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승 시인의 「첫눈 오는 날 만나자」 ㅡ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정호승 시인의 「첫눈 오는 날 만나자」 2025.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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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눈 오는 날 만나자
시인 정호승
첫눈 오는 날 만나자
어머니가 싸리 빗자루로 쓸어 놓은 눈길을 걸어
누구의 발자국 하나 찍히지 않은
순백의 골목을 지나
새들의 발자국 같은 흰 발자국을 남기며
첫눈 오는 날 만나기로 한 사람을 만나러 가자
팔짱을 끼고 더러 눈길에 미끄러지기도 하면서
가난한 아저씨가 연탄 화덕 앞에 쭈그리고 앉아
목장갑 낀 손으로 구워 놓은 군밤을
더러 사 먹기도 하면서
첫눈 오는 날 만나기로 한 사람을 만나
눈물이 나도록 웃으며 눈길을 걸어가자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첫눈을 기다린다
첫눈을 기다리는 사람들만이
첫눈 같은 세상이 오기를 기다린다
아직도 첫눈 오는 날 만나자고
약속하는 사람들 때문에 첫눈은 내린다
세상에 눈이 내린다는 것과
눈 내리는 거리를 걸을 수 있다는 것은
그 얼마나 큰 축복인가?
첫눈 오는 날 만나자
첫눈 오는 날 만나기로 한 사람을 만나
커피를 마시고 눈 내리는 기차역 부근을 서성거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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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승 시인
본관은 동래(東萊). 경상남도 하동군에서 태어났고, 초등학교 1학년 때 대구로 이사하여 그곳에서 성장기를 보냈다. 중학교 1학년(62년) 때 은행에 다니던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하여 도시 변두리에서 매우 가난한 생활을 해야 했고, 경희대가 주최한 전국고교문예 현상모집에서 “고교문예의 성찰”이라는 평론으로 당선되어 문예장학금을 지급하는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68년 입학)를 들어가게 되었으며, 같은 대학의 대학원을 졸업했다.
1973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시 〈첨성대〉가 당선되어 시인이 되었으며, 198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위령제〉가 당선되어 소설가로도 등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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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눈의 약속, 존재의 따뜻함을 부르는 시학
― 정호승 시인의 ‘첫눈 오는 날 만나자’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정호승 시인의 시 ‘첫눈 오는 날 만나자’는 사랑과 기다림, 기억과 약속이 한 겹 눈처럼 포개진 아름다운 시편이다. 시인은 삶의 가장 순결한 감정을 ‘첫눈’이라는 메타포로 포착하고, 그것을 사람 사이의 온기로 연결한다. 이 시는 단지 계절을 읊은 풍경시가 아니라, 존재를 따뜻하게 감싸 안는 윤리적이고도 철학적인 노래다.
첫 연에서 “어머니가 싸리 빗자루로 쓸어 놓은 눈길”이라는 이미지는, 삶의 근원인 모성과 전통적 공동체의 정서를 상기시킨다. 아직 아무 발자국도 없는 순백의 눈길은 인간관계의 원초적 신뢰를 상징하며, “첫눈 오는 날 만나자”는 약속은 단순한 만남을 넘어 삶의 본질적인 기약, 즉 사람을 향한 귀의(歸依)를 선언하는 문장이 된다. 이 첫눈은 사랑과 순결, 그리고 새로움의 총체로 작용하며, 시인의 내면 윤리가 자연의 시간에 얹혀 절묘한 시적 흐름을 만들어낸다.
중간 연에서는 현실과 환상이 교차된다. “팔짱을 끼고 더러 눈길에 미끄러지기도 하면서”의 장면은 연인의 유쾌한 현실감각을 드러내며, “군밤을 더러 사 먹기도 하면서”는 도시 변두리의 소박한 풍경과 함께 삶의 진짜 온기가 무엇인지 일깨워준다. 시인은 작은 구체들을 통해, 사랑이란 먼 곳에 있지 않음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눈물이 나도록 웃으며 눈길을 걸어가자”는 시구는 단순한 감정의 묘사를 넘어, 눈물과 웃음이 공존하는 인생의 진실한 찰나를 압축하는 시적 정점이다.
후반부로 갈수록 시의 철학적 울림은 깊어진다.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첫눈을 기다린다”는 선언은 시인이 일관되게 보여주고자 하는 ‘기다림의 윤리’를 뚜렷이 부각한다. 첫눈을 기다리는 이들은 곧 사랑을 품고 있는 이들이며, 그 사랑이야말로 세상을 다시 순백으로 만들어줄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이다. 시인은 눈 내리는 자연의 섭리를 단순히 기상현상으로 보지 않고, 약속과 믿음, 그리고 사람의 온기 때문에 내리는 존재론적 사건으로 바라본다.
“세상에 눈이 내린다는 것과 / 눈 내리는 거리를 걸을 수 있다는 것은 / 그 얼마나 큰 축복인가?”라는 시구는 정호승 시인의 존재론적 감수성과 삶의 겸허를 집약한 문장이다. 그는 일상의 사소한 장면에서 가장 위대한 의미를 발견하는 시인이다. 이처럼 그의 시는 늘 인간의 내면과 사회적 현실 사이를 잇는 다리처럼 존재하며, 온유하면서도 흔들림 없는 시적 가치관을 견지해 왔다.
마지막 연의 “첫눈 오는 날 만나기로 한 사람을 만나 / 커피를 마시고 눈 내리는 기차역 부근을 서성거리자”는 시를 하나의 영화적 장면처럼 완결 짓는다. 구체적이고 감각적인 이미지 속에 시인은 삶의 소중함, 기다림의 아름다움, 그리고 사람 사이의 관계를 끝까지 지켜내는 데서 오는 깊은 울림을 품는다. 기차역은 이별과 만남이 교차하는 상징적 장소이며, 커피는 일상 속 따뜻한 삶의 메타포다.
정호승 시인의 삶의 가치철학은 결국 사람을 믿고, 기다림을 사랑하며, 눈 내리는 세상을 ‘축복’으로 여기는 낙관에 있다. 그의 시는 말의 과잉을 경계하고, 조용한 언어로 마음을 건드린다. “첫눈 오는 날 만나자”는 단순한 문장 속에 담긴 진실한 울림은, 지금도 누군가의 삶을 포근히 덮고 있을 것이다. 이 시는 계절의 시가 아니라, 사랑의 시이고, 인간 존재를 위한 시이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정호승 시인의 시학이며, 그가 세상과 맺고 있는 시적 연대의 방식이다.
ㅡ 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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