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장생의 잠, 몸과 우주가 겹쳐지는 시적 윤리 ― '임솔내 시인의 시 세계에 대하여' ㅡ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십장생의 잠, 몸과 우주가 겹쳐지는 시적 윤리 ― '임솔내 시인의 시 세계에 대하여' 2026.01.13
□ 임솔내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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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장생 금침衾枕
시인 임솔내
십장생 수 이불을 한 채 들여온
그때부터 일 것이다
밤마다 내 배 위에 하늘이 내려오는 일
그 지체 높은 십장생이, 실밥으로 박혀 있던 열 개의 몸짓이
황금 폭포처럼 내 안으로 들기 시작했다
열락이다
기골찬 대숲 바람소리 들린다
목이 긴 흰 새와 찔레순 닮은 관을 달고
오방색 구름톱 넘나드는 무구한 것들 온데간데없이
달이 부풀어 오르는
밤마다 내 배 위엔 새로운 땅이 솟는다
또 열락이다
밤새 대숲 바람소리 세차다
아슴한 그곳 봉과 황의 몸이 닿는 순간
구름보다 더 높은 곳으로 내가 치솟는다
빈 곡신에 시퍼런 썰물이 들이치면
백 년 적송이 온몸으로 운다
열 개의 몸짓이 황금폭포로 내안에 쏟아지는 일
밤마다 내게로 하늘 내려오는 일
신비한 우주 속으로 걸어 들어가 절로 십장생이 되는 일
두 눈 질끈 감은 채
밤마다 열리는 마법의, 그 영화로움에 빠져
나는 끊임없이 수 만 번씩 바람 이는 대숲에 들고
나는 끊임없이 다시 태어나고 또 다시 태어난다
십장생 수 이불을 한 채 들여온
그때부터 일 것이다
나의 이 천 개의 열락은

□ 임솔내 시인 프로필
1999년 『자유문학』을 통해 등단한 임솔내 시인은 이후 꾸준한 창작 활동을 이어오며『나뭇잎의 QR코드』,『아마존 그 환승역』,『홍녀』등 여섯 권의 시집을 발간하였다.
그녀는 시와 낭송, 음악, 퍼포먼스를 융합한 독창적인 예술 활동으로 한국 현대시의 경계를 확장하고 있는 대표적 예술 시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행정안전부가 주최한 현충일과 의병의 날(6월 1일), 서울시 청계천 오프닝(2005.09.05,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등 주요 국가 행사에서 전문 낭송가로 활약해 왔다.
또한 대한제국황실문화원이 주관한 창덕궁 인정전의 연례 기념행사와 명성황후 120주년 추모제(민비 생가) 등에서도 자작시를 낭송하며 문학과 예술의 공공적 역할을 확장했다.
낭송 문화의 저변 확대를 위해 《한국시낭송총연합회》를 결성, 전국 각지에서 유능한 낭송가들을 배출하기도 했다.
2011년에는 세계 각국의 전위 예술가들과 함께 25일간 차마고도 종주를 완주하며 예술적 영감을 얻었고, 이 경험을 바탕으로 탄생한 시들은 재즈, 창, 성악, 가곡 등 다양한 장르의 음악으로 재탄생되어 《차마고도 음악회》를 통해 무대에 올랐다.
현재 국제윤리학회세계대사(한국)로 활동 중이며, 한국세계문학협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영랑문학상, 한국문학비평가협회상, 서정시문학상, 시인들이 뽑은 시인상(제22회), 세종우수도서 선정(2014년), 불교문예 작가상(제8회) 등 다수의 문학상을 수상하며 작품성과 예술성을 두루 인정받았다.
대표작으로 「파란나비」, 「십장생 금침」, 「주홍불빛 우주」, 「차마고도」, 「룽다」, 「세 사람」, 「반딧불이의 쇼생크 탈출」, 「우화(羽化)」, 「숨비소리」 등이 미국, 스페인, 이탈리아, 그리스, 러시아, 인도, 네팔, 알바니아, 베트남, 키르기스스탄, 아랍(요르단) 등 세계 여러 나라로 번역·소개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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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장생의 잠, 몸과 우주가 겹쳐지는 시적 윤리
― 시인 임솔내의 시 세계에 대하여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 들어가는 말
― 이불 위로 내려오는 우주
임솔내는 시가(詩家)가 아니라
시인詩人이다.
