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왕식 평론의 가치철학과 미의식 ― 무릎의 자세로 완성되는 문학의 윤리ㅡ문학평론가 김기량
김왕식 평론의 가치철학과 미의식 ― 무릎의 자세로 완성되는 문학의 윤리 2026.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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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왕식 평론의 가치철학과 미의식
― 무릎의 자세로 완성되는 문학의 윤리
문학평론가 김기량
Ⅰ. 서론 ― 낮아짐에서 시작되는 사유의 깊이
문학평론은 오랫동안 해석의 권력을 중심으로 구축되어 왔다. 작품을 분석하고 의미를 규정하는 행위는 학문적 체계를 이루며, 동시에 평론가에게 일정한 지적 권위를 부여해왔다. 이 권위는 때로 문학을 이해하는 데 기여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작품 위에 군림하는 또 하나의 구조를 형성하기도 했다. 해석은 점점 정교해졌지만, 그 정교함이 오히려 작품과 독자 사이에 보이지 않는 장벽을 세우는 역설을 낳기도 했다. 문학을 읽는다는 단순하고 본질적인 행위는, 때로 해석이라는 이름 아래 복잡한 절차로 변질되었다.
이 지점에서 청람 김왕식의 평론은 기존의 질서에 균열을 낸다. 그는 평론가의 자리를 스스로 낮추며, 해석의 권력을 해체하는 길을 선택한다. 그의 평론은 ‘해석하는 자’의 위치에서 출발하지 않는다. 오히려 ‘엎드리는 자’, ‘섬기는 자’의 자리에서 시작된다. 이는 단순한 태도의 문제가 아니라, 문학을 대하는 인식 자체의 전환이다. 그는 평론이 작품을 규정하는 도구가 아니라, 작품과 독자가 서로 만날 수 있도록 돕는 매개여야 한다고 본다.
그가 말하는 “무릎의 학문”은 이 전환을 가장 명료하게 드러내는 개념이다.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자신을 낮추는 행위이면서 동시에 타자를 향해 열리는 자세다. 서 있는 자는 세계를 자신의 시선으로 재단하지만, 무릎을 꿇은 자는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준비를 갖춘다. 이때 평론은 더 이상 지식을 전시하는 장이 아니다. 그것은 타인의 언어를 훼손하지 않고 전달하기 위한 윤리적 실천이 된다.
김왕식에게 평론이란 지식의 축적
이나 해석의 완결이 아니다. 그것은관계를 회복하는 일이다. 작가가 건너온 세계와 독자가 아직 닿지 못한 세계 사이에서, 평론가는 그 둘을 이어주는 통로로 존재한다. 그는 이해를 강요하지 않는다. 대신 만남의 가능성을 열어둔다. 작품을 ‘설명’하기보다 ‘건네는’ 일, 그것이 그의 평론이 지향하는 본질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의 평론은 단순한 비평 행위를 넘어 하나의 철학으로 확장된다. 그것은 문학을 해석하는 기술이 아니라, 문학과 인간을 연결하는 태도의 문제이며, 나아가 인간이 타인의 세계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에 대한 윤리적 사유로 이어진다. 그의 평론은 문장을 통해 의미를 확정하기보다, 오히려 의미가 살아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한다.
김왕식의 평론은 질문을 남긴다. 평론은 무엇을 밝혀야 하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가능하게 해야 하는가. 이 질문 앞에서 그의 답은 분명하다. 평론은 높아지는 일이 아니라 낮아지는 일이며, 앞서는 일이 아니라 함께 걷는 일이다. 그리고 바로 그 낮아짐의 자리에서, 문학은 비로소 인간에게 닿는다.
Ⅱ. 본론
1 ― 낮아짐의 윤리와 관계의 회복
김왕식 평론의 출발점에는 언제나 스스로를 낮추는 태도가 놓여 있다. 이 낮아짐은 단순한 겸손의 미덕이 아니다. 그것은 평론이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는 평론가가 작품 위에 서서 의미를 규정하는 자리가 아니라, 작품 앞에서 자신을 비우고 그 세계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자리여야 한다고 본다. 이때 평론은 해석의 권력이 아니라 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행위로 바뀐다.
