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얼빈역에서》 ㅡ 안중근 의사를 기리며 시인 정근옥
《하얼빈역에서》 ㅡ 안중근 의사를 기리며 시인 정근옥 2026.03.02
□ 정근옥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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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얼빈역에서
ㅡ 안중근 의사를 기리며
시인 정근옥
돌길에 피멍이 맺혀도 비열하지 않으련다
모든 걸 내려놓고, 의로움의 숨으로 선다
꺾이지 않는 목숨으로, 부끄럼 없이 대장부의 삶 곧게 세우고 방아쇠를 당긴다
찬 서리에 떨어지는 꽃잎에 묻혀 이등박문 생의 꽃도 진다
흰빛의 백성들아, 나라보다 소중한 게 있는가
작은 등불 서로 건네며 독립의 길을 가라
누런 달빛 스미는 밤, 목숨마저 비우고,
한 점 별이 되어, 참의 길을 장대히 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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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로움의 숨, 별이 된 방아쇠
— 정근옥의 《하얼빈역에서》를 읽다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정근옥 시인의 시는 장식으로 시작하지 않는다. 그는 언제나 중심을 먼저 세운다.
《하얼빈역에서》 역시 그러하다. 하얼빈이라는 지명은 역사적 사건의 현장이지만, 시는 사건의 재현보다 ‘의로움의 숨’을 먼저 호명한다.
“돌길에 피멍이 맺혀도 비열하지 않으련다”라는 첫 구절은 결기의 선언이다. 육체의 상처보다 정신의 타락을 더 경계하는 태도, 그것이 이 시의 출발점이다.
이 작품에서 안중근은 영웅 이전에 ‘대장부’다.
“모든 걸 내려놓고, 의로움의 숨으로 선다”는 표현은 행동 이전의 결단을 강조한다. 방아쇠는 손가락의 움직임이 아니라 가치의 결과다.
시인은 총성을 재현하지 않는다.
대신 “꺾이지 않는 목숨”과 “부끄럼 없는 삶”을 앞세운다. 행동은 이미 완성된 정신의 필연이라는 인식이 깔려 있다.
“찬 서리에 떨어지는 꽃잎에 묻혀 이등박문 생의 꽃도 진다”는 구절은 역사적 인물을 자연의 질서 속에 놓는다. 권력의 절정도 한순간 꽃처럼 지는 운명임을, 정의의 총성은 단순한 파괴가 아니라 역사적 순환의 일부임을 암시한다.
정근옥 시인의 미의식은 여기서 드러난다. 그는 분노를 외치지 않는다.
대신 자연의 이미지로 역사를 재배치한다.
꽃은 지고, 별은 뜬다. 죽음은 소멸이 아니라 전환이다.
“흰빛의 백성들아”라는 호명에는 교육자의 음성이 배어 있다. 한평생 강단에 서서 후학을 가르치고 교육행정을 맡았던 그의 삶이 그대로 스민다.
시 속의 어조는 선동이 아니라 권유에 가깝다. “작은 등불 서로 건네며 독립의 길을 가라”는 문장은 단독 영웅의 서사가 아니라 공동체의 연대를 지향한다.
여기에는 민족을 향한 걱정과 동시에, 각자의 자리에서 책임을 다하라는 윤리적 요청이 담겨 있다.
시인 정근옥의 시정신은 정의를 중심에 둔다. 그러나 그 정의는 날카로운 구호가 아니라 숙연한 태도다.
“목숨마저 비우고, 한 점 별이 되어”라는 구절에서, 안중근은 죽음 이후 빛으로 전환된다. 별은 어둠 속에서 방향을 가리키는 존재다.
시인은 영웅을 숭배의 대상으로 고정하지 않고, 길을 비추는 좌표로 승화한다. 이것이 그의 가치 철학이다. 개인의 희생을 통해 공동체의 방향을 묻는다.
정근옥 시인의 작품 세계에는 늘 민족과 조국에 대한 염려가 흐른다. 그러나 그 염려는 과거에 머물지 않는다. 현재를 향한다. “나라보다 소중한 게 있는가”라는 물음은 단순한 애국적 수사가 아니라, 가치의 우선순위를 묻는 철학적 질문이다.
무엇을 위해 사는가,
무엇을 위해 내려놓을 수 있는가.
그의 시는 독자에게 이 질문을 남긴다.
형식 면에서도 절제가 돋보인다. 과도한 수식 없이 단단한 문장으로 세운 구조, 자연 이미지와 역사적 사건을 균형 있게 배치하는 감각은 오랜 교육자의 내공에서 비롯된다.
그의 언어는 격앙되지 않으면서도 흔들림이 없다. 정의를 외치되 소란하지 않다. 중심을 잃지 않는 품격이 있다.
《하얼빈역에서》는 안중근을 기리는 시이지만, 동시에 시인 자신의 초상이다. 강단에서 학생들을 향해 정의의 기준을 세워온 한 교육행정가, 민족의 앞날을 염려해 온 애국시인, 그리고 끝까지 시정신을 놓지 않은 사람의 목소리가 이 작품에 겹쳐 있다.
그는 영웅을 통해 자신의 신념을 말하고 있다.
방아쇠보다 앞선 결단,
총성보다 깊은 침묵,
죽음 이후에도 남는 별빛을!
ㅡ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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