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콩과 인생 ㅡ청람 김왕식
땅콩과 인생 2025.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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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콩과 인생
김왕식
땅콩의 탄생을 바라보고 있으면, 인생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묻게 된다. 우리는 흔히 삶의 결실이 햇빛 아래에서 맺힌다고 믿는다. 사람들이 보는 자리, 인정과 박수가 쏟아지는 무대 위에서만 인생의 열매가 익는다고 생각한다.
땅콩은 그 믿음을 조용히 뒤집는다. 꽃이 피고 수정이 이루어진 뒤, 땅콩은 하늘을 향해 자라지 않는다. 외려 스스로 고개를 숙여 어둠을 향해 내려간다.
땅콩의 줄기는 뿌리가 아니다. 그 줄기는 열매가 되기 위해 스스로를 낮추는 결단이다. 꽃이 졌다는 사실은 끝이 아니라, 시작의 신호다. 인생 또한 그렇다. 사람 앞에서 빛나던 시간이 끝났다고 느껴질 때, 모든 것이 사라졌다고 생각되는 순간에 진짜 성장은 시작된다. 인생의 중요한 변화는 늘 ‘지고 난 뒤’에 찾아온다.
땅콩은 흙 속으로 충분히 들어가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 얕은 땅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것은 인생이 요구하는 깊이와 닮아 있다. 고통과 침묵, 오해와 기다림이라는 깊이를 통과하지 않은 삶은 쉽게 열매를 말할 수 없다. 화분처럼 얕은 환경에서는 땅콩이 자랄 수 없듯, 얕은 인내와 얕은 사유 속에서는 삶의 열매가 성숙하지 않는다.
땅콩이 지표면 바로 아래, 가장 낮은 자리에서 몸을 키운다는 사실은 더 큰 은유다. 인생의 결실은 높은 자리가 아니라 낮은 자리에서 맺힌다. 드러내지 않는 수고, 알아주지 않는 헌신, 기록되지 않는 시간들이 모여 비로소 하나의 열매가 된다. 땅콩이 스스로를 숨기듯, 사람의 삶도 가장 중요한 순간을 말없이 지나간다.
씨방 하나에 두 알을 품는 모습은 인생의 또 다른 진실을 보여준다. 한 사람의 삶 안에는 언제나 둘 이상의 의미가 공존한다. 성공과 실패, 기쁨과 상처, 강함과 연약함이 한 껍질 안에 함께 들어 있다. 때로는 하나만 남고, 때로는 셋이 들어차기도 하지만, 그 불균형 속에서도 삶은 제 방식대로 완성된다.
땅콩은 자신이 어떻게 자라고 있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흙 속에서 조용히 자신의 시간을 견딜 뿐이다. 인생도 그러하다. 진짜 성장은 설명되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이루어진다. 꽃이 지고 난 뒤, 아무도 보지 않는 흙 속에서 삶은 비로소 단단해진다.
어느 날, 누군가의 손에 들려 세상으로 나올 때, 우리는 그제야 깨닫는다. 가장 기묘한 기적은 언제나 낮은 곳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ㅡ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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