문학은 본질적으로 만남의 형식이다. 작가는 언어를 통해 자신의 내면을 열고, 독자는 그 언어를 통해 낯선 세계로 건너간다. 그러나 이 건너감은 언제나 쉽지 않다. 언어의 결은 다르고, 감정의 깊이 또한 서로 다르게 작용한다.
이 사이에서 평론이 등장하지만, 김왕식에게 평론은 이 간극을 자신의 논리로 메우는 작업이 아니다. 오히려 그 간극이 자연스럽게 이어질 수 있도록 환경을 정리하는 일에 가깝다.
그는 평론가가 더 많이 알고 더 정확하게 설명해야 한다는 통념을 경계한다. 지식은 이해를 돕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해를 가두는 틀이 되기도 한다. 해석이 단단해질수록 작품은 고정되고, 독자는 그 틀 안에서만 작품을 바라보게 된다. 이때 평론은 다리가 아니라 경계가 된다. 김왕식은 바로 이 지점에서 평론의 오만을 본다.
따라서 그의 평론은 설명을 줄이고 여백을 남긴다. 그 여백은 비어 있음이 아니라, 독자가 스스로 걸어 들어갈 수 있도록 열어둔 공간이다. 평론은 독자의 자리를 대신하지 않는다. 대신 작품으로 향하는 길을 정리하고, 그 길 위에서 독자가 자신의 속도로 걸을 수 있도록 돕는다. 이 과정에서 평론은 앞서 나가는 목소리가 아니라, 뒤에서 조용히 받쳐주는 힘이 된다.
또한 그의 평론은 경청에서 시작된다. 작품을 읽는다는 것은 단순히 문장을 해석하는 일이 아니라, 그 문장에 스며 있는 시간과 숨결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판단을 유보해야 한다. 이미 알고 있다는 태도는 작품을 재단하지만, 모른다는 태도는 작품을 살아 있게 한다. 김왕식이 말하는 낮아짐은 바로 이 경청의 자세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다.
이러한 태도 속에서 평론은 경쟁의 장이 아니라 공존의 장으로 변한다. 평론가는 작가를 평가하는 존재도, 독자를 이끄는 지도자도 아니다. 그는 두 세계 사이에서 흐름을 이어주는 존재다. 작품의 결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독자가 그 결을 따라갈 수 있도록 돕는 일. 그것이 그의 평론이 지향하는 본질이다.
김왕식의 평론은 관계를 회복하는 데 목적이 있다. 작가와 독자 사이의 거리, 언어와 감정 사이의 간극을 좁혀가는 과정 속에서, 평론가는 중심이 아니라 가장자리에 선다. 그 자리는 눈에 띄지 않지만, 가장 중요한 자리다.
그의 평론이 지향하는 것은 분명하다.
작품이 스스로 말하게 하고, 독자가 스스로 듣게 하는 것.
그 사이를 방해하지 않고 조용히 비워두는 것.
그 낮은 자리에서, 문학은 비로소 온전히 이어진다.
Ⅱ. 본론
2 ― 다리의 미학과 투명한 언어의 구조
김왕식 평론의 미의식은 ‘다리’라는 비유 속에서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다. 다리는 본래 연결을 위해 존재한다. 그러나 그 존재는 역설적이다. 다리는 스스로를 드러낼수록 기능을 잃고, 오히려 보이지 않을 때 가장 완전하게 작동한다. 사람은 다리를 바라보기 위해 건너는 것이 아니라, 건너기 위해 다리를 이용한다. 이 단순한 원리는 김왕식 평론의 미학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열쇠가 된다.
그는 평론이 이와 같은 구조를 가져야 한다고 본다. 평론이 스스로를 과도하게 드러내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통로가 아니라 장애물이 된다. 문장이 화려해지고, 개념이 과잉되며, 해석이 지나치게 정교해질수록 독자는 작품으로 향하기보다 평론에 머물게 된다. 그 결과 작품은 가려지고, 평론만 남는다. 김왕식은 이러한 상태를 문학의 본질에서 벗어난 것으로 본다.
