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출판 청람서루의 가치철학과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의 ‘엎드린 평론’의 미학 — 존재를 향해 낮아지는 문학의 윤리 ㅡ 인물칼럼니스트 · 시인 김미루
도서출판 청람서루의 가치철학과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의 ‘엎드린 평론’의 미학 — 존재를 향해 낮아지는 문학의 윤리 ㅡ 인물칼럼니스트 · 시인 김미루 2026.03.25
□ 도서출판 청람서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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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출판 청람서루의 가치철학과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의 ‘엎드린 평론’의 미학
— 존재를 향해 낮아지는 문학의 윤리
인물칼럼니스트 · 시인 김미루

Ⅰ. 서론
— 낮아짐으로 시작되는 사유
문학은 언제나 높은 곳을 향해 올라가려는 욕망과 함께 존재해 왔다. 더 깊은 사유, 더 높은 통찰, 더 넓은 이해를 향한 지향은 문학을 인간 정신의 정점으로 끌어올리는 동력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깊은 문학은 가장 낮은 자리에서 시작된다. 높이 올라간 시선은 멀리 볼 수는 있으나, 가까이에 놓인 삶의 결을 놓치기 쉽다. 반대로 낮아진 시선은 비록 멀리 보지 못할지라도, 한 존재의 떨림과 숨결을 더 정확하게 감지한다.
(주) 도서출판 청람서루와 그 대표인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의 작업은 바로 이 역설 위에 서 있다. 그는 문학을 설명하거나 해석하는 위치에 서지 않는다. 오히려 한 걸음 물러나, 텍스트 앞에 ‘엎드리는’ 태도를 취한다.
이 ‘엎드림’은 단순한 겸양의 몸짓이 아니라, 문학을 대하는 근본적 자세의 전환이다. 작품을 대상화하지 않고, 하나의 살아 있는 존재로 받아들이는 방식이며, 해석의 권력을 내려놓고 이해의 가능성을 열어 두는 태도다.
이른바 ‘엎드린 평론’이라 불리는 그의 비평 방식은 기존의 권위적 비평과 분명히 구별된다. 전통적 비평이 텍스트를 분석하고 평가하며 일정한 결론에 도달하는 데 집중했다면, 김왕식의 비평은 그 이전 단계에서 멈춘다.
그는 작품을 규정하기보다, 작품이 놓인 자리와 그 안에 스며든 삶의 결을 따라간다. 이때 비평가는 해석자가 아니라 동행자가 된다. 작품 위에 서서 판단하는 존재가 아니라, 작품 앞에 서서 머무는 존재, 더 나아가 그 앞에 조용히 낮아지는 존재가 된다.
이러한 태도는 단순한 비평 방법론이 아니다. 그것은 문학을 대하는 윤리이며, 동시에 인간을 이해하려는 방식이다. 인간은 설명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분석으로도 완전히 파악되지 않는다. 오히려 오래 바라보고, 함께 머물며, 때로는 아무 말 없이 곁에 있을 때 비로소 그 존재의 일부가 드러난다.
김왕식의 평론은 바로 이러한 ‘머묾의 윤리’를 문학의 영역으로 끌어들인 시도라 할 수 있다.
청람서루의 출판 철학 또한 이 지점에서 출발한다. 이 출판사는 책을 지식을 전달하는 도구로 보지 않는다. 책은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함께 바라보기 위한 것이며, 비평은 판단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한 과정이라는 인식이 그 바탕에 놓여 있다. 따라서 청람서루의 책은 독자를 설득하거나 이끌기보다, 독자가 스스로 사유의 자리로 들어가도록 조용히 안내한다.
이러한 출판 태도는 오늘의 시대와 선명한 대비를 이룬다. 속도와 효율이 지배하는 환경 속에서, 대부분의 텍스트는 빠르게 읽히고 빠르게 소비되며 곧 잊힌다. 그러나 청람서루는 이 흐름을 따르지 않는다. 느리지만 깊게, 적지만 오래 남는 문장을 지향한다.