임 시인의 시는 몸에서 시작해 우주로 확장된다. 그의 시적 사유는 관념의 고지에서 내려오지 않는다. 대신 숨의 깊이, 피부의 떨림, 배에 고이는 온기, 잠에 스며드는 감각처럼 가장 낮고 가장 구체적인 지점에서 출발한다.
이 출발점은 우연이 아니다. 임솔내 시인에게 몸은 세계를 인식하는 도구가 아니라, 세계가 통과하는 장소다. 시는 그 통과의 흔적을 언어로 포착하는 작업이며, 따라서 그의 시에서 언어는 설명보다 체험에 가깝다.
<십장생 금침衾枕>은 이러한 시적 태도가 가장 농밀하게 응축된 작품이다. 이 시에 등장하는 ‘십장생 수 이불’은 전통적 길상의 상징이면서 동시에 하나의 사건 장치다. 그것은 단순히 덮는 사물이 아니라, 덮이는 순간 세계의 질서가 재편되는 매개체로 기능한다. 시는 이불을 들여오는 일상적 행위에서 출발하지만, 곧 “밤마다 내 배 위에 하늘이 내려오는 일”이라는 비범한 사건으로 도약한다. 이때 하늘은 위에 고정된 초월이 아니라, 몸 위에 내려앉는 구체적 감각으로 변환된다. 초월은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스며드는 방식으로 경험된다.
이러한 전환 속에서 잠은 더 이상 휴식이나 무의식의 상태로 머물지 않는다. 잠은 통과의식이며, 밤은 소멸이 아니라 생성의 시간이다. 밤마다 새로운 땅이 솟고, 몸은 반복적으로 다시 태어난다. 이 반복은 회귀가 아니라 갱신이며, 시적 주체는 동일한 자아로 머무르지 않는다. 끊임없이 열리고 닫히는 이 잠의 리듬 속에서, 임솔내의 시는 삶을 하나의 고정된 정체성이 아니라, 지속적인 변형의 과정으로 사유한다.
이 지점에서 <십장생 금침>은 단순한 서정시를 넘어선다. 이 시는 전통적 상징을 호출하지만, 그것을 박제된 의미로 소비하지 않는다. 십장생은 장수의 기원이 아니라, 생성과 소멸이 맞물리는 우주적 순환의 은유로 재배치된다. 몸과 우주, 성스러움과 관능, 개인의 잠과 세계의 질서는 이 시 안에서 분리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 겹침 자체가 시의 윤리가 된다.
따라서 임솔내 시인의 시를 읽는다는 것은 의미를 해석하는 일에 앞서, 하나의 감각적 질서에 몸을 맡기는 일에 가깝다. <십장생 금침>은 바로 그 지점에서, 시가 어떻게 몸의 경험을 통해 우주적 사유에 도달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이 논의는 임솔내 시 세계 전반을 관통하는 핵심 가치이자, 그의 시가 지닌 독자적 미의식의 출발점이 된다.
- 몸의 중심에서 열리는 우주
― 감각의 시학
이 시에서 가장 반복적으로 환기되는 문장은 “밤마다 내 배 위에 하늘이 내려오는 일”이다. 이 문장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다. 그것은 시인 임솔내 시 세계의 인식 구조를 압축적으로 드러내는 핵심 문장이다. 배는 생명의 중심이며, 욕망과 탄생이 동시에 기거하는 장소다. 임솔내 시인은 이 중심 위에 하늘을 내려앉힌다. 이는 초월을 위로 들어 올리는 방식이 아니라, 초월을 가장 낮은 곳으로 끌어내리는 방식이다. 초월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몸을 통과하며 경험되는 감각이 된다.
