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람 김왕식 시인의 '허리빛' ― 저물녘의 빛에서 발견한 인간학적 아름다움
청람 김왕식 시인의 '허리빛' ― 저물녘의 빛에서 발견한 인간학적 아름다움 2025.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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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리빛
청람 김왕식
해가 머리 위를 넘어
서쪽으로 기울어질 즈음 허리빛이 들판 전체를 부드럽게 감싼다
고요가 얇게 깔린다
허리빛 아래에서
풀잎의 결은 더 선명해지고 바람은 그 선명함을
살짝 스쳐
조용한 선율을 만든다
돌부리 사이에도
금빛 먼지가 스며들어
하루의 흔적을
은근히 밝혀주고
나무 그림자는 길어진다
허리빛은
하루가 저물어 간다는
부드러운 신호처럼
모든 사물 위에 내려앉아
마음을 천천히 식힌다
허리핓은
저물녘의 마지막 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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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리빛’
― 저물녘의 빛에서 발견한 인간학적 아름다움
문학평론가 변희자
청람 김왕식 시인의 시에서는 자연 묘사가 곧 삶의 철학으로 변환되는 순간이 자주 발견된다. ‘허리빛’ 역시 단순한 풍경 서정시가 아니다.
이 작품에서 시인은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지는 ‘허리빛’이라는 독창적 개념을 통해, 하루의 끝과 인간 존재의 심층을 교차시키며 시간과 감정의 미세한 떨림을 탐구한다. 시가 말하는 허리빛은 빛의 한 시각적 단계가 아니라, 마음의 온도를 낮추고 삶의 긴장과 번민을 진정시키는 정서적 완충 지대이다. 저녁이 하루의 끝이 아니라 마음이 한 번 더 다져지는 시간이라는 점에서, 이 시는 ‘퇴색’이 아니라 ‘정제’를 말한다.
첫 연에서 “해가 머리 위를 넘어 / 서쪽으로 기울어질 즈음”이라는 구절은 시간의 순환을 서두르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는 태도를 드러낸다.
김왕식 시인의 삶의 미학은 언제나 수용과 관조에 기반한다. 변화의 물결 앞에서 무엇도 억누르거나 부정하지 않는다. 빛이 지나간 자리에서 고요가 깔리고, 들판이 천천히 숨을 고르듯, 시인은 현실을 밀어내는 존재가 아니라 현실과 함께 숨을 맞추는 존재이다. 평생 타인을 세우고 길러온 교육·문학 활동과 맞닿아 있는 미학이기도 하다.
둘째 연에서는 “풀잎의 결은 더 선명해지고 / 바람은 그 선명함을 스쳐 조용한 선율을 만든다”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눈에 띄는 핵심은 한 번도 목소리를 키우지 않는 언어다. 감정의 과장은 없고, 서정의 압력도 없다. 그러나 독자는 강렬한 울림을 받는다. 이는 김왕식 시학의 중심인 ‘절제된 감정의 깊이’ 때문이다. 그는 슬픔을 울부짖지 않고, 기쁨을 과시하지 않으며, 자연이 스스로 말하게 한다. 감정과 자연이 겹칠 때 독자는 삶의 진동을 체험한다.
셋째 연에서 “금빛 먼지 / 하루의 흔적 / 나무 그림자”라는 이미지들은 사라짐의 미학을 보여준다. 생의 무게를 끌어안고서도 결코 비관으로 흐르지 않는 그의 세계관이 나타난다. 지나간 것은 상실이 아니라 흔적이며, 흔적은 고통이 아니라 살아온 삶의 증거라는 해석이 시 속에 은근하게 배어 있다. 이러한 인식은 시인의 오랜 삶의 경험, 수많은 만남과 이별, 교육자로서의 기억, 문학 공동체를 지켜온 세월이 서정적으로 응축된 결과일 것이다.
넷째 연과 마지막 연에 이르면 작품의 철학은 명확하다. 허리빛이 “하루가 저물어 간다는 부드러운 신호”가 되고, “마음을 천천히 식히는” 작용을 한다. 저물녘을 애도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태도, 이것이 김왕식 시인의 삶의 윤리다. 인간이 지닌 수많은 불안과 상처는 빛처럼 환히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바람처럼 흘려보내고 다시 고요 속으로 놓아두어야 한다는 미의식이 담겨 있다. 마지막 행 “허리빛은 저물녘의 마지막 숨이다”는 종결이 아니라 쉼을 의미한다. 하루의 마지막 숨이 곧 다음날의 첫 숨을 예비한다는 순환의 철학이 작품 전체를 관통한다.
결국 ‘허리빛’은 저녁 풍경을 빌어 인간의 생을 관조하는 깊은 인문학적 시이다. 빠르게 소진되는 시대에서 시인은 속도를 거부하고, 소멸의 순간에서 정서를 되살린다. 시간의 흐름에 상처받지 않기 위해 서두르는 것이 아니라, 시간 속에 머무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다.
이 작품은 김왕식 시인이 오래 걸어온 고요함의 윤리, 겸손한 시학, 인간에 대한 믿음을 가장 투명하게 보여준다. 독자들은 그 허리빛 아래에서, 자신의 마음도 조금은 식어가고 평온해짐을 경험하게 된다.
문학의 역할이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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