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의 <간> ㅡ간을 내어놓은 자의 윤리, 끝까지 침전하는 양심 ㅡ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윤동주의 <간> ㅡ간을 내어놓은 자의 윤리, 끝까지 침전하는 양심 2025.12.15
□ 프로메테우스 신화

■
간
윤동주
바닷가 햇빛 바른 바위 위에
습한 간을 펴서 말리우자.
코카서스 산중에서 도망해 온 토끼처럼
둘러리를 빙빙 돌며 간을 지키자.
내가 오래 기르는 여윈 독수리야!
와서 뜯어 먹어라, 시름없이
너는 살찌고 나는 여위어야지,
그러나
거북이야
다시는 용궁의 유혹에 안 떨어진다.
프로메테우스 불쌍한 프로메테우스
불 도적한 죄로 목에 맷돌을 달고
끝없이 침전하는 프로메테우스
■
윤동주의 <간>
ㅡ간을 내어놓은 자의 윤리, 끝까지 침전하는 양심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윤동주의 <간>은 그의 시 가운데 가장 신화적이며, 동시에 가장 노골적인 자기희생의 윤리 선언이다.
이 시에서 간은 신체의 일부가 아니라, 시인이 스스로 꺼내어 세상 앞에 내놓은 양심의 실체다. 그는 자신의 간을 바닷가 햇빛 바른 바위 위에 펼쳐 말리자고 말한다. 숨기지 않고, 보호하지 않고, 햇빛 아래 그대로 노출한다. 이것은 고백이 아니라 결단이다.
“습한 간”이라는 표현은 중요하다. 윤동주의 간은 아직 상처 입고, 아직 살아 있다. 그는 이미 상처 난 윤리를 더 건조한 세계로 끌어내어, 썩지 않게 하려 한다. 그래서 토끼처럼 둘러리를 돌며 간을 지킨다. 여기서 토끼는 두려움의 상징이 아니라, 끝까지 책임을 지는 감시자다. 윤동주는 자신의 양심을 세상에 내놓되, 그것이 아무렇게나 훼손되는 것은 끝까지 지켜본다.
이후 등장하는 독수리는 가해자이자 세계 그 자체다.
“와서 뜯어 먹어라, 시름없이.”
이 문장은 체념이 아니라 선택이다. 윤동주는 말한다.
너는 살찌고, 나는 여위어야 한다고.
이는 식민지 지식인의 비극적 구조를 정확히 인식한 고백이다.
세계는 시인의 윤리를 먹고 성장하지만,
시인은 점점 말라간다.
그러나 여기서 시는 멈추지 않는다.
“거북이야 / 다시는 용궁의 유혹에 안 떨어진다.”
거북이는 신화 속에서 유혹에 넘어가 진실을 배반한 존재다.
윤동주는 이 장면에서 타협의 유혹을 단호히 거부한다.
살기 위해 양심을 팔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마지막에 등장하는 프로메테우스는 윤동주 자신의 또 다른 얼굴이다.
불을 훔쳐 인간에게 준 죄로
끝없이 벌을 받는 존재.
윤동주는 이 신화를 차용하면서도 영웅화하지 않는다.
“불쌍한 프로메테우스”라고 부른다.
그는 영웅의 고통을 찬양하지 않고,
그 고통의 지속성을 바라본다.
“끝없이 침전하는 프로메테우스.”
침전은 가라앉음이지만 소멸이 아니다.
윤동주는 끝내 사라지지 않고,
가장 낮은 자리에서 양심을 가라앉힌다.
이 시에서 윤동주는 말한다.
자신의 간이 뜯겨나갈 것을 알면서도,
다시는 용궁의 유혹에 떨어지지 않겠다고.
그것이 그가 선택한 시인의 길이며,
윤동주가 끝내 지키고자 했던 윤리의 최저선이다.
■ 오산학교 제자 달삼과 청람의 대화
― 달삼과 청람, 왜 윤동주는 신화를 불러왔는가
달삼은 시집을 덮지 못한 채 한참을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선생님, 한 가지가 계속 마음에 걸려요.”
청람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윤동주는 왜 굳이 프로메테우스 신화랑
토끼 설화를 함께 끌어왔을까요?
자기 고통만 말해도 충분했을 텐데요.”
청람은 잠시 시선을 낮추었다가 천천히 말했다.
“달삼아, 아주 중요한 질문을 했구나.
윤동주는 자기 고통을 ‘개인사’로 남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개인사가 아니라요?”
“그래.
그는 자기 괴로움이
우연히 한 시인에게만 닥친 불행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반복되어 온 윤리의 형벌임을 알고 있었다.”
달삼은 곧바로 이어 물었다.
“그래서 프로메테우스인가요?”
“그렇다.
프로메테우스는 불을 훔쳐 인간에게 주었다.
즉, 진실과 빛을 가져온 존재다.
윤동주는 시인이 그런 존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시인은 언제나 벌을 받는다.”
달삼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다시 물었다.
“그런데 선생님,
프로메테우스는 힘 있는 신이잖아요.
윤동주는 너무 약한데요.”
청람의 입가에 미세한 웃음이 스쳤다.
“그래서 토끼를 함께 불러온 거다.”
“아… 토끼요.”
“토끼는 약자다.
도망치고, 떨고, 둘러리를 돌며 간을 지키는 존재다.
윤동주는 자신을
전능한 신이 아니라
언제든 잡아먹힐 수 있는 토끼로 보았다.”
달삼은 천천히 말했다.
“그러면 윤동주는
서양의 신화적 형벌과
동양의 약자 설화를
자기 몸 위에 포개 놓은 거군요.”
청람은 고개를 깊게 끄덕였다.
“정확하다.
윤동주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던 거다.
‘시인의 고통은 어느 문화, 어느 시대에서도
같은 방식으로 반복된다.’
그래서 그는
프로메테우스의 간과
토끼의 간을
자기 간으로 겹쳐 놓은 거다.”
달삼은 ‘거북이야’ 부분을 다시 읽으며 물었다.
“그럼 ‘거북이야 다시는 용궁의 유혹에 안 떨어진다’는 건요?”
청람의 목소리가 단단해졌다.
“그건 윤동주의 결별 선언이다.
토끼 설화에는
살기 위해 거짓말하는 길도 있다.
하지만 윤동주는 그 길을 택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살기보다… 진실을 택하겠다는 거네요.”
“그래.
그래서 이 시는 신화를 빌렸지만,
결국은 아주 현실적인 선택의 기록이다.”
달삼은 마지막 구절을 낮게 읽었다.
“‘끝없이 침전하는 프로메테우스’…”
청람은 조용히 덧붙였다.
“윤동주는 하늘로 오르는 영웅을 원하지 않았다.
가라앉더라도
양심이 남는 쪽을 택했다.
그게 그가 신화를 부른 이유다.”
달삼은 한참을 생각하다 말했다.
“선생님,
그러면 이 시는
신화를 말하는 시가 아니라…”
청람이 말을 이었다.
“그래.
신화를 통해 ‘시인이 왜 벌받는 존재인가’를 설명한 시다.”
달삼은 시집을 천천히 덮으며 말했다.
“이제 알겠어요.
윤동주는 왜 그렇게 조용했는지.”
청람은 낮게 말했다.
“조용한 게 아니라,
이미 너무 깊은 이야기 속에 있었던 거다.”
ㅡ청람

댓글
로그인 없이 바로 남길 수 있습니다. 나중에 본인이 수정·삭제하려면 이 댓글의 비밀번호를 정해 주세요. 서로 예의를 지켜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