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

가을의 벗김 속에 깃든 자비의 마음학 — 여익구 시인의 시 '가을 애상哀傷'을 읽고 ㅡ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평하다

가을의 벗김 속에 깃든 자비의 마음학 — 여익구 시인의 시 '가을 애상哀傷'을 읽고 2025.12.04
가을의 벗김 속에 깃든 자비의 마음학 — 여익구 시인의 시 '가을 애상哀傷'을 읽고

가을 애상哀傷

시인 여익구

슬금슬금 불개미 산을 넘어오며 하나하나 옷을 갈아 입으니

산호섬으로 타오른다

그래 오늘은 알록달록 가을만 보자

스멀스멀 안개 걷힌 소양강

잔잔히 피어오르는 안개꽃

새털구름 사이로 쏟아지는 부채춤 햇살 오늘은 눈감고 가을 햇살만 바라보자

조만간 입동이 물감 개어 싸 들고 가면 스산한 바람에 하나하나 옷들을 벗어 앙상한 가지만 보이면

목도리를 둘러줘야겠다

가을의 벗김 속에 깃든 자비의 마음학

— 여익구 시인의 ‘가을 애상哀傷’을 읽고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여익구 시인의 시를 읽다 보면, 자연을 바라보는 것이 곧 사람을 바라보는 일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그의 작품은 언제나 외부의 풍경을 통해 내면의 풍경을 길어 올리며, 작은 이미지 하나에도 따뜻한 마음결을 묻어난다.

시 ‘가을 애상’은 이런 시인의 미의식이 가장 단정하고 아름답게 드러난 작품으로, 가을이라는 계절을 빌려 벗어짐의 의미와 사랑의 본질을 조용히 드러낸다.

시의 첫 구절에서 시인은 “불개미 산을 넘어오며 옷을 갈아입는 산”이라는 인상적인 문장을 배치한다. 이는 자연을 단순한 색채의 변화로 보지 않고, 천천히 변모해가는 생명의 고요한 운동으로 바라보는 시인의 시선이다. 가을의 알록달록한 색채는 화려함의 결과가 아니라, 오랜 시간을 견디며 성숙해온 존재의 흔적이다. 여익구 시인이 평생 품어온 신앙적 겸허함과도 닿아 있는 지점이다. 변화를 두려움이 아닌 은총의 시간으로 받아들이는 태도는 작품 전체에 잔잔한 빛을 드리운다.

중반부의 소양강 장면은 이 시의 또 다른 미학적 중심이 된다. 시인은 안개를 ‘안개꽃’으로 부른다. 희미함을 덜어내는 것이 아니라, 희미함 자체를 꽃처럼 바라보는 관조의 미학이다. 흐릿함 속에서 피어나는 생명의 기미, 닿을 듯 닿지 않는 경계의 아름다움. 여익구 시인의 시에는 늘 이런 은은한 영성靈性이 있다.

부채춤처럼 흩뿌려지는 햇살 또한 단순한 묘사가 아니라, 세상 곳곳에 내려오는 작은 위로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이 시의 깊은 울림은 후반부에서 비로소 완성된다. “스산한 바람에 앙상한 가지만 보이면 목도리를 둘러줘야겠다”는 구절은, 가을의 쓸쓸함을 바라보면서도 그 쓸쓸함을 돌봄의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시인의 태도를 보여준다. 자연을 향한 이 부드러운 시선은 시인이 현재 사회복지학을 연구하며, 다른 존재의 상처와 약함을 외면하지 않는 삶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그는 노쇠와 추위, 상실과 공백을 비극으로 말하지 않는다.

대신 누군가의 어깨에 목도리를 둘러주듯, 세상에 조용히 얹는 위로의 손길로 표현한다.

여익구 시인의 시학은 과장이나 큰 목소리를 모른다. 대신 작은 풍경에서 의미를 이끌고, 일상의 미세한 떨림 속에서 삶의 가르침을 발견한다. ‘오늘은 가을만 보자’, ‘가을 햇살만 바라보자’와 같은 단정한 문장은, 하루의 순간을 귀하게 받아들이는 시인의 태도를 그대로 비춘다. 그의 시는 복잡한 사유를 펼치기보다, 맑은 시선 하나로 세계를 새롭게 열어준다.

특히 “앙상한 가지에 목도리를 둘러준다”는 마지막 장면은 이 시가 단순한 계절 노래가 아님을 증명한다. 가을의 벗어짐을 연민이나 애상으로만 보지 않고, 사랑이 개입하는 순간으로 전환한다. 자연이 옷을 벗는 것은 끝이 아니라, 다시 시작되기 위한 준비이며, 그 과정 전체가 생명에게 필요한 순환이다. 그 순환을 바라보는 시인의 마음에는, 존재를 향한 조용한 기도와 같은 따뜻함이 스며 있다.

요컨대, ‘가을 애상’은 ‘애상哀傷’이라는 제목과 달리 슬픔을 말하는 시가 아니다.

외려 슬픔을 사랑으로 건너가는 법을 보여주는 시이다. 떨어짐과 벗어냄 속에서도, 소멸이 아닌 회복을 읽어내는 시인의 깊은 마음이 작품 전체에 흐른다. 여익구 시인은 가을의 풍경을 빌려 말한다. 모든 존재는 스스로 견디는 것 같아도, 누군가의 따뜻한 숨결이 닿을 때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라고.

이처럼 여익구 시인의 가을은 계절을 넘어 마음의 계절이 된다. 바라보는 이의 마음이 따뜻하면, 앙상한 가지도 목도리 하나 둘러주는 사랑의 대상이 된다. 그의 시는 결국 한 문장으로 귀결된다.

가을의 애상조차 사랑을 배우는 시간이 된다.

ㅡ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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