따라서 그의 평론은 의도적으로 자신을 낮춘다. 그러나 이 낮아짐은 결코 단순한 평이함이나 소박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치열한 절제의 결과다. 무엇을 말할 것인가보다 무엇을 덜어낼 것인가를 먼저 고민하는 태도, 그 선택의 과정 속에서 그의 문장은 점점 투명해진다. 불필요한 장식을 걷어내고, 독자의 시선을 방해하는 요소를 제거하며, 오직 작품으로 향하는 길만을 남긴다.
이때 ‘투명성’은 그의 미의식의 핵심 개념으로 자리한다. 투명한 언어란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기능하는 언어다. 그것은 설명을 강요하지 않으면서 이해를 가능하게 하고, 의미를 규정하지 않으면서도 방향을 제시한다. 독자는 그 문장을 의식하기보다, 그 문장을 통과해 작품에 도달한다. 이처럼 김왕식의 평론은 ‘읽히는 글’이기 이전에 ‘건너가게 하는 글’로 존재한다.
또한 그의 미학은 ‘낮음의 구조’ 속에서 완성된다. 다리는 낮을수록 안정적이고, 많은 사람이 쉽게 건널 수 있다. 반대로 높고 화려한 다리는 시선을 끌 수는 있지만, 실제로 건너기에는 부담을 준다. 김왕식은 평론이 이와 같은 함정에 빠지는 것을 경계한다. 그는 평론이 독자의 지적 우월감을 자극하거나, 이해의 어려움을 통해 권위를 획득하려는 순간을 거부한다. 평론은 어렵게 만들어야 가치가 있다는 통념을 넘어, 쉽게 닿게 하는 데서 오히려 더 깊은 미를 찾는다.
이러한 태도는 그의 문장 구성 방식에서도 드러난다. 그는 개념을 중첩시키기보다 흐름을 따라간다. 논리를 세우되 그것이 독자의 호흡을 끊지 않도록 조절하며, 설명을 하되 그것이 작품의 여백을 침범하지 않도록 절제한다. 이 과정에서 그의 글은 마치 물처럼 흐른다. 독자는 그 흐름을 따라가며 자연스럽게 작품에 가까워진다.
김왕식 평론의 미의식은 ‘보이지 않는 기능성’에 있다. 드러나지 않으면서 작동하고, 주장하지 않으면서 전달하며, 앞서지 않으면서 이끄는 것. 이 역설적인 구조 속에서 그의 평론은 하나의 미적 완성을 이룬다.
그의 글은 스스로를 강조하지 않는다. 대신 조용히 자리를 내어준다. 그리고 그 비워진 자리 위로 작품이 들어오고, 독자의 감정이 흐른다. 이때 평론은 더 이상 중심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통로가 된다.
김왕식의 평론은 말한다.
좋은 평론이란 잘 보이는 글이 아니라, 잘 건너가게 하는 글이라는 것을.
Ⅱ. 본론
3 ― 모름의 철학과 과정의 미학
김왕식 평론의 가장 깊은 토대에는 ‘모름’에 대한 사유가 놓여 있다. 그는 평론가가 더 많이 알고 더 정확하게 판단해야 한다는 통념을 근본에서부터 의심한다. 일반적으로 평론은 지식의 축적과 분석의 정교함을 통해 완성된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그는 이 믿음이 오히려 작품의 생명력을 제한할 수 있다고 본다. 이미 알고 있다는 확신은 작품을 하나의 의미로 고정시키고, 그 안에서 독자의 해석 가능성을 차단하기 때문이다.
그가 말하는 ‘모름’은 단순한 무지가 아니다. 그것은 열려 있는 인식의 상태이며, 타자의 세계를 온전히 받아들이기 위한 적극적인 태도다. 모른다는 자각은 자신을 낮추고, 그 낮아짐은 경청으로 이어진다. 경청은 단순히 듣는 행위가 아니라, 타자의 언어가 자신의 내면에서 다시 살아 움직이도록 허용하는 일이다. 이때 평론가는 해석의 주체가 아니라, 의미가 형성되는 과정을 함께 따라가는 동반자가 된다.
