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국 시인 ㅡ숲에 기대어 삶을 다시 읽다ㅡ 청람 김왕식
이경국 시인 ㅡ숲에 기대어 삶을 다시 읽다 2026.01.10
□ 이경국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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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박 2일로 용평과 고성에 다녀 오면서 힐링을 하고자 한다.
산중에서는 물론이고 저자거리에서도 수행은 가능하다고 했다.
그러나 1박의 인연은 실로 크다고 본다. 면면이 소중하고 귀한 분들이시다.
두 세기에 걸쳐서 살고 있는 현대인들은 時空의 합치점에서 만나고 있으니 생각이 깊어질 수밖에 없다.
자연속 나들이는 리얼하게 표현하자면 어머니의 자궁속과 같은
평온함이 따르기에 좋다는 것이다.
<休息>이란 글자를 풀어보면 ”인간이 나무에 기대어서 자신의 마음을 살핀다”는 의미이다.
숲속은 자연이다. 자연속 에서 그리운 이를 떠 올려 보면 마음이 애톳해질 것이다.
1박 2일간의 추억담은 글로 남겨서 팬분들께 전해드릴 생각이다.
가장 넓으나 인구는 적은 강원도에서 강원도의 힘과 기를 듬쁙 받고 올
작정이다.
현세의 인연으로 다음 생에는 어떻게 만날지는 모르겠으나 스쳐지나 치지는 않을 것이다. 내일의 자리에서 오늘을 생각해 보고 싶은 날이다.
(평화대사/海垣, 이경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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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에 기대어 삶을 다시 읽다
청람 김왕식
이경국 시인의 글을 읽는다는 것은, 하루의 호흡을 조금 낮추고 삶의 결을 다시 만져보는 일과 닮아 있다.
그의 문장은 늘 서두르지 않는다. 빠르게 결론을 향해 달려가지도 않고, 독자를 설득하려 애쓰지도 않는다. 대신 한 걸음 물러서서,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자리의 공기를 먼저 느끼게 한다. 그래서 그의 글은 읽는 것이 아니라, 잠시 곁에 앉아 함께 쉬는 경험에 가깝다.
이번에 그가 1박 2일로 용평과 고성을 다녀온다는 소식은, 단순한 여행 소식이 아니라 하나의 예고처럼 다가온다.
이경국 시인에게 여행은 이동이 아니라 귀환이기 때문이다. 도시의 소음과 속도를 잠시 내려놓고 자연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그에게 있어 수행의 다른 이름이다. 그는 산중에서만 수행이 가능한 것이 아니라, 저자거리에서도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말 속에는 분명한 여백이 있다. 가능하다는 말과, 깊어진다는 말은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알고 있다. 1박의 인연이 결코 가볍지 않다는 것을.
두 세기를 동시에 살아내는 현대인들이 시공의 합치점에서 만난다는 그의 표현은, 이 시대 인간의 피로를 정확히 짚는다. 우리는 과거의 기억과 미래의 불안을 동시에 짊어진 채 현재를 살고 있다. 그래서 생각은 깊어질 수밖에 없고, 마음은 쉽게 소진된다.
이런 시대에 자연 속 나들이를 ‘어머니의 자궁’에 비유한 그의 문장은 단순한 수사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가장 무방비로, 가장 안전하게 존재할 수 있었던 원초적 공간에 대한 기억의 호출이다. 숲이 주는 평온은 단순한 휴식이 아니라, 존재가 다시 정렬되는 시간이다.
<休息>이라는 한자를 풀어 ‘인간이 나무에 기대어 자신의 마음을 살핀다’고 해석한 대목은 이경국 시인의 사유가 어디에서 출발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는 개념을 설명하지 않고, 이미지를 건넨다. 나무에 기대 선 인간의 모습은 곧 그의 글을 읽는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 숲속에서 그리운 이를 떠올리면 마음이 애틋해진다고 했을 때, 그 애틋함은 슬픔이 아니라 회복의 징후다. 잊고 살았던 감정이 되살아난다는 것은, 아직 마음이 살아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번 1박 2일의 추억을 글로 남겨 팬들에게 전하겠다고 했다. 그 글은 분명 또 하나의 따뜻한 통로가 될 것이다. 가장 넓고 인구는 적은 강원도에서 그는 강원도의 힘과 기를 온몸으로 받아올 작정이다. 그것은 개인의 충전이자, 다시 나누기 위한 준비다.
이경국 시인의 글이 늘 독자에게 도착하는 방식은 이렇다. 먼저 자신이 충분히 머물고, 충분히 느낀 뒤에야 말을 건넨다.
현세의 인연이 다음 생에서 어떻게 이어질지는 모르지만, 스쳐 지나치지는 않을 것이라는 그의 문장은 관계를 대하는 태도의 선언처럼 읽힌다. 가볍지 않되 집착하지 않고, 깊되 과시하지 않는 관계의 윤리.
그래서 그의 글은 늘 사람을 향해 열려 있다. 내일의 자리에서 오늘을 생각해보고 싶다는 말 역시, 시간 앞에서 겸허해지려는 자세의 표현이다.
이번 용평과 고성의 노정 이후, 이경국 시인이 우리에게 건넬 글을 기다리는 이유는 분명하다. 그의 글은 우리를 다른 세계로 데려가지 않는다.
대신 우리가 이미 살고 있는 이 세계를, 조금 더 따뜻하고 조금 더 느리게 살아갈 수 있도록 이끈다. 그가 또 한 번 삶의 세계로 우리를 인도할 그 글을, 조용히 기다려본다.
ㅡ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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