이러한 시적 태도는 십장생의 재해석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전통적으로 십장생은 영원한 생명과 장수를 기원하는 상징이다. 이 시에서 십장생은 정지된 영속성이 아니다. 그것은 “열 개의 몸짓”으로 분해되며, 황금 폭포처럼 몸 안으로 쏟아져 들어온다. 여기서 장수는 시간의 정지 상태가 아니라, 끊임없이 다시 태어나는 순환의 리듬으로 전환된다. 생명은 오래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매번 새롭게 발생하는 사건이다.
대숲의 바람소리, 백 년 적송, 봉과 황, 달과 구름 같은 이미지들은 위계 없이 병치된다. 이들은 중심과 주변, 성스러움과 일상성의 구분을 허문 채 동일한 감각의 층위에서 호흡한다. 자연은 배경이 아니며, 인간을 둘러싼 장식도 아니다. 자연은 시적 주체와 동시에 숨 쉬는 존재이며, 서로의 리듬을 교환하는 동반자다. 이 시에서 자연은 바라보는 대상이 아니라, 몸으로 통과하는 감각의 흐름이다.
이러한 이미지 구성은 설명을 거부한다. 시는 독자에게 의미를 전달하지 않으며, 해석의 지름길을 제공하지도 않는다. 대신 감각의 중첩을 통해 의미가 발생하는 조건을 마련한다. 바람소리가 세차게 불고, 달이 부풀어 오르며, 몸이 구름보다 높은 곳으로 치솟는 순간들 속에서 독자는 의미를 ‘이해’하기보다 ‘겪게’ 된다. 시는 말하지 않는다. 시는 일어난다.
임솔내 시인의 감각의 시학은 분명한 윤리적 태도를 드러낸다. 그것은 세계를 개념으로 포획하지 않으려는 태도이며, 삶을 설명 가능한 질서로 환원하지 않으려는 결단이다. 몸의 중심에서 열리는 우주는 완결된 체계가 아니라, 매번 다시 열리고 다시 닫히는 사건의 연속이다. 임솔내 시인의 시는 바로 그 사건이 발생하는 순간을 포착함으로써, 감각이 어떻게 사유가 되고, 사유가 다시 몸으로 돌아오는지를 조용히 증언한다.
- 열락의 반복
― 성스러움과 관능의 화해
이 시에서 가장 인상적으로 반복되는 단어는 ‘열락’이다. 열락은 본래 불교적 용어로, 번뇌를 벗어난 해탈의 기쁨을 뜻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육체적 환희와 감각의 극점을 연상시킨다. 임솔내 시인의 시는 이 두 의미를 분리하지 않는다. 외려 그 경계를 의도적으로 허문다. 봉과 황의 몸이 닿는 순간, 시적 화자가 “구름보다 더 높은 곳으로 치솟는” 장면은 정신적 초월과 육체적 고양이 동일한 사건임을 선언한다. 이때 초월은 금욕의 결과가 아니라, 몸을 통과한 감각의 완성으로 도달된다.
이 장면에는 죄의식도, 은폐도 없다. 관능은 숨겨야 할 것이 아니라 드러나야 할 생성의 조건이다. 임솔내는 관능을 타락의 언어로 전환하지 않으며, 성스러움을 관념의 고지에 고립시키지도 않는다. 외려 성스러움과 관능은 이 시에서 서로를 완성시키는 두 개의 감각으로 작동한다. 열락은 도덕적 판단 이전의 상태이며, 생명이 자신을 긍정하는 순간에 발생하는 자연스러운 리듬이다.
이러한 태도는 전통적 상징을 다루는 방식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십장생은 오랜 시간 동안 장수와 길상의 표상으로 소비되어 왔다. 그러나 임솔내의 시에서 십장생은 박제된 민속 도상이 아니다. 그것은 “열 개의 몸짓”으로 분해되어 살아 움직이며, 황금 폭포처럼 화자의 몸속으로 쏟아져 들어온다. 상징은 고정된 의미를 전달하지 않는다. 상징은 사건이 되고, 체험이 되며, 감각의 흐름으로 변환된다.