이러한 태도는 평론을 ‘결과’가 아닌 ‘과정’으로 전환시킨다. 전통적인 평론이 하나의 결론을 향해 나아가는 구조를 가진다면, 김왕식의 평론은 결론을 유보한 채 흐름을 지속시키는 구조를 지닌다. 그는 작품을 하나의 정답으로 환원하지 않는다. 대신 작품이 독자 안에서 어떻게 살아 움직이는지를 주목한다. 평론은 그 움직임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 움직임이 가능하도록 돕는 일이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여백’이다. 그는 평론이 모든 것을 설명하려 할 때, 오히려 작품의 가능성이 축소된다고 본다. 설명이 많아질수록 독자의 참여는 줄어들고, 해석은 단일한 방향으로 수렴된다. 반대로 여백이 남아 있을 때, 독자는 그 빈자리를 자신의 경험과 감정으로 채우며 작품과 더 깊이 만난다. 김왕식의 평론은 바로 이 여백을 지키는 데서 출발한다.
또한 그의 평론은 기다림의 시간을 존중한다. 작품은 단번에 이해되는 대상이 아니라, 반복되는 읽기 속에서 점차 드러나는 존재다. 그는 이 과정을 단축시키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시간을 함께 견디며, 작품이 스스로 말을 걸어오는 순간을 기다린다. 이 기다림 속에서 평론은 서두르지 않는 사유가 되고, 독자 역시 조급함에서 벗어나 천천히 작품과 마주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 중심의 태도는 평론을 권력의 언어에서 해방시킨다. 결론을 내리는 자리는 언제나 권위를 동반한다. 그러나 결론을 유보하고 흐름을 따라가는 태도는 권위를 내려놓는 일이다. 김왕식의 평론은 바로 이 지점에서 윤리적 깊이를 획득한다. 그것은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보다, 무엇을 말하지 않을 것인가를 선택하는 힘에서 비롯된다.
그의 평론은 하나의 통로로 존재한다. 독자가 작품에 도달한 이후에도 그 통로는 남아 있지만, 더 이상 의식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통로가 아니라, 그 통로를 지나 도달한 세계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김왕식의 평론은 스스로를 목적지로 삼지 않는다. 그것은 언제나 과정 속에 머무르며, 독자가 작품과 만나는 순간 조용히 물러난다.
그의 평론이 지향하는 바는 분명하다.
해석을 완성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가 계속 이어지도록 하는 것.
그리고 그 열린 흐름 속에서, 문학은 다시 살아 움직인다.
Ⅱ. 본론
4 ― 비움의 미학과 스스로 물러나는 평론
김왕식 평론의 궁극적 지점에는 ‘비움’이라는 미학이 자리한다. 그는 평론이 무엇을 더하는 작업이 아니라, 무엇을 덜어내는 작업이라고 본다. 일반적으로 평론은 작품에 의미를 부여하고, 해석을 확장하며, 이해의 폭을 넓히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그러나 그는 이 ‘더함’의 과정이 오히려 작품의 본래적 울림을 가릴 수 있음을 경계한다.
설명이 쌓일수록 작품은 점점 멀어지고, 해석이 많아질수록 독자는 자신의 감각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그가 지향하는 평론은 덧붙이는 글이 아니라, 비워내는 글이다. 불필요한 개념을 걷어내고, 과도한 해석을 절제하며, 독자의 시선을 방해하는 요소를 하나씩 제거해나가는 과정. 이 비움은 단순한 축소가 아니라 정화에 가깝다. 작품이 스스로 말할 수 있도록 공간을 확보하는 일, 그것이 그의 평론이 수행하는 본질적 기능이다.
이때 평론가는 중심에서 한 걸음 물러난다.
그는 자신의 해석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다. 대신 작품이 드러날 수 있도록 자리를 내어준다. 이러한 물러남은 소극적인 태도가 아니라, 가장 적극적인 개입 방식이다.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작품의 존재를 더욱 선명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김왕식 평론의 독특한 미학이다.
그의 글에서 자주 느껴지는 고요함은 바로 이 비움에서 비롯된다. 문장은 과장되지 않고, 감정은 과도하게 부풀려지지 않으며, 논리는 독자를 압도하지 않는다. 대신 모든 요소가 절제된 상태로 균형을 이룬다. 이 균형 속에서 독자는 자연스럽게 작품과 마주하게 된다. 평론이 앞서 나가지 않기 때문에, 작품이 먼저 도착한다.
