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

장독대 항아리 뚜껑에 스민 저녁 서늘ㅡ청람 김왕식

장독대 항아리 뚜껑에 스민 저녁 서늘 2026.01.14
장독대 항아리 뚜껑에 스민 저녁 서늘

장독대 항아리 뚜껑에 스민 저녁 서늘

청람 김왕식

마당 끝 장독대

항아리 뚜껑 위에

저녁 서늘이 얇게 내려앉는다

달빛 닿기 전의 숨 같은 공기

서늘한 기척이 고요를 기울인다

겨울바람이 불던 해

아버지의 젓가락 자리가

식탁에서 비어 버린 뒤

어머니는 항아리 뚜껑을

더 자주 들여다보곤 한다

음식의 맛보다

살아낸 날들의 냄새를 떠올리려는 듯하다

봄이 두 번 지나가고

어머니 손끝의 힘이 약해지면서

뚜껑은 좀처럼 열리지 않는다

장독 속 깊은 발효보다

사람의 마음이 더 오래 숙성된다는 것을

어머니는 말없이 보여 준다

무르익은 여름밤

잠 못 이루던 날

장독대 앞에 잠시 서 있던 어머니

뚜껑 위 저녁 서늘을 손바닥으로 쓸며

말없이 눈을 감는다

미련이 아니라

잊기까지의 시간이

아직 덜 익었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

바람결에 항아리 뚜껑이

가볍게 떨린다

어머니는 발길을 멈추고

뚜껑 위 서늘한 결을

그냥 바라본다

닿지 않음으로써

더 오래 곁에 두는 법을

몸으로 익힌 사람처럼

저녁 서늘은

오늘도 항아리 뚜껑 위에 가만히 눕는다

누구도 건드리지 않는데

누구도 잊고 있지 않다

사라진 날들보다

견딘 날들이 더 깊은 숨을 내쉬는 자리다

ㅡ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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