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송희 시인의 시 《공중 사다리》ㅡ 가벼움으로 도달하는 높이 — 영혼의 사다리를 오르는 언어 ㅡ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평하다
박송희 시인의 시 《공중 사다리》ㅡ 가벼움으로 도달하는 높이 — 영혼의 사다리를 오르는 언어 2026.04.05
□박송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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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 사다리
시인 박송희
고치 속 비딘실 뽑아
비단 사다리 천상의 누각 오른다
이승의 수난사 내려놓고
기왕이면 가벼울사 고운 비단
꽃비 단비 소나기 햇살이 거둬
새보다 가볍게 순간보다 빠르게
느림보다 여유롭게
간다 난다 오른다
꽃놀이 잠시다
봄비 내리기 전 실컨 웃고
맞아 놀던 벌 나비
꽃동산 물오를 때 가고지고
갓난 순결 대기가 맡아 달라
당부하면 달이될라 별이될라
사다리 동앗줄
사바에 허튼 울음 하마 제것일까
꽃핀 날 꽃으로 지는 향기
겨우네 닦은 공덕 구름 위로 가는
하늘비행 새가 줍고
바람이 나르는 꽃비 한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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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움으로 도달하는 높이
— 영혼의 사다리를 오르는 언어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말은 다듬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맑아질 때 비로소 빛을 낸다. 박송희 시인의 언어는 그 경지에 닿아 있다. 시어 하나하나가 손끝에서 빚어진 것이 아니라, 오래 견딘 시간 끝에 스스로 결을 얻은 듯하다. 조탁彫琢의 기술을 넘어, 언어가 제 자리를 찾아 스며든다.
덜어낼수록 높아진다.
이 시는 그 단순한 진실을 한 치의 흔들림 없이 밀고 간다. 하늘을 향해 오르려 애쓰는 몸짓이 아니라, 이미 깊이를 통과한 존재가 가볍게 떠오르는 방식이다. 무게를 버린 자리에서 비로소 상승은 시작된다.
“고치 속 비딘실”은 닫힌 시간이 아니라 변형의 밀도다. 그 속을 통과해 나온 실은 단순한 섬유가 아니라, 존재가 스스로를 통과하며 얻은 투명한 결이다. 그 실로 엮은 “비단 사다리”는 도구가 아니라 길이다. 고통을 견뎌낸 자만이 짤 수 있는, 자기 구원의 형식이다. “이승의 수난사 내려놓고”라는 구절에서 시는 단호해진다. 쥐고 있는 한 오를 수 없다는 것, 내려놓음이 곧 상승의 조건이라는 것.
이후의 리듬은 가볍다. 그러나 그 가벼움은 얇지 않다.
“새보다 가볍게 / 순간보다 빠르게 / 느림보다 여유롭게”
서로 다른 시간의 결들이 하나의 상태로 겹쳐진다. 빠름과 느림이 갈라지지 않는 자리, 그곳에서 존재는 비로소 자유로워진다. “간다, 난다, 오른다”는 동사의 흐름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존재가 스스로를 벗어나 확장되는 순간의 호흡이다.
그러나 시는 높이만을 말하지 않는다. “꽃놀이 잠시다”라는 한 문장은 모든 상승을 다시 땅으로 불러온다. 덧없음은 여기서 허무가 아니라 순환의 숨결이다. 벌과 나비가 떠나고 꽃이 지는 순간조차 하나의 흐름으로 받아들이는 태도, 그 담담함 속에 시인의 성품이 깃들어 있다. 맑으되 얕지 않고, 깊되 무겁지 않다.
“갓난 순결 대기”와 “달이 될라 별이 될라”는 귀환의 이미지다. 존재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더 큰 질서로 스며든다.
“사다리 동앗줄 / 사바에 허튼 울음 하마 제것일까”
이 물음은 조용히 그러나 깊게 파고든다. 붙들고 있던 슬픔과 집착이 과연 본질이었는가를 되묻는다. 결국 오르는 것은 몸이 아니라, 비워진 영혼이다.
마지막에 이르면 시는 하나의 향기로 남는다. “꽃핀 날 꽃으로 지는 향기”는 시작과 끝이 나뉘지 않는 상태, 피는 순간 이미 지는 것까지 품어내는 완성이다. 겨우내 닦은 공덕이 구름 위로 오르고, 새가 그것을 물고 바람이 이어 나른다. 개인의 시간이 자연의 질서로 풀려나는 순간이다.
이 시는 크게 말하지 않는다. 다만 낮게 스며들어, 한 가지를 남긴다.
높이는 멀리 있지 않다.
비워진 자리에서,
이미 시작되고 있다.
ㅡ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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