이는 단순한 선택이 아니라, 문학이 인간에게 어떤 방식으로 작용해야 하는가에 대한 근본적 질문에서 비롯된 결단이다.
청람서루와 김왕식의 문학 세계는 하나의 공통된 지향을 향해 나아간다. 그것은 문학을 통해 인간을 다시 깊게 이해하려는 노력이다. 높이 쌓아 올리는 사유가 아니라, 낮아짐을 통해 비로소 닿을 수 있는 이해의 방식.
따라서 이 글은 단순히 한 출판사의 방향성을 설명하는 데 머물지 않는다. 청람서루와 김왕식의 문학 세계를 통해, 오늘의 시대에 문학이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지를 탐색하고자 한다.
더 많이 말하는 문학이 아니라, 더 깊이 머무는 문학. 더 높이 올라가는 문학이 아니라, 더 낮아지는 문학.
그리고 바로 그 낮아짐 속에서,
문학은 다시 인간의 곁으로 돌아온다.
Ⅱ. 본론
— 청람서루와 김왕식 문학의 사유 구조
- ‘엎드린 평론’
— 이해 이전에 존재를 존중하는 태도
김왕식의 비평은 해석의 기술이 아니라 태도의 문제다.
그의 평론은 무엇을 말하는가보다, 어떻게 서 있는가에서 시작된다. 그는 작품을 분석하기 이전에, 그 작품이 놓인 자리와 그 안에 깃든 삶을 먼저 바라본다. 이때 바라본다는 행위는 단순한 관찰이 아니다. 그것은 시간을 들여 머무는 일이며, 서둘러 결론을 내리지 않겠다는 의지다.
기존의 비평이 의미를 해체하고 구조를 분석하는 데 집중했다면, 그의 비평은 그 이전 단계에 머문다. 그는 작품을 곧바로 해석의 대상으로 끌어오지 않는다. 오히려 한 발 물러나, 그 문장이 생성되기까지의 시간과 감정, 그리고 그 언어가 통과해 온 삶의 결을 조용히 더듬는다.
그는 묻는다.
이 문장은 어디에서 왔는가.
이 언어는 어떤 삶을 통과했는가.
이 질문은 단순한 방법론이 아니다.
그것은 비평의 방향을 바꾸는 근본적인 전환이다.
이 질문을 통해 비평은 판단의 영역에서 이해의 영역으로 이동한다. 작품을 평가하기보다, 작품이 존재하게 된 배경과 결을 따라가려는 시도. 결과를 말하기보다, 그 결과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함께 호흡하려는 태도.
이때 ‘엎드린다’는 표현은 단순한 수사가 아니다.
그것은 비평가의 위치를 근본적으로 재설정하는 개념이다.
비평가는 더 이상 작품 위에 서지 않는다.
그는 작품 앞에 선다.
그리고 마침내, 작품 앞에 낮아진다.
높은 자리에서 내려다보는 시선은 빠르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이해는 종종 표면에 머문다.
반면 낮은 자리에서 올려다보는 시선은 더디다. 그 더딤 속에서, 비로소 보이지 않던 결이 드러난다.
김왕식의 비평은 바로 이 더딤을 선택한다.
속도를 늦추고, 시선을 낮추며, 작품을 하나의 대상이 아니라 하나의 존재로 받아들인다.
이러한 시선은 작품을 대상화하지 않는다.
대신 살아 있는 것으로 대한다.
문장은 분석의 대상이 아니라,
누군가의 시간과 고통, 기쁨과 기다림이 스며든 흔적으로 이해된다.
이때 비평은 설명을 줄이고,
대신 함께 머무는 방식을 택한다.
그의 평론에서 특징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결론의 부재가 아니라,
결론을 서두르지 않는 태도다.
그는 독자를 설득하려 하지 않는다.
대신 독자가 스스로 생각할 수 있도록 여백을 남긴다.
이 여백은 단순한 공백이 아니다.
그것은 독자가 들어와 머물 수 있는 자리이며,
비평이 독서로 이어지는 통로다.
