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찰

다시 살아온 이름 ㅡ청람 김왕식

다시 살아온 이름 2025.12.25
다시 살아온 이름

다시 살아온 이름

김왕식

우연히

리모컨 끝에 걸린 한 채널에서

나는 숨을 놓쳤다

병실의 흰 벽보다

더 희게 질린

어린 날의 한 소녀가

화면 속에 앉아 있었다

백혈병이라는

너무 큰 이름 앞에서

그 아이는

아직 이름도 다 자라지 못했는데

주사 바늘이 하루를 열고

기계음이 밤을 닫던 시절

놀이터 대신

침대 난간을 붙잡고

내일을 연습하던 아이

살아야 한다는 말보다

살고 싶다는 기도가

더 작게 떨리던 밤들

그 아이는

울면서도 견뎠고

견디면서도

사라지지 않았다

시간은

그 아이를 데려가지 못했고

대신

그 아이에게 길을 내주었다

그 아이는

흰 가운을 입었다

기적처럼 보였지만

기적은 아니었다

수없이 죽음 옆에 앉아

끝내 살아낸 사람의

느린 결심이었다

이제 그는

자신과 닮은 아이들의 손을 잡는다

과거의 자신을

다시 눕히듯

조심스럽게

“괜찮아”라는 말 대신

“나도 여기까지 왔어”라고

눈으로 말하는 사람

병을 고치는 손보다

먼저

마음을 어루만지는 손

그가 서 있는 자리는

의사의 자리이기 전에

한 생이

다른 생의 숨이 되는 자리

나는 화면 앞에서

울었다

한 사람이

자기 아픔을

세상으로 돌려주는 장면 앞에서

아픔은

끝내 사라지지 않아도

누군가의 내일이 될 수 있다는 것

죽음 가까이에서 배운 숨이

다른 생을 살린다는 것

그래서

이 세상에는

아직도

포기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가

남아 있다는 것

그날

나는 텔레비전을 본 것이 아니라

한 생이

한 생을 살려내는

눈물의 연대를 보았다

그리고

조용히

다시 숨을 쉬었다

ㅡ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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