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

푸르름의 의지, 향기로 피어나는 기억 ― 안혜초 시 '풍란風蘭을 키우며'를 읽고ㅡ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평하다

푸르름의 의지, 향기로 피어나는 기억 ― 안혜초 시 '풍란風蘭을 키우며'를 읽고 2025.11.08
푸르름의 의지, 향기로 피어나는 기억 ― 안혜초 시 '풍란風蘭을 키우며'를 읽고

□ 민족지도자 민세 안재홍

風蘭을 키우며

ㅡ 6 ㆍ25에 납북되신

할아버님 民世 安在鴻을 추모하며

시인 안 혜 초

흙이 아니어든 돌밭이라도

돌밭이 아니어든 바윗돌 틈새에서라도

햇빛보다는 차라리

바람속에서

잎잎을 키워가며 꽃피워내는

질기디 질긴 목숨의

서귀포 風蘭 한 포기

건드리면 그 즉시 터져버릴 것 같은

여리디 여린

겉보기와는 달리

철사줄마냥 강파른

실핏줄 몇 가닥으로

그래도 믿음 그래도 소망

그래도 사랑의 꽃 한 송이

향그러이 피어내기 위해

마지막 숨결이 끊어지는

그 순간에까지

저 눈물겹도록 어기찬

푸르름에의 意志!

南과 北으로 굳어져가는

한 핏줄 다시 이어가려하는

이 나라 이 겨레의

恨맺힌 염원이리니

山 설고 江설은

북녘땅 어느 冬天아래

아직도 두 눈 흡뜨시며

잠못이루어하실

아드윽한 그 모습 그 목소리

할아버님 당신의 한 줌

시퍼러운 不歸의 넋!

□ 민족지도자 민세 안재홍의 손녀 안혜초 시인

푸르름의 의지, 향기로 피어나는 기억 ― 안혜초 시 ‘풍란風蘭을 키우며’를 읽고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안혜초 시인의 시 ‘풍란을 키우며’는 개인적 추모의 정서와 민족적 비원을 절묘하게 결합한 서정적 비문(悲文)이다.

시의 대상은 6·25전쟁 중 납북된 민족지도자 민세 안재홍(1891~1965)—그 거대한 이름의 뒤편에서 인간의 피붙이로 남은 손녀의 기억이자, 민족의 분단을 온몸으로 견디는 자의 절규이다.

시인은 울음으로 가지 않는다. 슬픔의 바닥을 정화시켜 향기로 피워 올리는 풍란의 형상 속에서 신념과 생명의 미학을 완성한다.

“흙이 아니어든 돌밭이라도 / 바윗돌 틈새에서라도”로 시작하는 시의 첫 행은 이미 인간 존재의 조건을 선언한다. 생존의 토양이 사라진 절망의 자리에서도 “잎잎을 키워가며 꽃피워내는” 풍란은 저항의 상징이자 불굴의 생명력이다. 시인은 풍란의 질긴 숨결을 통해 ‘살아 있음’의 의지를 복원하고, 그것을 신앙적 믿음과 소망, 그리고 사랑의 가치로 확장시킨다. 이 대목은 곧 안혜초 시인의 예술관—즉, 시는 절망을 정화하여 다시 피워내는 영혼의 생명체라는 신념을 드러낸다.

“건드리면 그 즉시 터져버릴 것 같은 여리디 여린 겉보기와는 달리 / 철사줄마냥 강파른 실핏줄 몇 가닥으로”라는 대비적 묘사는 인간 영혼의 구조를 닮았다. 겉은 연약하나, 그 내면에는 불굴의 정신이 흐른다. 시인은 이 상반된 결을 통해 ‘연약함 속의 강인함’이라는 미학을 창조한다. 풍란은 여성적 섬세함과 조국애의 강철 같은 의지를 동시에 품은 존재로 형상화된다. 그것은 곧 시인이 바라본 조부 안재홍의 정신이자, 그 정신을 이어받은 후손의 윤리적 자의식이다.

후반부로 갈수록 시는 개인의 그리움에서 민족의 한으로 확장된다.

“남과 북으로 굳어져가는 한 핏줄 다시 이어가려 하는 / 이 나라 이 겨레의 한 맺힌 염원”이라는 구절은, 조부의 ‘불귀의 넋’을 민족 전체의 상처로 승화시킨다. 시적 화자는 혈연의 기억을 넘어 역사의 증언자로 서 있으며, 그 고통의 역사를 생명의 시학으로 바꾸어 낸다. ‘북녘땅 어느 동천 아래’에서 여전히 깨어 있을 조부의 넋은, 곧 분단의 시대를 사는 모든 후손의 양심을 일깨우는 영혼으로 되살아난다.

시인 안혜초의 시 세계는 늘 존재의 존엄과 생명의 복권을 향한다. 그녀의 시는 비탄에서 꽃을 피우고, 결핍 속에서 의미를 일으킨다.

여기서 풍란은 단순한 추모의 상징이 아니라, 인간 정신의 본질을 향한 탐구이다.

그녀의 미학은 ‘슬픔을 미화하지 않고, 슬픔을 이겨냄으로써 거룩하게 만드는’ 절제의 미다. 감정은 눈물보다 향기로, 통곡보다 숨결로 표현된다. 그것이 안혜초 시인의 시를 고요하고 품격 있게 만드는 근원이다.

‘풍란을 키우며’는 조국의 상처와 가족의 비원을 품은 한 송이 시적 생명체다. 시인은 피의 역사와 돌의 침묵 속에서도 끝내 향기를 피워내는 ‘풍란의 정신’을 보여준다. 그것은 바로 ‘믿음, 소망, 사랑’이라는 인류 보편의 윤리이며, 또한 시인의 존재 이유이기도 하다.

요컨대, 이 시는 “끝내 꺾이지 않는 생명의 의지”에 대한 찬가이며, 문학이 어떻게 인간의 고통을 구원의 언어로 바꿀 수 있는지를 증명한 귀한 기록이다. 풍란의 향기처럼, 시인 안혜초 시의 세계는 고요하지만 깊게 스며들어—한 시대의 상처를 넘어선 인간 존엄의 시학으로 남는다.

ㅡ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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