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

하루의 태반을 통과한 언어 — 익숙한 것을 낯설게 비트는 박송희 시인의《0시 일 초 전》 ㅡ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평하다

하루의 태반을 통과한 언어 — 익숙한 것을 낯설게 비트는 박송희 시인의《0시 일 초 전》 2026.04.16
하루의 태반을 통과한 언어 — 익숙한 것을 낯설게 비트는 박송희 시인의《0시 일 초 전》

0시 일 초 전

시인 박송희

꼬리의 위용 도약한다

똑딱 날개

날이 바뀌는 날카로운 생기

연하게 받아준 첫시간 다른 날

이름 지은 갓밝이

검푸른 꼭두새벽

진통 치르는 탯덩이 태양

0 시의 발아 신神이 한다

하루의 기척

생명의 각별들

눈뜨는 빛 어둠 젖히는 발광

우주의 자지러진 울림

소리 머금은 굉음

0 시의 시발

태양을 들어 올린 핏빛 해산

하늘과 땅 비집고 맞물려 돈다

  1. 4 : 16

하루의 태반을 통과한 언어

— 익숙한 것을 낯설게 비트는 박송희 시인의《0시 일 초 전》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얼마나 깊게 사색해야 이런 시에 이를 수 있을까. 시간의 가장 얇은 막, 날이 바뀌기 직전의 숨막히는 찰나를 이처럼 생생한 생성의 장면으로 바꾸어 놓는 일은, 단순한 기교만으로는 불가능하다.

박송희 시인의 언어는 순간을 묘사하는 데 머물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근원을 끝까지 응시한 뒤, 그 응시의 끝에서 비로소 폭발하듯 터져 나온다. 그래서 그의 시는 대개 사유의 결과이면서 동시에 분출의 형식이다.

깊이 가라앉은 사색이 한순간 일필휘지로 솟구쳐 오른 흔적, 바로 그런 힘이 이 작품 전편에 팽팽히 살아 있다.

박송희 시인은 붓을 잡으면 一筆揮之로 글을 짓는다는 말이 결코 과장이 아님을 이 작품이 증명한다.

여기서 말하는 一筆揮之는 가벼운 즉흥이 아니다. 오래 숙성된 내면의 긴장, 세계를 바라보는 시인의 근원적 태도, 사물의 내부를 꿰뚫는 관조가 한순간 거침없이 형상화되는 상태다. 그의 속도는 얕음의 속도가 아니라, 충분히 깊어진 사유가 더는 머물 수 없어 밖으로 흘러나오는 속도다.

첫 구절 “꼬리의 위용 도약한다”에서 이미 시간은 죽은 단위가 아니다. 시간은 꼬리를 지닌 생명체처럼 꿈틀거리며, 끝을 접는 대신 다음을 향해 튀어 오른다. ‘꼬리’는 소멸의 잔재가 아니라 도약의 추진력이다. 끝이 곧 시작을 밀어 올리는 구조, 여기에 박송희 시인의 시간관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시간은 흘러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새 생명을 낳는 운동이다.

이어지는 “똑딱 날개”는 더욱 인상적이다. 흔히 시계 소리로 소비될 ‘똑딱’이 이 작품 안에서는 날개가 된다. 기계적 반복이 생명의 비상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박송희 시인의 미의식은 바로 이런 자리에서 빛난다.

그는 익숙한 것을 낯설게 비틀어 사물의 본질을 새롭게 드러낸다. 시간은 숫자가 아니고, 날개이며, 생기이며, 우주의 고동이다. 이러한 시적 전환은 세계를 사물로 보지 않고 살아 움직이는 존재의 장으로 보는 시인의 가치철학과 맞닿아 있다.

“날이 바뀌는 날카로운 생기 / 연하게 받아준 첫시간 다른 날”에서는 강함과 여림이 한 몸처럼 포개진다. 날이 바뀌는 순간은 날카롭다. 경계는 늘 절단의 감각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탄생 직후의 시간은 또 “연하게 받아준” 시간이다. 생성은 폭력과 품음, 절단과 수용을 함께 지닌다. 박송희 시인의 언어는 이 이중성을 놓치지 않는다. 강인함 속의 연함, 분출 속의 보듬음, 이것이 그의 시 세계를 고급스럽게 만드는 미적 긴장이다.