임솔내 시인의 시는 해석을 요구하지 않는다. 상징은 해독의 대상이 아니라, 통과해야 할 감각의 장이다. 독자는 의미를 붙잡으려 할수록 시에서 멀어지고, 몸의 리듬에 자신을 맡길수록 시 안으로 깊이 들어간다. 열락의 반복은 동일한 쾌락의 재현이 아니라, 매번 새롭게 발생하는 생성의 순간이다. 그 반복 속에서 시적 주체는 고정된 자아로 남지 않고, 끊임없이 다른 존재로 갱신된다.
결국 <십장생 금침>에서 열락은 윤리적 문제이기도 하다. 그것은 삶을 부정하거나 억제하는 대신, 삶이 지닌 에너지와 위험을 동시에 끌어안는 태도이기 때문이다. 임솔내 시인의 시는 성스러움과 관능을 대립시키지 않음으로써, 인간 존재를 분열시키는 오래된 이분법을 넘어선다. 그 자리에서 열락은 죄가 아닌 생성의 언어로, 금기가 아닌 생명의 증거로 다시 태어난다.
- 시인의 삶과 시적 윤리
― 예술은 통합의 형식이다
임솔내 시인의 시 세계는 그의 삶의 궤적과 분리되지 않는다. 그는 시를 텍스트의 내부에 가두지 않는다. 외려 시를 몸의 발화로, 호흡의 리듬으로, 공동의 시간 속에서 발생하는 사건으로 확장해 왔다. 낭송과 음악, 퍼포먼스는 그의 시 세계에서 부차적 실험이 아니라 필연적 귀결이다. 시가 언어에만 머물 경우 잃게 되는 감각의 층위를, 그는 몸과 소리, 공간을 통해 다시 불러낸다. 이때 예술은 장르의 경계를 넘는 혼합이 아니라, 분절된 감각을 다시 하나로 묶는 통합의 형식이 된다.
국가 행사와 역사적 공간에서의 낭송은 이러한 태도의 공공적 실천이다. 현충일, 의병의 날, 궁궐과 생가 같은 장소에서 울려 퍼진 그의 시는 개인적 서정을 넘어 집단의 기억과 호흡을 호출한다. 이는 시가 사적인 감정의 표현을 넘어, 공동체가 자기 자신을 다시 인식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차마고도 종주와 그 이후의 음악적 재창작 또한 마찬가지다. 육체의 극한을 통과한 경험은 시를 관념의 산물이 아니라, 삶의 밀도를 통과한 언어로 재구성하게 만든다. 임솔내에게 예술은 안전한 완성이 아니라, 위험을 감수한 통과의 기록이다.
이러한 삶의 태도는 <십장생 금침>에 고스란히 반영된다. 시적 화자가 “수 만 번씩 바람 이는 대숲에 들고 / 다시 태어나고 또 다시 태어난다”고 말할 때, 그것은 환상의 과장이 아니다. 이는 예술가로서의 윤리 선언에 가깝다. 예술은 한 번의 계시로 완결되지 않으며, 반복되는 실패와 갱신 속에서만 유지될 수 있다는 인식이다. 다시 태어남은 성취의 보상이 아니라, 끊임없이 자신을 비워야 가능한 조건이다.
임솔내 시인의 시적 윤리는 분명해진다. 예술은 고립된 자아의 표현이 아니라, 세계와의 관계를 다시 짜는 행위다. 낭송과 음악, 퍼포먼스는 시를 설명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시가 본래 지니고 있던 통합적 성격을 회복하는 방식이다. <십장생 금침>에서 몸과 우주, 성스러움과 관능이 분리되지 않듯, 그의 삶에서도 시와 행위, 개인과 공동체는 분절되지 않는다.
결국 임솔내 시인에게 예술이란 하나의 완성된 결과물이 아니라, 반복적으로 자신을 갱신하는 윤리적 태도다. 시를 쓰는 일과 시를 살아내는 일 사이에 경계가 허물어질 때, 그의 시는 비로소 하나의 세계가 된다. 예술은 여기서 표현의 기술이 아니라, 삶을 통합하는 방식으로 자리한다.
