밭은기침 ㅡ청람 김왕식
밭은기침 2025.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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밭은기침
전화는 윤동주 이야기로 시작되었다.
원로 시인과 필자는 윤동주의 시를 둘러싸고, 부끄러움과 순결, 언어의 절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윤동주의 시가 지닌 맑음은 단순한 서정이 아니라, 끝까지 자신을 속이지 않으려는 태도의 결과라는 데 의견이 모아졌다. 말은 자연스레 삶의 윤리로 옮아갔고, 시를 쓴다는 것이 어떤 자세를 요구하는 일인가에까지 닿았다.
그때였다.
수화기 너머에서 밭은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한두 번이 아니었다.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동안 원로 시인의 음색은 늘 고르고 편안했다. 윤동주의 시처럼, 불필요한 기교 없이 맑은 결을 유지해 왔다. 그래서 더 마음이 쓰였다. 혹시 대화를 방해할까 봐, 혹은 상대를 배려하느라 참고 있던 몸의 신호는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윤동주를 말하던 자리에서, 윤동주처럼 참고 견디는 몸을 떠올렸다는 사실이 마음을 더 무겁게 했다.
시를 이야기하다가 시인의 육체를 걱정하게 되는 순간, 말은 조심스러워졌고 침묵은 길어졌다. 윤동주가 병약한 몸으로 끝까지 시를 붙들었던 장면들이 머릿속을 스쳐 갔다.
조심스레 여쭸다.
“혹시 반려견이 있으신가요.”
잠시 웃음이 섞인 답이 돌아왔다.
“그래요. 이 녀석이 낯선 인기척만 나면 이렇게 짖어대네요.”
기침으로 들렸던 소리는 반려견의 짖음이었고, 염려의 대상은 고통이 아니라 살아 있는 일상이었다. 안도의 숨이 길게 흘러나왔다. 윤동주의 시를 이야기하던 자리에, 뜻밖에도 따뜻한 현실의 소리가 놓였다.
생각해보면 윤동주의 시가 그러했다.
비극의 언어처럼 읽히지만, 그 바탕에는 삶을 끝까지 놓지 않으려는 의지가 있었다. 고통을 과장하지 않았고, 연약함을 숨기지도 않았다. 그 맑음은 죽음의 전조가 아니라, 삶을 향한 마지막까지의 예의였다.
그날의 통화는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기침이라 여겼던 소리는 짖음이었고, 불안이라 믿었던 순간은 일상이었다. 윤동주를 말하다가 삶을 확인했고, 시를 이야기하다가 숨이 돌아오는 소리를 들었다.
시란 어쩌면 그런 것이다.
사람을 철렁하게 했다가, 끝내 안심하게 만드는 것.
절망을 떠올리게 했다가, 다시 살아 있게 하는 것.
ㅡ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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