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내리는 길상사 ― 허태기 시인의 시세계 ㅡ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평하다
비 내리는 길상사 ― 허태기 시인의 시세계 2025.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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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내리는 길상사
시인 청강 허태기
산감 고웁게 물드는
길상사 극락전 처마에는 기왓골 따라
빗방울이 은구슬처럼 흘러내리고
법정스님 진영각
비껴 흐르는 실개천 언덕
석조 반가사유상이 비를 맞으며
흘러내리는 폭포에 깊은 시름 던진다
백석 시인과 자야의 슬픈 사랑처럼
꽃무룻 진 뜨락 위로
사당이 외로운데
지장전의 아미타바 노래
빗속으로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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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내리는 길상사
― 허태기 시인의 시세계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허태기 시인의 ‘비내리는 길상사’는 자연과 인간, 사랑과 깨달음이 한데 녹아든 정묘한 서정의 결정체이다. 그의 시에는 단 한 줄의 군더더기도 없다. 빗소리 하나, 처마 끝 물방울 하나까지도 시적 언어로 승화시키는 섬세한 감각이 돋보인다.
이는 단순한 묘사가 아니라, 사물을 깊이 응시하는 ‘관찰의 힘’에서 비롯된 것이다. 허태기는 시어를 발견하고 적용하는 데 있어 거의 달인의 경지에 이른다. 그는 언어를 다듬는 장인이 아니라, 언어 속에서 존재의 숨결을 길어 올리는 시인이다.
첫 연의 “길상사 극락전 처마에는 기왓골 따라 / 빗방울이 은구슬처럼 흘러내리고”에서 그 세밀한 감각이 빛난다. 빗방울을 ‘은구슬’로 비유한 표현은 단순히 아름답지 않다. 그것은 마음의 울림, 즉 깨달음이 방울져 떨어지는 장면이다.
시인은 그 찰나의 빛을 포착하여, 자연의 사소한 움직임 속에 생의 깊이를 새긴다. 이처럼 허태기의 시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들리게 하는 ‘감각의 문학’이다.
중간부에서 ‘법정스님 진영각’과 ‘석조 반가사유상’이 등장하며 시의 시선은 인간의 내면으로 향한다. 비를 맞는 반가사유상의 모습은 시인의 분신처럼 느껴진다. 그는 세속의 슬픔을 껴안고도 그것을 고요한 명상의 언어로 치환한다. “폭포에 깊은 시름 던진다”는 구절은, 고통의 언어를 비움의 언어로 바꾸는 시인의 정신적 행위이다.
후반부에서 백석과 자야의 사랑을 소환하는 대목은 인간적 정념과 불교적 사유가 만나는 지점이다. ‘꽃무룻 진 뜨락’은 이승의 그리움이 피고 지는 자리이며, 그 위로 내리는 비는 이별의 슬픔을 덮는 연민의 장막이다. 시인은 그 안에서 인간의 사랑과 무상을 함께 노래한다.
마지막의 “지장전의 아미타바 노래 / 빗속으로 맴돈다”는 구절은 생과 사, 욕망과 해탈이 함께 울리는 소리다. 그것은 허태기 시인이 일생 동안 추구해온 ‘고요 속의 깨달음’의 미학이다.
그의 시는 사물과 마음의 미세한 떨림을 놓치지 않는다. 섬세한 관찰이 만들어낸 정제된 언어, 그리고 그 언어에 스며든 따뜻한 사유가 허태기 시의 본질이다.
‘비내리는 길상사’는 그런 그의 시적 세계가 응축된 한 편으로, 비를 통해 인간의 마음을 씻고, 언어를 통해 존재의 고요를 전하는 시인의 순정한 영혼을 보여준다.
비가 내리는 사찰의 고요 속에서, 허태기 시인은 우리에게 속삭인다.
“세상은 소리 없이 젖어들 때, 비로소 진실을 말한다.”
ㅡ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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