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 시 <귀뚜라미와 나와> ― 말하지 않기로 한 약속, 가장 깊은 고백의 형식 ㅡ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평하다
윤동주 시 <귀뚜라미와 나와> ― 말하지 않기로 한 약속, 가장 깊은 고백의 형식 2025.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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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뚜라미와 나와
윤동주
귀뚜라미와 나와
잔디밭에서 이야기했다.
귀뜰귀뜰
귀뜰귀뜰
아무에게도 알으켜 주지 말고
우리 둘만 알자고 약속했다.
귀뜰귀뜰
귀뜰귀뜰
귀뚜라미와 나와
달 밝은 밤에 이야기했다.
■ 청람 시평
윤동주 시 <귀뚜라미와 나와>
― 말하지 않기로 한 약속, 가장 깊은 고백의 형식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윤동주의 <귀뚜라미와 나와>는 말이 거의 없는 시다. 이 침묵의 시는 윤동주 작품 가운데 가장 정직한 고백을 담고 있다. 이 시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을 말했는가’가 아니라, 왜 말하지 않기로 했는가다. 시는 시작부터 끝까지 고요하다. 귀뚜라미와 시인은 잔디밭에서 이야기하고, 달 밝은 밤에 다시 이야기한다. 그 내용은 끝내 드러나지 않는다.
귀뚜라미는 윤동주 시 세계에서 매우 특별한 존재다. 그것은 자연의 소리이자, 인간 언어가 닿지 않는 영역의 발화다. ‘귀뜰귀뜰’이라는 의성어는 의미를 전달하지 않는다. 대신 리듬과 떨림만을 남긴다. 이 소리는 설명이 아니라 공명이다. 귀뚜라미의 말은 해석될 수 없기에 외려 더 진실하다.
시인은 귀뚜라미와 약속한다.
“아무에게도 알으켜 주지 말고 / 우리 둘만 알자고.”
이 약속은 단순한 비밀 놀이가 아니다. 그것은 시대에 대한 윤리적 태도다. 윤동주는 자신의 진실을 언제나 모두에게 말할 수 없었다. 말하는 순간 왜곡되고, 고백하는 순간 위험해지는 시대였다. 그는 자연과만 공유할 수 있는 비밀의 언어를 선택한다.
이 시에는 슬픔도, 분노도, 절망도 노골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침묵은 비어 있지 않다.
이 시는 ‘말해지지 못한 것들’로 가득 차 있다. 윤동주는 말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진실을 가장 안전한 곳에 보관한다. 그 보관함이 바로 귀뚜라미의 울음이고, 달 밝은 밤이다.
<귀뚜라미와 나와>는 작고 단순한 시처럼 보이지만, 윤동주 시 세계의 한 핵심을 보여준다. 그는 언제나 말보다 약속을, 설명보다 침묵을 신뢰한 시인이었다. 이 시에서 윤동주는 자연과 동맹을 맺는다. 인간 사회가 지켜주지 못한 진실을, 자연의 어둠과 소리 속에 맡겨두기 위해서다.
그래서 이 시는 동요처럼 맑지만, 그 밑바닥에는 아주 단단한 결심이 흐른다.
말하지 않음으로써 지켜내는 진실.
그것이 윤동주가 선택한 가장 조용한 저항의 방식이다.
■ 오산학교 제자 달삼과 문예교사 청람의 대화
― 달삼과 청람, “왜 그들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을까”
달삼은 시를 다 읽고 잠시 웃었다.
“선생님, 이 시는 되게 귀엽네요.
귀뚜라미랑 이야기하다니요.”
청람도 미소를 지었지만, 이내 조용히 말했다.
“귀엽기만 한 시는 아니다, 달삼아.
이 시는 아주 무서운 시이기도 하다.”
“무서워요?
아무 일도 안 일어나는데요?”
청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무섭다.
윤동주는 일부러 아무 말도 남기지 않았다.”
달삼은 ‘우리 둘만 알자’라는 구절을 가리켰다.
“왜 하필 귀뚜라미일까요?
사람이 아니라요.”
“사람에게 말하면 기록이 된다.
기록은 검열이 되고,
검열은 왜곡이 된다.
귀뚜라미는 그런 위험이 없다.”
달삼은 잠시 생각하다 물었다.
“그럼 윤동주는
자기 진실을 사람에게 말하지 못했던 건가요?”
청람은 낮게 대답했다.
“말하지 못한 게 아니라,
말하지 않기로 선택한 것이다.”
“선택이요?”
“그래.
윤동주는 알았다.
모든 진실은 공개될수록 훼손된다는 걸.
그래서 그는
자연과만 공유하는 방식을 택했다.”
달삼은 ‘귀뜰귀뜰’이라는 소리를 소리 내 읽어 보았다.
“이 소리는 뜻이 없잖아요.”
“그래서 좋다.
뜻이 없으니 오해도 없다.
윤동주는 의미보다
공명을 믿었다.”
달삼은 달 밝은 밤이라는 표현을 다시 보며 말했다.
“왜 꼭 달 밝은 밤일까요?”
청람은 천천히 말했다.
“달은 윤동주에게 늘
양심의 등불이었다.
밝지만 드러내지 않는 빛.
그래서 이 대화는 밤에 이루어진다.”
달삼은 조용히 물었다.
“선생님,
그럼 윤동주는 귀뚜라미에게
무슨 이야기를 했을까요?”
청람은 잠시 침묵하다 답했다.
“아마…
사람에게는 끝내 하지 못한 말이었을 거다.”
“우리는 그 말을 알 수 없나요?”
청람은 고개를 저었다.
“알 필요가 없다.
그가 말하지 않기로 한 것을
우리가 함부로 해석할 권리는 없지.”
달삼은 시집을 덮으며 말했다.
“선생님,
이 시를 읽으니까
말하지 않는 것도
하나의 용기라는 생각이 들어요.”
청람은 미소 지었다.
“그래, 달삼아.
윤동주는 그렇게
조용한 용기를 남긴 시인이다.”
ㅡ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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