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세상을 잠시 잊게 할 때 ㅡ청람 김왕식
눈이 세상을 잠시 잊게 할 때 2025.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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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세상을 잠시 잊게 할 때
청람
밤이 먼저 길을 비웠다
소음은 낮은 곳으로 물러나고
숨결마저 조심스러워질 즈음
눈은 아무 말 없이 내려왔다
나목의 어깨 위로
하얀 이불이 포개졌다
벗겨낸 채 서 있던 가지들은
추위를 묻지 않고
침묵으로 받아들였다
길 위의 얼룩들,
사람의 급한 발자국과
오래된 분노의 자국까지
눈은 차별 없이 덮었다
지우려는 손길이 아니라
잠시 쉬게 하는 손길로
세상은 하룻밤
다른 얼굴을 얻었다
새벽에 문을 여는 사람은
눈 속에서
어제의 무게를 잠시 내려놓는다
발걸음은 느려지고
시선은 낮아진다
나목은 말한다
비워낸 뒤에도
지켜지는 것이 있다고
눈은 답한다
가려진 뒤에도
다시 드러나는 것이 있다고
길은 더럽혀진 적이 없다는 듯
조용히 누워 있고
마음은 오래 흐렸다는 사실을
그제야 인정한다
순백은 결백이 아니라
다시 시작할 용기
눈은 죄를 심판하지 않고
시간을 씻긴다
아침 햇살이 스치면
눈은 곧 녹아
제 자리를 비운다
그러나 남겨진 것은
하루의 태도다
덮고 지나간 뒤
다시 드러나게 하는 힘
눈은 잠깐 머물다 가는
영혼의 방식이었다
그래서 겨울에 내리는 눈은
세상을 바꾸지 않아도
사람을 바꾼다
오늘을
조금 더 정직하게
걷게 만든다
ㅡ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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