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처럼 와서 별처럼 남은 사람 — 젠룩스 김기정 선생님께 ㅡ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향기처럼 와서 별처럼 남은 사람 — 젠룩스 김기정 선생님께 2025.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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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기처럼 와서 별처럼 남은 사람 — 젠룩스 김기정 선생님께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사람의 첫인상이란, 마치 책의 첫 문장과도 같다. 서점에서 무심히 펼친 한 페이지가 눈을 멈추게 하고, 마음을 빼앗고, 끝내 그 책을 들고 나서게 되는 것처럼. 김기정 선생님은 그런 첫 문장을 가진 분이셨다.
단숨에 읽히지는 않지만, 천천히 읽을수록 더 깊은 이야기로 빠져들게 하는 사람. 한 문장이 마음의 책장을 넘기게 하는 것처럼, 그분의 존재는 사람의 내면에 조용한 물결을 일으켰다.
그날 처음 마주한 자리, 조용히 앉아계신 선생님의 모습은 마치 백자와도 같았다. 단순한 듯 정제된 선, 담백한 듯 고고한 빛깔, 그러나 그 안에 담긴 것은 오랜 세월과 손끝의 정성이 빚은 결기. 그윽한 시선, 조용한 숨결 속에서도 낯선 사람의 마음을 허물게 하는 온기가 흘렀다. 여리고 부드러운 향기였으나, 은은한 차향처럼 오래도록 머무는 기품이었다.
선생님과의 대화는 ‘침묵의 언어’를 새롭게 배운 시간이었다. 말수가 많지 않으나, 말의 밀도가 높았다. 짧은 문장 하나에도 통찰이 있었고, 따뜻한 마음이 곁들여져 있었다.
그것은 마치 낙숫물이 바위를 뚫는 고요한 힘처럼, 표면을 두드리기보다 심연을 울리는 언어였다. 그 안에는 타인의 말에 귀 기울이고, 감정을 놓치지 않으며, 본질을 꿰뚫는 지혜가 녹아 있었다.
선생님의 직관은 송곳 같았고, 논리는 실타래를 푸는 손길 같았다. 생각이 엉켜버린 실마리를 풀듯, 누구도 건드리지 못한 핵심을 조용히 건드리셨다. 그러고는 마치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웃음을 띠셨다. 그 웃음에는 ‘말하지 않아도 아는’ 사람만이 가진 위트가 있었다. 그것은 지식에서 비롯된 여유이기도 하고, 사람을 품는 인격에서 나오는 너그러움이기도 했다.
그분의 말에는 유행어가 없었고, 대신 고전의 향기가 스며 있었다. 구슬을 꿰듯 단어 하나하나를 골라 말하는 태도는, 오래된 장인의 손끝처럼 섬세했고, 문장에는 잎맥처럼 정갈한 구조와 철학이 녹아 있었다. 대화는 대화 이상의 것이 되어, 하나의 인문학이 되었고, 미학이 되었고, 인간학이 되었다.
김기정 선생님을 떠올릴 때면 드는 생각이 있다. ‘한 사람이 이토록 복합적일 수 있는가?’ 여성의 섬세함과 남성의 결단력을 동시에 지닌, 따뜻한 가슴과 냉철한 두뇌, 그리고 겸허한 자세 속에 감춰진 강단 있는 통찰. 마치 양손에 거울과 창을 동시에 쥔 듯한, 혹은 시계추처럼 균형을 잃지 않는 마음의 중력장 같은 분이다.
그분과 나눈 짧은 순간들은, 은유하자면 마치 운석이 남긴 흔적과 같다. 잠깐 스쳐 갔을 뿐인데 마음에 웅덩이가 생겼고, 그 자리에 물이 고이고, 풍경이 비치게 되었다. 그 여운은 가벼운 바람이 아니었다. 들판을 지나는 바람처럼, 그 흔적은 이후의 사유와 삶의 결에까지 영향을 주었다.
젠룩스라는 단어가 상징하듯, 선생님은 지성과 감성의 조화를 실현한 ‘빛의 사람’이다. 렌즈를 통해 세상을 또렷이 보는 안목, 시대를 꿰뚫는 분석력,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담아낼 수 있는 따뜻한 인격. 그 모든 특질이 하나의 이름 아래 겸손하게 모여 있었다.
그런 분을 만난다는 것은, 인생이라는 바다에서 우연히 유성우를 만나는 일과도 같다. 몇 초간의 빛남이지만, 그 기억은 밤하늘을 다시 올려다보게 한다. 선생님이 건넨 말 몇 마디, 미소 한 번, 고개를 끄덕이는 찰나의 시간들이 그런 존재였다.
김기정 선생님은 분명히 말없이 강한 분이셨다. 그 강함은 목소리를 높이는 데 쓰이지 않았고, 상대를 껴안는 데 쓰였다. 물이 낮은 곳으로 흐르듯, 늘 한 발 물러서 있으면서도 중심을 놓치지 않았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인격자의 면모이자, 우리가 배워야 할 리더의 자질일 것이다.
이제 선생님의 이름을 떠올릴 때마다, 마음에는 하나의 문장이 떠오른다. “당신과의 만남은 향기처럼 와서, 별처럼 남았다.” 그리하여 선생님과의 짧은 동행은 내게 하나의 계절이 되었고, 그 계절은 앞으로도 내 내면의 풍경을 환히 비춰줄 것이다.
고요한 사람은 흔적이 진하다. 김기정 선생님, 당신은 그러한 사람으로, 마음에 오래도록 머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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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기처럼 와서 별처럼 남은
젠룩스 김기정 선생께 드리는 시
청람 김왕식
서늘한 첫인상은
비단결 문장의 첫 행 같아
조용히 마음을 끌어당겼지요
당신은 백자 같았습니다
말없이 서 있어도
온 방을 밝히는 단정한 빛
단어는 가볍지 않았고
침묵조차 품격 있었습니다
마치 깊은 우물처럼 고요했지요
말보다 더 많은 것을
눈빛으로 전하는 사람
그 눈은 오래된 책장을 넘기듯
지식의 숲을 걸으며
꽃 피운 통찰을
한 송이 미소에 담아 건네셨지요
여성의 섬세함,
남성의 결기,
당신은 두 세계의 조화를 살아내셨습니다
직관은 송곳 같았고
논리는 비단 실처럼 풀렸으며
말끝엔 늘 따뜻한 겨울이 머물렀습니다
사람을 비추되
자신은 비추지 않으셨던 분
그래서 당신은 더 밝았습니다
한 번의 만남이
오래된 향처럼 남아
그리움의 서랍을 열게 합니다
당신은 향기처럼 와서
별처럼 떠오르며
이 마음에 은하 하나 놓고 가셨습니다.
ㅡ 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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