그의 평론은 하나의 닫힌 해석으로 완결되지 않는다.
오히려 열린 구조로 남는다.
작품을 끝까지 설명하지 않음으로써,
독자가 그 작품을 다시 살아가도록 만든다.
이러한 비평은 권위를 주장하지 않는다.
대신 신뢰를 형성한다.
비평가가 앞서 나가지 않기에,
독자는 비로소 스스로 걸을 수 있게 된다.
김왕식의 ‘엎드린 평론’은 바로 이 지점에서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낮아짐을 통해 더 깊이 이해하려는 시도이며,
문학을 지배하려는 것이 아니라,
문학과 함께 살아가려는 태도다.
결국 그의 비평은 하나의 질문으로 남는다.
얼마나 잘 해석했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깊이 바라보았는가.
그리고 그 바라봄은 언제나
낮은 자리에서 시작된다.
- 청람서루의 출판 철학
— 깊이를 향한 일관된 선택
청람서루의 출판 방식은 김왕식의 비평 철학과 동일한 뿌리를 갖는다.
그의 ‘엎드린 평론’이 낮아짐을 통해 존재를 이해하려는 태도라면, 청람서루의 출판은 그 태도를 책이라는 형식으로 구현한 실천이다.
이 출판사는 속도보다 밀도를, 양보다 깊이를 선택한다.
이 선택은 단순한 방향 설정이 아니라, 오늘의 출판 환경에 대한 분명한 응답이다.
현대의 출판 시장은 빠르게 움직인다.
기획은 짧아지고, 생산은 가속화되며, 책은 소비의 흐름 속에서 순환한다. 새로운 책은 끊임없이 등장하고, 그만큼 빠르게 잊힌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책은 점차 ‘내용’이 아니라 ‘속도’로 평가되는 경향을 보인다.
그러나 청람서루는 이 흐름을 따르지 않는다.
이곳에서 중요한 것은 얼마나 빨리 읽히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오래 남는가다.
여기서 ‘남는다’는 것은 단순한 기억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문장이 독자의 내면에 어떤 방식으로 자리 잡는가에 관한 문제다.
청람서루의 책은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쓰이지 않는다.
그것은 독자의 사유를 흔들고, 다시 바라보게 하며, 때로는 멈추게 하기 위해 존재한다.
이때 독서는 소비가 아니라 경험이 된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단순히 내용을 이해하는 일이 아니라,
한 문장 앞에 머무르고, 그 문장을 통해 자신을 다시 바라보는 과정이 된다.
청람서루의 책은 읽히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머물기 위해 존재한다.
이 머묾은 책이 끝난 뒤에도 지속된다.
어떤 문장은 읽는 순간보다, 시간이 지난 뒤에 더 또렷하게 떠오른다.
어떤 사유는 즉시 이해되지 않지만, 삶의 어느 순간에서 다시 살아난다.
이처럼 청람서루의 책은
한 번의 독서로 끝나는 구조를 거부한다.
대신 시간 속에서 반복적으로 되살아나는 구조를 지향한다.
책은 닫힌 결과물이 아니라,
독자의 삶 속에서 계속 이어지는 열린 과정이 된다.
이러한 출판 철학은 단순한 전략이 아니다.
그것은 문학을 존재의 문제로 이해하는 데서 비롯된다.
책은 지식을 전달하는 도구가 아니다.
지식은 늘어날 수 있지만, 인간이 깊어지는 것은 아니다.
청람서루는 이 지점을 정확히 인식한다.
그래서 이 출판사는 ‘무엇을 알게 할 것인가’보다
‘어떻게 살아가게 할 것인가’를 더 중요하게 여긴다.
결국 책은 하나의 방향이 된다.
독자를 특정한 결론으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가게 하는 길이 된다.
김왕식 대표의 인격과 문학적 태도는 이 출판 철학을 더욱 분명하게 만든다.
그는 빠른 성취를 추구하지 않고,
깊이 있는 사유를 끝까지 붙든다.
