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찰

불에 그을린 책장 ㅡ 청람 김왕식

불에 그을린 책장 2025.08.31
불에 그을린 책장

불에 그을린 책장

청람 김왕식

책장은 그저 종이를 모아둔 곳이 아니다.

그곳에는 시간의 냄새가 배어 있고, 사람의 숨결이 묻어 있다.

책장을 열면 글자보다 먼저 다가오는 것은 삶의 흔적이다.

불에 그을린 책장을 마주할 때, 우리는 더 깊은 사색에 빠진다.

그 속에는 소멸과 남음, 파괴와 증언이 동시에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학교 도서관 한 켠에서 작은 화재가 난 적이 있었다.

불길은 크지 않았지만, 책장 가장자리가 검게 타들어갔다.

그때 처음 보았다.

검게 그을린 책장 속에서도 몇몇 책은 여전히 읽을 수 있었고, 글자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그 모습은 아이의 눈에도 묘한 울림을 주었다.

불길이 삶을 삼키려 해도, 진실은 끝내 남는다는 것을.

세월이 흐른 뒤, 역사 속에서도 불에 그을린 책장의 이야기를 자주 만나게 되었다.

전쟁 속에서 불타버린 도서관, 독재의 불길에 사라진 기록들.

기묘하게도 불길 속에서도 끝내 살아남은 책 한 권, 한 장의 기록은 오히려 더 강하게 세상을 울렸다.

불은 글자를 지우려 했지만, 그 불길이 남긴 상흔 덕분에 그 기록의 가치는 더 크게 빛났다.

불에 그을린 책장은 침묵 속에서 증언한다.

그을음은 단순한 흔적이 아니라, 시대가 남긴 상처의 표식이다.

그 표식을 바라보는 순간, 사람은 묻는다.

“왜 이 기록은 불타야 했는가?”

그 질문은 단순히 과거에 머물지 않는다.

지금 우리의 삶에서도 진실을 감추려는 불길이 여전히 타오르고 있음을 일깨운다.

사람의 삶도 책장과 다르지 않다.

수많은 날들이 쌓여 하나의 책장이 된다.

그 속에 웃음도, 눈물도, 실수도, 성취도 한 장씩 꽂혀 있다.

어떤 날은 불길처럼 찾아온 고통이 삶을 태워버린다.

병마의 불길, 상실의 불길, 배신의 불길.

그 속에서 우리는 삶의 페이지가 모두 사라질까 두려워한다.

불길은 모든 것을 삼키지 못한다.

가장 깊은 자리의 사랑과 신념은 끝내 남아 있다.

그것은 그을음 덕분에 더 또렷하게 드러난다.

상처 난 사람의 눈빛에서 더 강한 빛이 나오듯, 불에 그을린 책장은 더 큰 증언이 된다.

우리는 언젠가 불에 그을린 책장을 넘기게 될 것이다.

그때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은 책을 지녔는가가 아니라, 불길 속에서도 무엇을 지켜냈는가이다.

지워진 페이지가 아니라, 끝내 남아 있는 한 줄의 문장이 우리 삶의 진실이 된다.

오늘도 누군가는 삶의 불길 속에 서 있다.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불길은 모든 것을 삼키지 못한다.

남은 자국이 곧 우리의 증언이 되고, 그 증언은 다음 세대를 비춘다.

불에 그을린 책장은 소멸이 아니라 증언이다.

그을음 속에서 우리는 외려 지워지지 않는 진실과 마주한다.

ㅡ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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