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시작되는 바로 그 자리 ㅡ청람
시가 시작되는 바로 그 자리 ㅡ청람 2026.08.30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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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시작되는 바로 그 자리
좋은 시인은 세상에 없는 것을 만들어내는 마술사가 아니다.
모두에게 이미 보이고 있었지만 아무도 한참 바라보지 않았던 것을 끝까지 바라보는 사람이다.
남들이 꽃이라고 부르고 지나갈 때 그 꽃이 피기까지 견딘 겨울을 보는 사람.
남들이 낡은 신발이라고 버릴 때 그 뒤축에 남은 걸음의 역사를 보는 사람.
남들이 국자라고 부를 때 남의 그릇을 채우기 위해 뜨거운 곳에
먼저 들어가는 생을 보는 사람.
바로 그 순간 사물은 사물 이상의 것이 된다.
언어가 깨어난다. 비유가 생긴다. 한 편의 시가 슬며시 나온다.
시는 이미 생활의 가장 가까운 곳에 와 있다.
식탁 위에 있고 현관에 있고 주머니 속에 있고 병실의 창가에 있고 버스 천장 손잡이에 매달려 있다.
너무 가까워서 아직 시로 보지 못했을 뿐이다.
이제 조금 늦게 걷자. 조금 한참 보자.
이름을 지나 상처를 보고
기능을 지나 운명을 보며
사물의 표면을 지나 그 안에 숨어 있는 사람을 만나자.
그런 다음 딱 한 뼘만 비스듬히 바라보자.
그 한 뼘에서 평범했던 세상이 처음 보는 얼굴을 내민다.
익숙했던 사물이 감추어두었던 생을 보여준다.
그때 언어는 설명을 멈추고 자기 몸으로 일어서기 시작한다.
마침내 꽃 한 송이는 꽃을 넘어 한 생이 되고 낡은 구두 한 켤레는 한 사람의 역사가 되며 작은 볼펜 하나는 자기 몸을 비워 타인의 생각을 남기는 존재가 된다.
바로 그 자리에서 시는 더 이상 쓰는 기술이 아니다.
세상을 다시 보는 눈이 된다. 시인은 남보다 멀리 보는 사람이 아니라 남들이 지나친 것을 한 뼘 옆에서 끝내 다시 바라보는 사람이 된다.
그 한 뼘에서 세상은 다시 태어난다.
그 한 뼘에서 사물은 자기 두 번째 이름을 얻는다.
그 한 뼘에서 삶은 비로소 문장이 된다.
바로 그 순간 한 편의 시가 시작된다.
ㅡ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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