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

보리의 시간 ㅡ 청람 김왕식

보리의 시간 2026.01.21
보리의 시간

보리의 시간

눈이 먼저 와

말을 가리고

서리가 먼저 서

발목을 묶을 때

보리는 묻지 않는다

왜 하필 지금인가를

몸을 낮춘다

뿌리를 아래로 보낸다

밟히는 일까지

성장의 일부로 받아들인다

살아 있다는 것은

부러지지 않는 법을 배우는 일이 아니라

다시 일어나는 각도를 익히는 일임을

보리는 이미 알고 있다

겨울은 지나간다

항상 그렇듯

그러나 지나간 겨울은

몸속에 남는다

청보리의 푸름은

따뜻함이 아니라

견딤의 색이다

바람이 오면

청보리는 맞선다

싸우지 않고

도망치지 않고

들판 전체가 함께 흔들리며

파도가 된다

한 줄기가 아닌

여럿의 호흡으로

아름다움이 완성된다

그 파도에는

앞선 자도

뒤처진 자도 없다

다만

같은 방향으로

같은 깊이만큼

몸을 기울이는 법이 있을 뿐

여름이 오면

푸름은 물러난다

보리는 빛을 바꾼다

황금은 젊음의 상이 아니라

무게의 색이다

알곡을 품은 이삭은

말없이 고개를 숙인다

고개를 숙인다는 것은

패배가 아니라

완성이다

더 보여줄 것이 없다는

조용한 확신이다

보리는 마지막까지

자신을 설명하지 않는다

수확의 순간에도

환호하지 않는다

다만 남긴다

겨울을 통과한 시간

함께 흔들린 기억

끝내 지켜낸 한 계절을

인생이란

결국 이와 같은 것

혹한에서 시작해

파도로 흔들리고

황금으로 잠잠해지는 일

밟혀서 살아남은 것들만이

다음 세대를 먹인다

그래서 오늘도

들판 어딘가에서

보리는

아무 말 없이

다시 시작하고 있다

ㅡ청람

댓글

로그인 없이 바로 남길 수 있습니다. 나중에 본인이 수정·삭제하려면 이 댓글의 비밀번호를 정해 주세요. 서로 예의를 지켜 주세요.

  1. 불러오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