또한 그의 평론은 ‘사라짐의 미학’을 내포한다. 좋은 평론은 읽힌 뒤에 남지 않는다. 대신 작품만이 독자 안에 남는다. 이는 평론이 실패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가장 성공적인 상태다. 평론이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기능할 때, 그것은 이미 자신의 역할을 다한 것이다. 김왕식은 바로 이 ‘사라지는 평론’을 이상으로 삼는다.
이러한 태도는 평론의 존재 이유를 다시 묻게 한다. 평론은 무엇을 남기기 위해 존재하는가. 그는 평론이 자신의 이름이나 해석을 남기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이 독자 안에서 살아남도록 돕기 위해 존재한다고 본다. 이때 평론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 된다. 그러나 그 수단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다. 오히려 더 깊은 책임과 절제를 요구한다.
비움의 미학은 결국 자기 통제의 문제로 이어진다. 얼마나 말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 어디까지 말하지 않을 수 있는가. 얼마나 드러낼 수 있는가가 아니라, 어디까지 물러날 수 있는가. 김왕식의 평론은 바로 이 한계 지점에서 완성된다.
그는 평론을 통해 작품을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작품이 스스로 드러날 수 있도록 자리를 만든다. 그리고 그 자리가 충분히 확보되었을 때, 그는 조용히 물러난다.
그의 평론은 하나의 자세로 귀결된다.
앞에 서지 않고, 옆에 머물지 않으며, 뒤에서 조용히 밀어주는 것.
그 물러남의 자리에서, 문학은 비로소 가장 또렷하게 빛난다.
Ⅱ. 본론
5 ― 덜어냄의 철학과 본질의 회복
김왕식 평론의 궁극적 지점에는 ‘덜어냄’이라는 원리가 자리한다. 그는 평론을 더하는 작업이 아니라, 걷어내는 작업으로 이해한다. 일반적인 평론이 의미를 덧붙이고 해석을 확장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면, 그의 평론은 오히려 그 반대의 길을 택한다. 불필요하게 덧붙여진 설명, 과도하게 구조화된 개념, 작품 위에 쌓인 해석의 층위를 하나씩 걷어내며, 언어가 처음 태어났을 때의 자리로 되돌리는 일. 그것이 그가 말하는 평론의 본질이다.
덜어낸다는 것은 단순한 축소가 아니다. 그것은 본질을 드러내기 위한 선택이다. 사물은 덧붙여질수록 흐려지고, 걷어낼수록 선명해진다.
문학 또한 마찬가지다. 작품은 본래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 움직일 수 있는 구조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그 위에 과잉된 해석이 덧씌워질 때, 그 생명력은 점차 약해진다. 김왕식은 바로 이 지점을 주목한다. 그는 작품을 설명하기보다, 작품이 스스로 숨 쉴 수 있도록 주변의 과잉을 제거한다.
이 과정에서 그의 평론은 일종의 ‘정리된 침묵’에 가까워진다. 말해야 할 것을 줄이고, 남겨야 할 것을 선별하는 작업. 이때 중요한 것은 무엇을 더 말할 것인가가 아니라, 무엇을 말하지 않을 것인가다. 덜어냄은 언어를 절제하는 기술이면서 동시에 사유를 깊게 만드는 방식이다. 불필요한 것을 제거할수록 남는 것은 단순해지지만, 그 단순함은 결코 얕지 않다. 오히려 그 안에는 더 밀도 높은 의미가 응축된다.
김왕식의 평론이 지닌 힘은 바로 이 밀도에서 비롯된다. 그는 많은 것을 말하지 않지만, 필요한 것은 정확히 남긴다. 그 남겨진 문장은 독자의 내면에서 다시 확장된다. 설명을 통해 이해를 강요하는 대신, 여백을 통해 사유를 유도하는 방식이다. 이때 평론은 닫힌 결론이 아니라 열린 질문으로 남는다.
또한 덜어냄의 철학은 평론가 자신의 위치를 다시 설정하게 만든다. 그는 자신의 해석을 중심에 두지 않는다. 대신 작품이 중심이 되도록 자리를 비운다. 이 비움은 소극적인 후퇴가 아니라, 가장 적극적인 선택이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작품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게 하는 것, 그것이 덜어냄의 미학이 지닌 역설적 힘이다.
