고 감사는 빠르게 전하는 것 그것이 말의 균형이다
사람은 자기의 좋은 점을 설명하기보다 좋은 사람이 되어가는 편이 낫다 자기는 선하다고 말하는 데 쓰는 시간보다 누군가의 말을 오래 들어주는 편이 낫고 자기는 겸손하다고 설명하기보다 자기보다 어린 사람에게서 배우는 편이 낫다 자기는 사랑이 많다고 말하기보다 가까운 사람에게 말투 하나 부드럽게 하는 편이 낫다
삶은 언어의 해설서가 아니다 삶 자체가 본문이다 말은 그 본문 아래 붙는 짧은 주석이면 충분할 때가 있다 작가도 그렇다 자기가 얼마나 깊은 사람인지 문장으로 증명하려 해서는 안 된다 독자는 과장된 깊이를 금세 알아본다 철학자의 이름을 많이 부른다고 사유가 깊어지는 것도 아니고 어려운 한자를 많이 쓴다고 문장이 높아지는 것도 아니다 문장이 깊어지려면 사람을 오래 바라봐야 한다 삶 앞에서 많이 낮아져야 한다 자기가 틀렸던 순간들을 한참 품어봐야 한다 한 사람의 슬픔을 쉽게 결론 내리지 않아야 한다 그런 시간이 문장 뒤에 쌓인다
좋은 글은 지식을 과시하지 않는다 독자에게 자기 마음을 돌아볼 작은 거울 하나를 건넨다 그 거울에는 작가의 얼굴보다 독자의 얼굴이 더 잘 보여야 한다
평론도 그렇다 좋은 평론가는 자기 지식을 보여주기 위해 작품을 사용하지 않는다 작품이 가진 향기가 독자에게 더 멀리 가도록 돕는다 작품 위에 올라서지 않고 작품 옆에 선다 자기 목소리로 시인의 목소리를 덮지 않는다
좋은 비평은 향수병이 아니다 꽃의 향기를 대신 만들어내지 않는다 이미 작품 안에 있는 향기를 독자가 더 잘 맡을 수 있게 창문을 열어주는 일에 가깝다 그때 비평에도 겸손이 필요하다 나이가 들수록 자기를 설명하는 말이 줄어들면 좋다 살아온 세월이 자기 말을 대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젊은 날에는 누구인지 말해야 했다 무엇을 했는지 어디에서 왔는지 무엇을 이루었는지 세월이 깊어지면 그 설명이 조금씩 짧아져도 된다 한 사람의 표정 말투 사람을 대하는 방식 그것이면 충분할 수 있다 오래 익은 과일은 자기가 달다고 말하지 않는다 한입 베어 물면 알 수 있다
사람도 그렇다 곁에 잠시 있어보면 그 사람의 세월이 어떤 맛으로 익었는지 느껴진다 진짜 향기는 자기에게는 잘 느껴지지 않는다 꽃은 자기 향기를 맡지 못한다 좋은 사람도 자기가 얼마나 좋은지 모를 수 있다 오히려 자기는 부족하다고 느낀다 아직도 말실수를 하고 아직도 화가 나며 아직도 누군가를 미워하는 자기 모습을 보기 때문이다
그런 부족함을 보는 눈이 사람을 더 깊게 만든다 자기 향기에 취한 사람은 더 이상 자라기 어렵다 자기 부족함을 보는 사람은 아직 피어날 자리가 남아 있다 사람에게 가장 위험한 순간은 남들이 자기를 좋은 사람이라고 부르기 시작할 때일 수 있다 칭찬이 쌓이면 그 이름을 지키고 싶어진다
겸손한 사람 훌륭한 사람 어진 사람 큰 어른
그 이름들이 새로운 옷이 된다 처음에는 남이 입혀준 옷인데 나중에는 자기가 벗지 못한다 그때부터 실제 마음보다 이미지가 중요해진다 좋은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좋은 일을 하게 될 수도 있다 향기가 향수로 바뀌는 순간이다
깊은 사람은 남이 붙여준 좋은 이름에도 오래 머물지 않는다 칭찬을 받되 그 칭찬에 집을 짓지 않는다 꽃이 아름다운 것은 영원히 피어 있어서가 아니다 질 것을 알면서도 자기 계절을 다 피우기 때문이다
사람의 향기도 영원하지 않다 한 생 동안 몇 번의 좋은 선택을 하고 몇 번의 말을 삼키고 몇 번의 용서를 하고 몇 번의 사과를 하며 조금씩 남는다
완벽한 향기를 가진 사람은 없다 중요한 것은 자기 안의 탁한 냄새를 줄이고 조금 더 맑은 향기를 남기려는 삶이다 꽃은 향기를 설명하지 않는다
이 말은 침묵하라는 뜻만이 아니다 설명보다 존재를 깊게 하라는 뜻이다 자기를 좋은 사람이라 말하기보다 좋은 사람이 되어가고 자기를 겸손하다고 말하기보다 사람 앞에서 한 걸음 낮아지고 자기를 사랑이 많은 사람이라 말하기보다 가까운 사람 하나를 덜 아프게 하는 것 그렇게 살아낸 시간이 향기가 된다
말은 바람을 타고 사라지지만 향기는 사람의 기억에 남는다 사람이 떠난 뒤에도 그 사람을 생각하면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 그것이 한 사람이 세상에 남길 수 있는 가장 깊은 문장일지도 모른다
ㅡ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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