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찰

콩처럼 살다 간 사람을 위한 단정한 헌사 — 김정희 시인의 애도글을 읽고 ㅡ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콩처럼 살다 간 사람을 위한 단정한 헌사 — 김정희 시인의 애도글을 읽고 2025.11.27
콩처럼 살다 간 사람을 위한 단정한 헌사 — 김정희 시인의 애도글을 읽고

콩독립군 함정희

시인 김정희

그제부터 함정희대표에게 전화를 했다.

핸드폰 번호는 울린다.

작년 노벨상을 받은 한강작가 잔치를 명륜성곽마을 주민들 음식을

함정희 대표가 거의 다 해왔다

전주에서 서울 명륜성곽마을

앵커시설로 3개월 12월까지

함정희대표는 우리나라 콩

으로 쥐눈이콩 마늘 청국장환을

만들어 다시 일어나려 했다

눈물이 나서

두만강의 두는 콩두다

오늘도 전화가 되지 않아

주변 인물들 전화를 했다

받는다.

“모르셨어요?”

“뭘요?”

3개월 전에 심장마비로

하늘나라로 소풍을 떠나셨다는

말에 가슴이

쿵하고 내려 앉는디

콩처럼 살다 간 사람을 위한 단정한 헌사

— 김정희 시인의 애도글을 읽고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한 편의 시가 때로는 완벽한 언어가 아니라, 가슴에서 먼저 움직이는 떨림으로 시작되듯, 김정희 시인의 애도글은 문장보다 마음이 먼저 다가온다. 글의 시작은 다만 전화를 걸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그제부터 함정희 대표에게 전화를 했다.”라는 짧은 문장에서 이미 시인은 무언가 감지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전화를 받지 않는 번호, 울리기만 하는 신호음, 연결되지 않는 응답 속에, 우리는 ‘부재’의 그림자를 조금씩 짐작하게 된다.

끝내 전해 듣게 된 소식은, 심장마비로 하늘나라에 먼저 도착했다는 한 마디였다. “가슴이 쿵하고 내려앉는다”는 표현은 이 글에서 유일한 감정의 고백이며, 그 짧은 문장 하나에 놀람과 슬픔, 상실과 불신이 함께 담겨 있다.

이 글은 단지 한 사람의 죽음을 전하는 소식이 아니다. 그것은 한 생애의 궤적을 고요히 더듬는 추모의 기록이며, 진심과 존경이 만들어낸 단정한 헌사다. 시인은 그 사람을 ‘두만강의 두는 콩두’라 부른다. 이 말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다. ‘두만강’이라는 지리적 이름 안에는 민족의 경계가 있고, ‘콩두’라는 방언 속에는 삶의 본질과 고집이 있다. 함정희 박사가 평생 일관되게 지켜온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 땅에서 나는 국산콩을 살리는 일이었다. 농민의 품으로, 국민의 밥상으로, 콩 하나의 생명을 온몸으로 지켜낸 사람. 그것은 생계가 아니라 사명이었고, 고집이 아니라 신념이었다.

김정희 시인은 그 사실을 안다. 두 사람은 단순한 만남을 넘어, 신뢰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밭을 함께 갈아온 관계였다. 작년 한강 작가잔치에서, 명륜성곽마을에 전주에서 직접 올라와 음식을 마련해 준 사람. 그 수고로움을 기꺼이 감당했던 사람. 그런데 그 사람이, 단 한 번 인사 없이, 소풍 가듯 떠나버린 것이다. 시인은 그 소식을 누구보다 늦게 듣는다.

이 글에는 자책이 없다. 대신 담담한 애도만이 남는다. 울부짖지 않음이 오히려 더 깊은 울림을 만든다.

죽음을 소풍이라 말하는 품격, 그것은 살아온 생이 그 말에 어울릴 만큼 조용하고도 치열했기 때문일 것이다. 글 어디에도 과장된 말은 없다.

우리는 안다.

이 글 안에 눈물이 있다. 그 눈물은 슬픔에서 나는 것이 아니라, 감사를 품은 회상의 끝에서 맺힌 것임을.

콩은 말이 없다. 땅속에서 묵묵히 자라고, 마침내 제 시기가 되면 고요하게 익는다. 함정희 박사의 삶도 그랬다. 시끄럽지 않았고, 드러내려 하지 않았다.

누군가는 알아주었다. 김정희 시인은 그런 사람이다. 그는 콩처럼 살다 간 사람의 이름을 마지막까지 따뜻하게 붙들고 있다.

문학은 그렇게 한 사람을 기억하는 일에서 시작된다. 그 기억이 진실할 때, 그 글은 이미 시가 된다. 이 애도문은 시인의 시보다 더 시답다. ‘진심’은 언제나 문장을 넘어가기 때문이다.

ㅡ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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