“검푸른 꼭두새벽 / 진통 치르는 탯덩이 태양”에 이르면 시의 상상력은 단번에 우주적 차원으로 치솟는다. 태양은 단순히 떠오르는 해가 아니다. 진통 끝에 밀려 나오는 ‘탯덩이’다. 이 얼마나 대담한 이미지인가. 우주의 새벽을 출산의 현장으로 바꾸는 이 발상은 생명을 세계 인식의 중심에 두는 시인의 철학을 웅변한다. 존재는 저절로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통과하여 태어난다. 박송희 시인의 시에서 생명은 관념이 아니라 생생한 진통의 현실이다.

“0시의 발아 신神이 한다”는 구절에는 더욱 깊은 차원의 미학이 숨어 있다. 0시는 단순한 시간 표기가 아니다. 아무것도 없는 공백이 아니라, 모든 것이 움트는 씨앗의 자리다. 거기에 ‘신’을 불러들인 것은 시간의 시작을 성스러운 창조의 차원으로 끌어올리기 위함이다. 박송희 시인의 가치철학은 이 대목에서 분명해진다. 세계는 무의미한 반복이 아니라, 매 순간 새롭게 창조되는 경이의 현장이다. 그러므로 하루는 소비의 단위가 아니라 경외의 대상이다.

중반부 “하루의 기척 / 생명의 각별들”은 시인의 감각이 얼마나 미세한 결을 향해 열려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는 거대한 담론으로 생명을 말하지 않는다. ‘기척’과 ‘각별들’ 같은 섬세한 표현으로, 깨어남의 수많은 결을 포착한다. 존재는 하나의 덩어리가 아니라 수많은 미세한 떨림의 집합이라는 인식, 그것이 이 작품을 단단하면서도 섬세하게 만든다. 박송희 시인의 미의식은 바로 이처럼 거대함과 미세함을 동시에 껴안는 데 있다.

“눈뜨는 빛 어둠 젖히는 발광 / 우주의 자지러진 울림”에서는 정적인 풍경이 없다. 모든 것이 운동이며 충돌이며 산통이다. 빛은 단순히 밝히는 것이 아니라 어둠을 젖혀내며 나온다. 탄생은 언제나 마찰을 동반한다.

이러한 이미지 구성은 박송희 시인이 세계를 평온한 질서보다 역동적 생성의 현장으로 바라본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의 철학은 안주보다 갱신에 가깝고, 정지보다 생성에 가깝다.

마지막 연 “소리 머금은 굉음 / 0시의 시발 / 태양을 들어 올린 핏빛 해산 / 하늘과 땅 비집고 맞물려 돈다”는 이 작품의 정점이다. 응축된 침묵이 굉음으로 바뀌고, 숫자로 보이던 0시는 우주의 시동점이 된다.

특히 “핏빛 해산”은 박송희 시인의 미학을 대표할 만한 표현이다. 그는 새로움을 장식으로 다루지 않는다. 새로움은 반드시 통증을 통과해야 한다는 존재 인식을 끝까지 밀고 간다. 그래서 그의 시에서 아름다움은 가벼운 수사가 아니라, 생명의 근원에서 솟아나는 장엄함이 된다.

박송희 시인의 작품 세계를 떠받치는 것은, 존재를 표면으로 보지 않는 깊은 사색과 그 사색을 단숨에 언어로 돌려세우는 응축의 힘이다. 깊은 사색의 순간 분출이라는 표현이 가장 잘 어울리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오래 침잠한 정신이 한순간 번개처럼 종이 위를 가로지르며, 시간의 내부와 생명의 비밀을 동시에 드러낸다.

이 작품은 하루의 시작을 말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시간의 탄생, 생명의 원형, 우주의 진통을 한 편의 시 안에 밀도 높게 접어 넣는다. 박송희 시인의 가치철학은 생성에 대한 경외이며, 그의 미의식은 그 경외를 가장 압축된 언어로 빚어내는 데 있다. 그래서 그의 시는 읽는 순간보다 읽은 뒤가 더 크다. 한 줄 한 줄이 지나간 자리에, 하루가 새로 태어나는 소리와 함께 존재의 붉은 맥박이 오래 남는다.

ㅡ 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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