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이 먼저 밀어올린 것 ㅡ 청람
몸이 먼저 밀어올린 것 ㅡ 청람 2025.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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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먼저 밀어올린 것
청람 김왕식
겨울이다.
빛이 바랜 벙거지에 귀마개를 쓴 노인이 폐휴지 수레를 가득 싣고 언덕을 오른다. 수레 바퀴는 얼어붙은 길 위에서 자주 멈칫거리고, 노인의 호흡은 바람보다 먼저 가빠진다. 겨울의 언덕은 늘 그렇듯 말이 없고, 사람의 사정을 묻지 않는다. 다만 오를수록 더 무거워질 뿐이다.
그때 한 젊은이가 다가온다. 두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말없이 몸으로 수레를 민다. 수레는 조금씩 속도를 얻고, 노인의 걸음도 잠시 고른다. 그러나 그 장면을 바라보던 중년 신사의 얼굴에는 못마땅함이 스친다. 그는 혀를 찬다.
차라리 밀지 말지. 저러다 오히려 짐이 되겠다.
선의는 때로 가장 먼저 의심받는다. 도움은 언제나 능률과 효율의 잣대 위에 올려진다. 손을 쓰지 않는 도움은 도움으로 인정받기 어렵다.
중년 신사는 가까이 다가오며 마음속으로 생각한다. 내가 직접 밀어야겠다. 저 젊은이는 폼만 잡고 있다. 그렇게 몇 걸음을 더 옮긴 순간, 그는 멈춰 선다. 주머니 속에 있어야 할 손이 없다. 대신 접힌 소매가 주머니 안으로 들어가 있다. 그제야 보인다. 젊은이는 두 팔이 없다. 손을 쓰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손이 없는 몸이다. 그래서 그는 몸으로 밀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식으로.
아, 이를 어쩌나.
중년 신사의 혀끝에 남아 있던 판단이 부끄러움으로 굳어진다. 방금 전까지 확신하던 생각들이 한꺼번에 무너진다. 그는 젊은이를 오해했고, 그 오해 위에서 쉽게 우월해졌으며, 아무런 망설임 없이 판단했다. 가까이 와서야 보이는 진실은 늘 늦다. 그러나 늦게라도 보았다는 사실이, 더 큰 부끄러움을 남긴다.
오해는 언제나 멀리서 시작된다. 사람은 멀리서 볼 때 가장 쉽게 단정한다. 손을 주머니에 넣은 모습 하나로 게으름을 말하고, 도움의 방식 하나로 진심을 재단한다. 반면 감동은 늘 가까이에서 드러난다. 가까이 다가가야 보이는 결손, 가까이 서야 느껴지는 용기, 가까이에서야 이해되는 삶의 사정이 있다.
그 젊은이는 영웅처럼 굴지 않는다. 자신의 결핍을 설명하지도 않는다. 다만 밀고 있을 뿐이다. 말 대신 몸으로, 자랑 대신 침묵으로. 그가 선택한 도움은 가장 조용한 방식이지만, 가장 단단한 의지에서 나온다. 손이 없어도 마음은 멀쩡히 남아 있고, 몸이 불편해도 연대는 포기하지 않는다.
중년 신사는 잠시 언덕을 올려다본다. 겨울의 언덕은 여전히 차갑고 가파르다. 그러나 방금 전과는 다른 무게로 다가온다. 사람을 판단하는 일의 무게, 쉽게 혀를 차는 마음의 가벼움, 그리고 그것이 남기는 상처의 깊이를 생각한다. 세상에는 보이지 않는 이유들이 너무 많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연이 대부분이다.
겨울은 사람을 시험한다. 추위 앞에서 드러나는 것은 체력만이 아니다. 타인을 바라보는 태도, 선의를 해석하는 시선, 판단을 유예할 수 있는 인내가 함께 드러난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멀리서 보고 결정해 왔는가. 얼마나 쉽게 ‘한심하다’는 말을 마음속에 쌓아두었는가.
언덕 위에서 수레는 조금 더 올라간다. 노인은 고개를 숙인 채 묵묵히 끈을 잡고, 젊은이는 여전히 몸으로 밀고 있다. 중년 신사는 그 뒤에서 조용히 발걸음을 늦춘다. 지금은 밀지 않는다. 대신 본 것을 마음에 남긴다. 판단보다 먼저 다가가야 한다는 사실, 연민은 계산이 아니라 경청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겨울 언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그날의 장면은 오래 남는다. 우리는 그 장면 앞에서 뒤늦게 배운다. 판단은 가볍고, 이해는 무겁다는 것을. 그리고 선의는 설명되지 않아도 선의라는 것을.
ㅡ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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