그의 글이 오래 남는 이유는
그가 오래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태도는 책을 만드는 방식에도 그대로 반영된다.
청람서루의 책은 서두르지 않는다.
문장은 충분히 다듬어지고, 사유는 충분히 숙성된다.
그 결과 이 출판사의 책은
읽히는 순간보다, 읽힌 이후의 시간이 더 길다.
독자는 책을 덮은 뒤에도 그 문장과 함께 살아가게 된다.
그리고 바로 그 지속성이
이 출판사의 가장 중요한 가치다.
결국 청람서루의 출판 철학은 하나의 선택으로 요약된다.
빠르게 사라지는 책이 아니라,
느리게 남는 책을 만드는 일.
이 선택은 효율의 논리를 거스르는 일이지만,
문학의 본질에는 가장 가까운 길이다.
책은 소비되는 것이 아니라,
시간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 언어와 침묵
— 말의 끝에서 시작되는 사유
김왕식의 문학과 청람서루의 출판은 공통적으로 ‘절제된 언어’를 특징으로 한다.
이 절제는 단순히 문장을 짧게 만드는 기술이 아니라, 언어를 대하는 근본적인 태도에서 비롯된다.
오늘의 시대에서 언어는 넘쳐난다.
말은 끊임없이 생산되고, 문장은 빠르게 소비되며, 의미는 점점 가벼워진다. 많은 말이 오가지만, 그 말이 오래 남는 경우는 드물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언어는 점차 전달의 도구로만 기능하고, 존재를 담아내는 깊이는 약해진다.
그러나 김왕식의 문학은 이 흐름과 다른 방향을 선택한다.
그의 문장은 많지 않다. 그러나 남는다.
이 남겨짐은 언어를 줄였기 때문이 아니라,
언어의 밀도를 높였기 때문이다.
한 문장은 단일한 의미로 끝나지 않는다.
그 문장은 읽는 순간 하나의 층위로 다가오지만, 시간이 지나면 또 다른 결로 열리고, 삶의 다른 자리에서는 전혀 다른 의미로 다시 살아난다.
이처럼 그의 문장은 닫혀 있지 않다.
오히려 독자의 경험과 시간 속에서 계속 확장되는 구조를 가진다.
이때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침묵’이다.
이 문학에서 침묵은 결핍이 아니다.
그것은 말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깊은 상태이며,
문장이 스스로를 넘어서는 순간이다.
김왕식의 문장은 모든 것을 설명하지 않는다.
결론을 서둘러 내리지 않으며, 의미를 끝까지 밀어붙이지도 않는다.
대신 어느 지점에서 멈춘다.
그리고 바로 그 멈춤의 자리에서,
독자의 사유가 시작된다.
이러한 구조는 독서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킨다.
독자는 더 이상 문장을 따라가는 데 그치지 않는다.
문장 앞에 머물고, 그 여백 속에서 스스로 생각하게 된다.
이때 독서는 단순한 이해의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자기 성찰의 과정으로 전환된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더 많은 정보를 얻는 일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다시 바라보는 시간이 된다.
청람서루의 출판 또한 이 언어의 태도를 그대로 따른다.
이 출판사의 책은 과잉의 설명을 지양하고,
문장이 스스로 설 수 있는 공간을 남겨둔다.
여백은 비어 있는 공간이 아니다.
그것은 가장 밀도 높은 사유가 머무는 자리다.
독자는 그 공간 속에서 자신의 경험을 불러오고,
문장을 다시 완성하게 된다.
이 문학에서 언어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말은 어떤 지점까지 독자를 데려가지만,
그 이후의 길은 독자가 스스로 걸어야 한다.
김왕식은 이 사실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다.
그래서 그의 문장은 앞서 나가지 않는다.
대신 곁에 머문다.
그리고 그 머묾 속에서,
독자는 비로소 자신과 마주하게 된다.
이러한 언어는 강하게 주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오래 남는다.
많이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깊이 스며든다.
청람서루와 김왕식의 문학이 지향하는 것은 하나다.
더 많이 전달하는 언어가 아니라,
더 오래 살아 있는 언어.