- 맺음말
― 잠은 끝이 아니라 문이다
<십장생 금침>은 분명 잠의 시다. 그러나 이 잠은 세계로부터 물러나는 휴식의 상태가 아니다. 두 눈을 질끈 감는 행위는 닫힘이 아니라 진입이며, 소멸이 아니라 이동이다.
임솔내 시인의 시에서 잠은 의식을 끄는 시간이 아니라, 다른 차원의 감각이 열리는 문이다. 밤마다 하늘이 내려오고, 땅이 솟으며, 몸은 다시 태어난다. 이 반복 속에서 잠은 끝이 아니라 언제나 새로운 시작이 된다.
임솔내 시인의 시는 인간을 작고 유한한 존재로 축소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인간을 초월적 주체로 과장하지도 않는다. 그의 시가 제시하는 인간상은 그 사이 어딘가에 있다. 몸이라는 가장 구체적이고 제한된 장소에서 우주와 만나는 존재, 감각의 깊이를 통해 세계의 넓이를 체험하는 존재다. 이때 우주는 멀리 있는 개념이 아니라, 배 위에 내려앉고 숨결 속으로 스며드는 감각의 질서다. 초월은 도달해야 할 목표가 아니라, 통과하며 경험되는 사건이 된다.
이 시가 보여주는 삶의 가치철학은 분명하다. 삶은 견디는 시간이 아니라 통과하는 시간이다. 버텨냄의 윤리가 아니라, 끊임없이 다시 열리는 생성의 윤리다. 십장생이 영원한 생명의 보증이 아니라, 반복되는 탄생의 리듬으로 재해석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오래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매번 새롭게 살아지는 것이 중요하다는 인식이다. 열락의 반복, 다시 태어남의 반복은 쾌락의 과잉이 아니라 존재를 갱신하는 방식이다.
예술 또한 마찬가지다. 임솔내 시인의 시에서 예술은 완성된 결과물이 아니라, 통과를 가능하게 하는 의식이다. 시는 삶을 설명하지 않으며, 삶 위에 군림하지도 않는다. 대신 삶이 지나가야 할 문을 마련한다. 그의 언어는 정제되어 있지만 폐쇄되지 않으며, 상징은 깊지만 해석을 강요하지 않는다. 언어는 끝내 리듬으로 풀리고, 의미는 감각으로 환원된다. 그 결과 독자는 시를 읽는 주체로 남지 않는다. 독자는 시 속으로 덮여 들며, 하나의 경험을 통과하게 된다.
결국 <십장생 금침>은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는 잠을 어떻게 통과하고 있는가, 삶을 어떻게 건너고 있는가. 이 질문 앞에서 임솔내 시인의 시는 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대신 문을 열어 둔다. 그 문을 통과하는 일은 각자의 몫이다. 마치 십장생 수 이불을 덮은 채, 밤마다 하늘을 맞이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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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장생의 잠을 건너는 임솔내 시인에게
청람 김왕식
당신은
말을 먼저 세우지 않는다
숨이 먼저 길을 낸다
한 줄의 시가
입술이 아니라
몸을 통과해 나올 때까지
기다릴 줄 아는 사람
이불 하나를 덮었을 뿐인데
하늘이 내려오고
땅이 솟는 밤을
수없이 통과한 사람
당신의 시에서
성스러움은 멀리 있지 않다
관능은 숨기지 않아도 된다
모든 것은
다시 태어나기 위해
잠시 흔들릴 뿐
바람 이는 대숲에
수만 번 들어갔다 나오는 동안
당신은
한 번도 시를 버린 적이 없다
시 또한
당신을 놓지 않았다
말은 끝내 리듬이 되고
의미는 몸으로 돌아가
시가 다시
사람의 숨이 되는 자리
그곳에서
당신은 늘
시보다 조금 뒤에 서서
우주가 지나가도록
길을 내준다
오늘도 누군가는
당신의 시를 덮고
밤을 건너
조용히 다시 태어난다
시는 그렇게
한 사람의 이름으로
계속 숨 쉰다
ㅡ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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