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의 온도, 그 미묘한 차이 ㅡ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우리말의 온도, 그 미묘한 차이 2025.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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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의 온도, 그 미묘한 차이
청람 김왕식
할배가 손주 녀석 손을 잡고 동네 목욕탕에 갔다.
낡은 간판에 김이 모락모락 서린 그 목욕탕,
늘 그렇듯 탕 안엔 동네 남정네들의 웃음소리와 물소리가 섞여 있었다.
할배는 입구에서 수건을 어깨에 걸치며 말했다.
“야야, 이 뜨거운 물에 들어가면 피가 확 돈다. 어이, 시원하다!”
손주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다.
‘시원하다면 좋다는 뜻이겠지.’
그리하여 콧잔등까지 김이 서린 얼굴로 냅다 탕에 뛰어들었다.
그 순간 —
“앗 뜨거워! 할배, 죽을 뻔했잖아!”
손주는 발을 동동 구르며 난리를 쳤다.
할배는 배를 잡고 웃었다.
“그게 시원한 거여, 인마. 진짜 뜨거워야 시원한 거여.”
이 장면 하나에 우리말의 비밀이 담겨 있다.
‘시원하다’는 단어는 뜨겁고 차가움의 경계를 자유로이 넘나든다.
한여름 땀을 빼고 나서 “아, 시원하다!”
한겨울 찬 바람 맞으며 “아, 시원하네!”
정반대의 온도에서 같은 말을 쓰는 건 우리뿐일 것이다.
왜 그럴까?
우리말의 ‘시원하다’는 단순히 물리적 감각이 아니라
막힘이 풀리고 가슴이 트이는 정서를 뜻한다.
뜨거워도, 차가워도, 속이 뚫리면 — 시원하다.
우리말은 언제나 이렇다.
논리보다 체험이 앞서고,
감정보다 느낌이 먼저다.
그래서 뜨겁고 차가움을 하나의 그릇에 담고,
기쁨과 슬픔을 한 단어에 포갠다.
‘아리다’에는 통증과 그리움이 함께 있고,
‘그립다’에는 눈물과 미소가 공존한다.
우리말은 늘 그 중간의 여백에서 살아 있다.
그 해학이 생활 속에 얼마나 스며 있는지는
‘쌀 팔러 간다’는 말에서도 드러난다.
겉으로 보면 ‘판매하러 간다’는 뜻 같지만,
사실상 ‘쌀을 사러 간다’는 말이다.
쌀을 파는 것은 상인이요,
우리는 그 상인을 찾아가는 것이니
결국 ‘쌀 팔러 간다’는 건
‘쌀 파는 사람에게 간다’는 줄인 말이다.
그 누구도 헷갈리지 않는다.
우리말의 맥락은 문법보다 넉넉하기 때문이다.
듣는 사람은 말의 결을 읽고,
화자는 굳이 설명하지 않는다.
그 사이에 흐르는 건 믿음이고,
그 믿음이 바로 언어의 정(情)이다.
이런 언어의 여유는 유머가 되고,
유머는 다시 삶의 품격이 된다.
할배가 “시원하다”고 웃을 때,
그 말은 단순한 감탄이 아니라
세상살이의 미묘한 온도를 품은 지혜였다.
말의 모순이 삶의 진실이 되는 것 —
그게 바로 우리말의 깊이다.
손주는 그날 이후로
‘뜨겁다’와 ‘시원하다’의 차이를 머리로가 아니라
몸으로 배웠다.
녀석은 중얼인다.
“우리 할배는 뜨거운 걸 시원하다 하고,
쌀 사러 갈 땐 쌀 팔러 간다 하셔.
근데 묘하게 다 맞는 말이야.”
그렇다.
우리말은 언제나 ‘맞는 말’이 된다.
온도도, 방향도, 심지어 뜻조차 흔들려도
결국 마음이 통하면 그것이 정답이다.
그래서 우리말은 논리가 아니라 온도이며,
규칙이 아니라 정서다.
뜨거운 물에 들어가 ‘시원하다’ 말하는 그 한마디 속에
천년의 언어감각이 살아 숨 쉰다.
그리하여 오늘도 누군가는
찜질방 문을 열며 이렇게 외친다.
“어이, 시원하다!”
그 말에는 언제나
뜨거운 인생의 미소가 함께 들어 있다.
ㅡ 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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