말로 완결되는 문장이 아니라,
침묵 속에서 다시 시작되는 문장.
이것이 바로 이들이 만들어가는 언어의 세계이며,
문학이 다시 인간의 깊이로 돌아가는 가장 본질적인 방식이다.
- 인격과 문학
— 삶이 문장을 증명하는 구조
김왕식의 문학이 설득력을 갖는 이유는 그의 인격과 분리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글은 기술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삶에서 비롯된 것이다.
오늘의 문학 환경에서는 문장과 삶이 종종 분리된다.
세련된 문장은 기술로 만들어질 수 있고, 깊이 있는 표현은 훈련을 통해 습득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문장은 때때로 일정한 감동을 주면서도 오래 남지 않는다. 그것은 언어의 완성도는 갖추었으나, 존재의 무게를 충분히 담지 못하기 때문이다.
김왕식의 문학은 이 지점에서 분명히 다르다.
그의 문장은 잘 쓰여서 감동을 주는 것이 아니라,
그가 살아온 방식이 그대로 스며 있기 때문에 깊이를 획득한다.
그는 드러내기보다 물러나고,
설명하기보다 기다리며,
앞서기보다 함께 걷는 태도를 지녀왔다.
이러한 삶의 방식은 선택된 자세가 아니라, 오랜 시간에 걸쳐 형성된 인격의 결이다. 그리고 그 결은 문장 속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그의 글이 조용한 이유는 의도적으로 낮춘 것이 아니라,
그의 삶이 이미 그러한 호흡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글이 깊은 이유 역시,
어떤 기교나 장식 때문이 아니라,
그가 오래 바라보고 오래 견뎌온 시간에서 비롯된다.
그의 문장은 삶의 연장선 위에 놓여 있다.
문장이 삶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삶이 문장을 증명하는 구조다.
이러한 관계는 그의 평론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그는 작품을 빠르게 해석하지 않는다.
서두르지 않고, 결론을 앞당기지 않으며,
작품과 함께 머무는 시간을 선택한다.
이 태도는 그의 삶과 정확히 일치한다.
그는 사람을 대할 때에도,
상대를 이해하기 전에 판단하지 않는다.
문학을 대하는 방식과 인간을 대하는 방식이
하나로 이어져 있는 것이다.
청람서루의 출판 철학 역시 이러한 인격적 기반 위에서 형성된다.
책을 만드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술이 아니라 태도다.
문장을 어떻게 배열할 것인가보다,
그 문장이 어떤 삶에서 나왔는가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시선.
이러한 시선은 책의 결을 바꾼다.
청람서루의 책이 조용하면서도 깊은 울림을 지니는 이유는,
그 안에 담긴 문장이 단순한 언어가 아니라
삶의 결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김왕식은 문학을 통해 무엇인가를 주장하려 하지 않는다.
그는 문학을 통해 인간을 더 깊이 이해하려 한다.
이 이해는 단번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오래 바라보고, 오래 머물며,
때로는 아무 말 없이 곁에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그의 문학은 바로 이러한 ‘머묾의 시간’을 기반으로 한다.
결국 그의 평론과 출판은 하나의 방향을 향한다.
문학을 통해 인간을 더 깊이 이해하려는 노력.
이 노력은 거창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조용히 지속된다.
그리고 바로 그 지속성 속에서
그의 문학은 힘을 갖는다.
많이 말하지 않지만 오래 남는 문장,
강하게 주장하지 않지만 깊이 스며드는 사유.
이 모든 것은 기술로 만들어질 수 없다.
그것은 오직
한 인간이 어떻게 살아왔는가에 의해
비로소 가능해진다.
따라서 김왕식의 문학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의 문장을 읽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그가 살아온 방식을 함께 바라보는 일이며,
그 삶이 어떻게 문장이 되었는지를 따라가는 일이다.
그 과정 속에서
독자는 자연스럽게 깨닫게 된다.
문학은 쓰는 것이 아니라,
살아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Ⅲ. 결론
— 문학은 왜 다시 낮아져야 하는가
오늘의 시대는 많은 것을 설명한다.