이러한 태도는 평론을 단순한 해설이 아닌 하나의 수행으로 끌어올린다. 덜어내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말할 수 있음에도 말하지 않는 절제, 드러낼 수 있음에도 물러나는 선택, 그것은 끊임없는 자기 통제를 요구한다. 김왕식의 평론은 바로 이 통제의 과정 속에서 형성된다.
그의 평론은 본질을 향해 나아간다. 복잡한 것을 단순하게 만들고, 흐려진 것을 다시 선명하게 하며, 가려진 것을 드러내는 일. 이 과정에서 평론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대신 작품이 스스로 서도록 돕는다.
그의 평론이 말하는 것은 분명하다.
좋은 평론은 많이 말하는 글이 아니라, 가장 필요한 것만 남기는 글이라는 것.
그리고 그 덜어냄의 끝에서, 문학은 비로소 본래의 얼굴을 회복한다.
Ⅲ. 결론
― 낮아짐과 덜어냄으로 완성되는 문학의 길
김왕식 평론의 가치철학과 미의식은 결국 하나의 방향으로 수렴된다. 그것은 높아지려는 욕망을 버리고, 낮아짐을 통해 문학의 본질에 다가가려는 태도다. 그는 평론을 통해 무엇을 더 드러내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무엇이 가려져 있는지를 살피고, 그것을 조용히 걷어내며, 작품과 독자가 다시 만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한다. 이 과정에서 평론은 중심이 아니라 주변이 되며, 주장이 아니라 흐름이 된다.
그의 평론이 지닌 가장 큰 특징은 스스로를 앞세우지 않는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평론은 해석의 완결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려 한다. 그러나 김왕식은 그 반대의 길을 택한다. 그는 해석을 완성하기보다, 이해가 계속 이어질 수 있도록 여지를 남긴다. 설명을 통해 독자를 이끄는 대신, 독자가 스스로 걸어갈 수 있도록 길을 비워둔다. 이때 평론은 더 이상 결과를 제시하는 글이 아니라, 하나의 과정으로 존재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드러나는 그의 미의식은 투명성과 절제, 그리고 덜어냄의 원리로 집약된다. 그의 문장은 화려하지 않지만 단단하고, 길지 않지만 깊다. 그 안에는 불필요한 장식이 없다. 대신 꼭 필요한 것만 남아 있다. 이처럼 절제된 언어는 독자의 시선을 방해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작품으로 향하게 한다. 결국 그의 평론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더 강하게 작동한다.
또한 그의 평론은 윤리적 깊이를 지닌다. 그것은 단순히 글쓰기의 방식에 머무르지 않는다. 타인의 언어를 대하는 태도, 타인의 세계를 받아들이는 자세, 그리고 그 세계를 독자에게 전달하는 과정 속에서 요구되는 책임감이 그의 평론 전반을 관통한다. 그는 평론을 권력의 언어로 사용하지 않는다. 대신 관계를 회복하는 도구로 삼는다. 작가와 독자 사이에 놓인 보이지 않는 간극을 줄이고, 서로 다른 감각이 만날 수 있도록 돕는 일, 그것이 그의 평론이 지향하는 윤리다.
김왕식의 평론은 하나의 길을 만든다. 그 길은 화려하지 않다. 눈에 잘 띄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 위를 걷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작품에 도달하게 된다. 평론이 길이 되는 순간, 문학은 다시 살아난다.
그의 글은 끝내 자신을 남기지 않는다. 대신 작품이 남고, 독자의 감정이 남는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조용히 작동했던 평론의 흔적은 어느새 사라진다. 그러나 바로 그 사라짐 속에서 평론은 가장 온전한 형태로 완성된다.
김왕식이 보여주는 평론의 길은 분명하다.
많이 아는 데서 시작되지 않고, 많이 비우는 데서 시작되는 글쓰기.
앞서 말하는 데 있지 않고, 끝까지 남겨두는 데 있는 태도.
그는 오늘도 낮은 자리에서 문학을 바라본다.
그 시선은 겸손하지만, 결코 가볍지 않다.
그리고 바로 그 낮아짐의 자리에서, 문학은 다시 사람에게 닿는다.
ㅡ 문학평론가 김기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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