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찰

헌신을 입은 사람, 이림李林 디자이너 ㅡ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헌신을 입은 사람, 이림李林 디자이너 2025.12.13
헌신을 입은 사람, 이림李林 디자이너

□ 이림 선생님

□ 이림 선생님과 그의 따님 이진화 디자이너

□ 청담동 이림 아트하우스

헌신을 입은 사람, 이림李林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그는

처음부터

자기 발로 세상을 딛고 서 있던 사람이 아니었다

세상은 그를

늘 누군가의 등에 올려놓았다

그 등은 말이 없었고

말이 없었기에

더 오래 흔들리지 않았다

어머니의 등은

밤이 깊어질수록

점점 낮아졌다

숨이 가빠질수록

더 낮아져

아이를 떨어뜨리지 않으려

산처럼 엎드렸다

아버지의 등은

논두렁을 건널 때마다

땅보다 단단해졌다

땅이 무너질까

아이가 먼저 무너질까

그는 늘

아이 쪽을 택했다

몸이 먼저 아팠던 아이

밤마다 경련이

별처럼 터지던 아이

어둠이 오면

숨이 먼저 흔들렸고

숨이 흔들리면

집 안의 모든 발걸음이

함께 깨어났다

불을 켜는 손

약을 찾는 손

아이를 안아 올리는 손

그 집에는

잠이라는 말이 없었다

대신

지켜봄이라는 밤이

매일같이 길게 누워 있었다

그 아이의 이름은

처음엔 ‘생生’을 안고 있었다

이생림李生林

살아 있으라는

기도가 그대로 이름이 된 경우였다

사람들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름이 너무 크다고

몸이 그 생을

아직 감당하지 못할 것 같다고

그래서

그는

‘생生’을 내려놓았다

살아 있음의 글자를 떼어내고

대신

살아내겠다는 결심만

가슴 깊이 남겼다

그날 이후

그의 이름은

이림이 되었다

림林

나무들이

서로 기대지 않으면

바람을 견딜 수 없는 자리

아버지는

그 아이를 업고

시제 길을 걸었다

계룡산 자락

논과 밭이 끊임없이 이어지던 길

아버지는

발걸음을 멈추고

아이의 귀에

낮게 말했다

“이 논밭을

네 몸과 바꿨다”

그 말에는

후회도

망설임도 없었다

한 생명을 살리기 위해

세상의 넓이를

조용히 접어버린

한 가장의 결정이었다

밤마다

아이의 몸이 흔들리면

어머니는

신발도 제대로 신지 못한 채

아이를 안고

병원으로 달렸다

도립병원 가까이 살아야 한다는 말은

편의를 위한 선택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늘 밤을 넘기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었다

아버지는

땅을 소작인들에게 내주었다

농부의 삶을 내려놓았다

그 시절

시대는 지주에게

땅을 직접 일구라 명령했지만

아버지는

땅보다

아이의 숨을 선택했다

그렇게

이림의 어린 시절은

헌신으로 지어진 집 안에서

조용히 자라났다

학교에 가면

또 다른 등이 기다리고 있었다

영화관

어둠 속에서

스크린이 너무 높아 보이던 날

한 선생님은

아무 말 없이

아이를 무릎 위에 앉혔다

아이의 눈높이를

세상 쪽으로 올려주던 손

그 손의 온도는

이림의 기억 속에서

지금도

식지 않는다

선생님들은

그를

학생이 아니라

자식처럼 여겼다

어머니의 기도가

교실까지 따라와

아이를 감싸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월이 흘러

뉴욕의 거리에서

이림은

스웨터 한 벌을 샀다

그것은

옷이 아니었다

어릴 적

무릎의 기억을

다시 덮어 씌우는 일이었다

선생님은

그 스웨터를 안고

한참을 웃었다

그 웃음 속에는

잘 자란 제자를 보는 기쁨과

아직도 품 안에서

내려놓지 못한

아이의 그림자가

함께 있었다

만날 때마다

선생님은

구겨진 만 원짜리를

주머니에 넣어주었다

돈은 작았지만

마음은 늘 넘쳤다

이림은

사람의 연민이

시간을 얼마나 오래 건너오는지

그때마다

조용히 배웠다

미술 수업이 좋았던 아이

선생님들은

늘 그를 감싸 안았다

당시

껄렁거리던 아이들마저

그 앞에서는

목소리를 낮췄다

아픈 몸은

이상하게도

사람의 마음을

곧게 만들었다

사십 년이 흐른 동창회

기침을 하자

한 친구가 말했다

“이선생

자네 같은 친구 만나려

사십 년이 걸렸네”

그 말은

인연의 무게였다

그 친구의 아내는

이림의 옷을 입고

“행복하다”고 말했다

그 순간

이림은 알았다

옷은

몸을 덮는 물건이 아니라

사람의 삶을

다시 존중하게 만드는

조용한 의식이라는 것을

시간은 다시

한 선생님 앞으로

그를 데려갔다

큰 짐 자전거에

아이를 태워

소풍을 가주던

이봉환 선생님

이제는

교육감의 자리에 있었지만

그의 눈은

여전히

아이를 내려다보던

그 시절의 눈이었다

고등학생 이림은

용기를 꺼내

문을 두드렸다

누나의 복직

가족의 생계

선생님은

원칙을 말했다

그리고

문밖까지 배웅했다

아무 말 없이

오래 바라보았다

그 다음 해

누나는

복직되었다

그때

이림은

모든 것을 이해했다

말하지 않는 도움

드러내지 않는 헌신

그리고

그 모든 판단의 밑바닥에는

언제나

어머니가 있었다는 것을

이제

오지윤 화백의 그림 앞에서

이림은

불편한 몸으로

사람들을 맞는다

눈빛은

맑고

손은

오래 잡아도

먼저 놓지 않는다

그는

오트쿠튀르의 외길을

오십 년 걸어왔다

유행보다

사람을 먼저 보고

화려함보다

품위를 먼저 다린 시간

그가 만드는 옷에는

버려진 논의 냄새와

영화관의 어둠과

병원 복도의 새벽과

선생님의 무릎과

어머니의 숨결이

겹겹이 들어 있다

하여

그의 옷은

새것처럼 빛나지 않아도

사람을

사람답게 만든다

그는

헌신을 입고

오늘도

조용히

인간의 품위를 재단한다

말없이

오래

사람의 손을 잡으며

ㅡ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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