그러나 깊이 이해하지는 않는다.
지식은 넘쳐나고, 정보는 빠르게 순환하며, 언어는 끝없이 생산된다. 우리는 이전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알고 있고, 더 빠르게 이해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이 ‘이해’는 종종 표면에 머문다. 사물의 구조를 파악하는 데에는 능숙해졌지만, 그 안에 담긴 존재의 결을 오래 바라보는 일에는 점점 서툴러지고 있다.
지식은 축적되었지만,
인간은 여전히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러한 시대 속에서 문학은 다시 질문을 받는다.
문학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더 많은 것을 설명해야 하는가,
아니면 더 깊이 바라보아야 하는가.
김왕식의 ‘엎드린 평론’과 도서출판 청람서루의 출판 철학은 이 질문에 분명한 방향을 제시한다. 그것은 문학을 다시 낮추는 일이다.
여기서 낮아진다는 것은 위축되거나 후퇴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더 깊이 내려가기 위한 선택이다.
높이 올라간 시선은 넓게 볼 수 있지만,
낮아진 시선만이 비로소 가까이 닿을 수 있다.
문학이 인간을 이해하려 한다면,
그 출발점은 언제나 가까움이어야 한다.
김왕식의 비평은 바로 이 가까움을 향한다.
그는 작품을 설명하기보다 바라보고,
해석하기보다 함께 머문다.
이러한 태도는 문학을 권위의 자리에서 끌어내린다.
비평은 더 이상 판단의 언어가 아니라,
이해를 향한 조용한 시선이 된다.
청람서루의 출판 또한 이 흐름을 이어간다.
이곳에서 책은 독자를 이끄는 도구가 아니라,
독자가 스스로 길을 찾도록 곁에 놓이는 존재다.
책은 방향을 강요하지 않는다.
다만 빛을 비춘다.
그리고 그 빛은 크지 않지만,
오래 머문다.
오늘의 시대는 강한 빛을 선호한다.
즉각적으로 이해되고, 빠르게 소비되는 언어.
그러나 그러한 빛은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금세 사라지고, 또 다른 빛으로 대체된다.
반면 청람서루가 지향하는 문학은 다르다.
그것은 크지 않지만 꺼지지 않는 빛이다.
조용히 놓여 있으면서,
독자가 스스로 길을 찾을 수 있도록 돕는 빛.
이러한 문학은 즉각적인 효과를 만들지 않는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점점 더 깊어지는 힘을 지닌다.
어떤 문장은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이해되고,
어떤 사유는 삶의 특정한 순간에서 다시 살아난다.
이처럼 문학은
읽히는 순간이 아니라,
읽힌 이후의 시간 속에서 완성된다.
김왕식이 보여주는 ‘엎드린 평론’은 바로 이 시간을 견디는 비평이다.
그는 서두르지 않고, 결론을 앞당기지 않으며,
작품과 함께 머무는 방식을 선택한다.
이 머묾은 단순한 지연이 아니다.
그것은 이해를 향한 가장 깊은 방식이다.
문학은
얼마나 많이 말했는가로 남지 않는다.
얼마나 깊이 바라보았는가,
얼마나 오래 함께 머물렀는가로 남는다.
그리고 그 이해는 언제나
낮은 자리에서 시작된다.
높이 올라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낮아지는 것.
이것이야말로 오늘의 시대에 문학이 다시 선택해야 할 길이다.
청람서루는 그 길을 지켜가는 공간이다.
빠르게 사라지는 언어 속에서도
오래 남는 문장을 만들어내는 자리.
김왕식은 그 길을 살아내는 비평가다.
문학을 설명하는 사람이 아니라,
문학과 함께 머무는 사람.
결국 문학은 다시 인간에게로 돌아가야 한다.
지식을 넘어서,
설명을 넘어서,
존재를 향해.
그 길의 시작은 언제나 하나다.
조용히,
낮아지는 것에서부터.
ㅡ 김미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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