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찰

여지(餘地), 마음이 숨 쉬는 빈자리 ㅡ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여지(餘地), 마음이 숨 쉬는 빈자리 2025.10.20
여지(餘地), 마음이 숨 쉬는 빈자리

여지(餘地), 마음이 숨 쉬는 빈자리

청람 김왕식

사람의 마음에도 계절이 있다면, 여지는 아마 봄의 공기일 것이다. 가득 차지 않고, 남을 위해 비워 둔 따스한 여백. 오늘 나는 그 단어를 오래 바라본다. 여지, 내 안에 남겨 둔 한 뼘의 자리, 누군가 다가와 조용히 앉을 수 있는 공간. 그 자리가 있는 사람 곁에 서면 공기가 달라진다. 말이 부드러워지고, 침묵조차 평화롭다. 같은 말을 들어도 상처로 남지 않는 이유는 그 마음 안에 부드러운 여백이 있기 때문이다.

살다 보면 최선을 다하고도 인정받지 못하는 순간이 온다. 억울함이 목구멍까지 차오르고, 스스로의 가치를 의심하게 된다. 그러나 그럴 때일수록 마음을 들여다본다. 혹시 내 마음이 너무 가득 차, 타인이 들어올 자리가 없었던 건 아닐까. 여지란 상대를 위한 문틈이자, 나를 숨 쉬게 하는 환기구다. 꽉 닫힌 방에서는 향기로운 바람조차 들어오지 못한다.

세상은 내 뜻대로만 움직이지 않는다. 흐르는 강물처럼 사람의 마음도 굽이쳐야 한다. 다툼이나 오해가 생기면 본능은 앞서 달리려 하지만, 그때야말로 멈춤이 지혜다. 참는다는 건 감정을 눌러두는 일이 아니라, 관계가 다시 숨 쉴 시간을 주는 일이다.

인내는 불길 속에서도 피어나는 한 송이 연꽃과 같다.

한 번의 인내는 숨을 고르는 일이고,

두 번의 인내는 나를 비추는 일이며,

세 번의 인내는 관계를 다시 피워내는 일이다.

그 세 번의 인내 속에서 감정은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빛을 머금고 다시 피어난다.

화를 참지 못해 내뱉은 말은 유리 조각처럼 빛나지만, 그 끝은 늘 날카롭다. 반면 여지를 품은 말은 새벽 안개의 결을 닮았다. 상처를 내지 않고, 오히려 마음의 온도를 낮춘다. 두 손이 마주쳐야 소리가 나듯, 한쪽이 멈추면 소란은 그친다. 내가 한 발 물러설 때, 그 한 걸음이 누군가의 쉼터가 된다.

여지는 단순한 여유가 아니다. 그것은 마음의 기술이며, 인간관계의 미학이다. 허공이 있기에 하늘이 아름답고, 비워둔 강가가 있기에 물이 흐른다. 꽉 찬 삶은 단단하지만 숨이 막히고, 비워 둔 삶은 느슨하지만 오래 간다. 여지는 그 느슨함의 품격이다.

다짐한다.

들어줄 여지, 기다려줄 여지, 용서할 여지를 품은 사람으로 살겠다고.

그 여지 하나가 누군가의 쉼이 되고,

서먹한 관계의 다리가 되며,

세상의 온도를 조금 더 따뜻하게 바꿔줄 수 있으리라 믿는다.

여지는 약함이 아니다.

오히려 강함을 오래 쓰는 법이다.

남겨둔 자리에서 신뢰가 피어나고,

그 신뢰 위에서 인생이 자란다.

삶의 진정한 품격은 가득 채운 완성에 있지 않다.

언제나 누군가를 맞이할 수 있는 여백,

그 조용한 한 뼘의 빈자리 속에,

인간의 아름다움이 숨 쉬고 있다.

ㅡ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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