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

기억의 골목에서 피어난 시의 온기 — 배선옥 시인의 문학세계 ㅡ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평하다

기억의 골목에서 피어난 시의 온기 — 배선옥 시인의 문학세계 2025.10.21
기억의 골목에서 피어난 시의 온기  — 배선옥 시인의 문학세계

□ 배선옥 시인의 네 번째 시집

《초록 가시의 시간》

거기, 이제 너는 없고

ㅡ학익동 편지 8

시인 배선옥

자치기하는 사내애들 구경하며 하루 보

내던 내 구석기의 동굴 골목 어느 집 담

장 안에도 활짝 핀 꽃 따윈 없었고

은자네 집 앞 플라타너스가 부는 휘파람에선 멀리 쫓겨난 바다 사라진 길 찾으며 울었다

까치는 날마다 새 집을 짓고 낮은

추녀 끝 사람들 마당 내려다보며 으스됐지만 박카스 상자에 담긴 태아 장맛비에 휩쓸려와도 아무렇지도 않던 시절 넘어 아무나 출입금지라는 최첨단 아파트 어디쯤 이젠 등본에만 남은 내 유년의 배꼽

인천시 남구 학익1동 208번지 그리운 이름

모리포

배선옥 시인,

1997년 시문학으로 등단했다.

《회떠주는 여자》, 《오래전의 전화번호를 기억해내다》, 《오렌지 모텔》 세 권의 시집을 냈다. 여전히 낮에는 품위유지비를 벌러 다니는 사무원으로 밤에는 글쟁이의 삶을 산다.

그 사이사이 대학원에서 문예창작콘텐츠를 전공했다.

아직도 이런저런 공부를 손에서 내려놓지 못하고 있으며

덕분에 네 번째 시집 《초록 가시의 시간》을 세상에 내보인다.

기억의 골목에서 피어난 시의 온기

— 배선옥 시인의 문학세계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배선옥 시인은 침잠의 언어로 세계를 바라보는 작가이다. 그의 눈빛과 말투, 표정에는 격렬한 감정보다는 오래된 기억을 비추는 잔잔한 호수의 결이 배어 있다. 일상과 문학, 노동과 예술을 병행하며 살아온 그는 “품위유지비를 벌러 다니는 사무원”이라 자조하면서도, 그 삶의 틈새마다 시의 향기를 피워냈다. 배선옥의 시는 바로 그 틈, 생활의 피로 속에서 반짝이는 ‘사소한 존재의 온기’를 붙잡는다.

‘거기, 이제 너는 없고’는 그런 시인의 근원적 정서를 가장 잘 드러내는 작품이다. 학익동이라는 실제적 공간은 단순한 고향이 아니라, 상실과 그리움의 시간적 무늬가 겹겹이 쌓인 ‘내면의 지도’다. ‘자치기하던 아이들’, ‘담장 안에도 꽃 따윈 없던 골목’, ‘플라타너스의 휘파람’ 같은 구절들은 사라진 시절을 불러들이는 소리와 냄새, 감촉의 기억이다. 그곳에는 화려한 추억이 아니라, 비루하지만 따뜻했던 일상의 체취가 있다. 시인은 그리움을 미화하지 않고, 그대로의 허기를 받아들인다. 그것이 배선옥 시가 지닌 정직한 품격이다.

작품 속 ‘태아가 담긴 박카스 상자’나 ‘등본에만 남은 유년의 배꼽’은 사회적 풍경과 개인적 상처가 교차하는 강렬한 상징이다. 생명과 폐기, 탄생과 소멸이 한 공간에서 뒤섞이며, 시인은 그것을 외면하지 않는다. 외려 그 잔혹한 현실의 단면 속에서 존재의 본질적 외로움을 응시한다. 이때 그의 언어는 절규가 아니라 속삭임이다. 고통의 무게를 낮은 음성으로 노래함으로써, 시인은 슬픔을 감내하는 인간의 존엄을 드러낸다.

그의 시에는 언제나 ‘사라짐의 미학’이 흐른다. 화려한 언어 대신 낡은 지명, 익숙한 사물, 흔한 사람들의 풍경으로 감정의 온도를 전한다. 도시의 소음과 비정함 속에서도, 배선옥의 시는 여전히 사람 냄새가 난다. 이것은 그가 현실을 냉소로 바라보지 않고, 그 안의 인간을 여전히 사랑하기 때문이다.

문학 외에도 그는 유튜브 《시인 배선옥의 시詩담, 시時담ㅡ‘보이는 라디오’》를 통해 많은 시인들과의 대화를 이어가며 문학의 대중적 지평을 넓히고 있다. 그 겸손하고 따뜻한 태도는 시 속의 품성과 다르지 않다. 질문보다 경청이 많고, 주장보다 공감이 앞선다. 그의 목소리에는 “시란 결국 사람을 향한 언어”라는 믿음이 스며 있다.

배선옥 시인의 시 세계는 결국 ‘기억의 서정’이다. 지나간 것들을 애도하면서도 그것을 살아 있는 현재로 되살리는 힘, 그것이 그의 시의 생명력이다. 학익동 골목을 떠난 그는 이제 세상의 다른 도시들 속에서 여전히 그 골목의 아이로 살아간다. 그에게 시는 돌아갈 수 없는 곳을 향한 편지이며, 동시에 지금 이곳을 살아내기 위한 작은 불씨다.

따라서 배선옥 시인의 문학은 잊히는 존재들을 다시 불러내는 ‘소환의 미학’이다. 화려한 수사보다 진심이 앞서고, 절망보다 따뜻한 연민이 남는다.

세상은 변해도, 그의 시는 여전히 인간의 가장 깊은 곳에서 조용히 울린다 — “거기, 이제 너는 없고”라는 말 뒤에 남은 여백 속에서, 우리는 여전히 그의 숨결을 듣는다.

ㅡ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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