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찰

전영애 교수의 삶 ㅡ여백으로 완성된 삶, 덜어냄이 만든 사유의 깊이 ㅡ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전영애 교수의 삶 ㅡ여백으로 완성된 삶, 덜어냄이 만든 사유의 깊이 2026.04.26
전영애 교수의 삶 ㅡ여백으로 완성된 삶, 덜어냄이 만든 사유의 깊이

전영애 교수의 삶

ㅡ여백으로 완성된 삶, 덜어냄이 만든 사유의 깊이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한 사람의 삶은 때로 한 권의 책보다 깊다. 문장은 끝이 있지만, 삶은 끝내 여백을 남기기 때문이다.

이 글은 무엇을 더하기보다 덜어내는 선택을 통해 자신을 증명해 온 한 인간의 태도에서 출발한다. 성취의 정점에서 멈추지 않고, 외려 내려와 비워 가는 길을 택한 삶. 그 길 위에서 드러나는 사유와 실천을 따라가며,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방향을 조용히 되묻고자 한다.

우리는 대개 넓어지는 것을 성장이라 믿고, 많아지는 것을 풍요라 여긴다. 그러나 삶은 때때로 그 믿음을 거슬러, 줄어듦 속에서 깊어지는 세계를 보여준다. 비움은 상실이 아니라 선택이며, 포기가 아니라 본질을 향한 결단이다.

이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여백’은 단순한 공간이 아니라 그러한 삶의 태도를 상징하는 하나의 언어다.

이 글은 독자를 어떤 결론으로 이끌기보다, 하나의 시선 앞에 조용히 세우기 위한 문턱이다.

화려한 언어보다 낮은 자리의 진실을, 복잡한 해석보다 단순한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려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각자의 삶 속에 남겨진 여백을 다시 바라보게 되기를 바란다.

비워진 자리에서 비로소 드러나는 것들이 있다. 이 글은 그 조용한 드러남을 따라가는 작은 기록이다.

  1. 수석의 자리에서 내려오는 법

서울대학교를 전체 수석으로 졸업했다는 사실은 한 인간의 능력을 증명하는 가장 분명한 언어다. 그것은 오랜 시간의 집중과 절제, 그리고 스스로를 밀어붙인 결과가 응축된 하나의 결실이다. 그 정점은 종종 또 다른 질문을 불러온다. 더 올라갈 것인가, 아니면 내려올 것인가. 대부분은 그 자리를 지키려 한다. 높이는 곧 존재의 증명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진정한 사유는 그 정점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자리를 내려오는 순간, 비로소 깊어진다. 높이는 시야를 넓혀 주지만, 깊이는 존재를 바꾼다. 내려온다는 것은 포기가 아니라 선택이다. 더 이상 증명하지 않아도 된다는 자각, 이미 충분하다는 내면의 확신이 있을 때만 가능한 결단이다.

전영애 교수는 바로 그 선택을 택한 사람이다. 그는 성취를 더 쌓는 대신, 그것을 덜어내는 길로 방향을 돌렸다. 세계가 인정하는 괴테 연구자로 자리 잡은 이후에도, 더 큰 명성과 영향력을 향해 나아가기보다, 삶의 밀도를 낮추고 본질에 가까워지는 길을 선택했다. 이는 단순한 삶의 방식이 아니라, 사유의 방향을 바꾸는 일이었다.

‘더 많이 가지는 삶’이 아니라 ‘덜어내며 사는 삶’을 중심에 둔다는 것은, 외부의 기준이 아니라 내부의 기준으로 자신을 다시 세운다는 뜻이다. 무엇을 이루었는가보다 어떻게 존재하는가를 묻는 태도. 그 물음 앞에서 성취는 더 이상 목적이 아니라 하나의 과정으로 남는다.

학문의 높이는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러나 삶의 태도는 낮아졌다. 그 낮아짐은 결코 위축이 아니라 확장이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더 넓은 세계를 받아들이는 방식, 앞에 서기보다 옆에 서는 선택. 그 속에서 사유는 더욱 자유로워지고, 인간은 더욱 단단해진다.

내려온 자리에서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위에서는 보이지 않던 관계의 결, 사물의 미세한 떨림, 그리고 자신 안에 남아 있던 질문들. 그 질문들과 마주하는 시간이 쌓일 때, 사유는 깊어지고 삶은 비로소 자신의 속도를 갖는다.

수석의 자리는 하나의 도달점이지만, 내려오는 순간 그것은 출발점이 된다. 그리고 그 출발은, 더 높이 오르기 위한 것이 아니라 더 깊이 살아가기 위한 길로 이어진다.

  1. ‘여백’이라는 이름의 공간

여주의 한적한 자리, 그곳에 ‘여백’이라 불리는 공간이 있다. 이름부터가 하나의 선언처럼 들린다. 무엇을 더 채우기 위한 장소가 아니라, 이미 넘쳐나는 것들 사이에서 비워 두기 위해 마련된 자리. 그 이름에는 방향이 담겨 있다. 더하기가 아니라 덜어내기로 나아가려는 의지, 그리고 그 비움 속에서만 비로소 드러나는 삶의 본질에 대한 신뢰가 깃들어 있다.

이 공간은 단순한 건축물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철학이며, 동시에 삶을 다시 배열하는 방식이다. 도시의 속도와 밀도를 벗어난 자리에서, 사물은 점차 줄어들고 불필요한 장식은 사라진다. 대신 그 자리를 채우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다. 흘러가는 시간, 고요히 머무는 공기, 말없이 스며드는 빛과 그림자. 이 모든 것이 ‘여백’이라는 이름 아래 서로를 방해하지 않고 공존한다.

이곳에서는 말이 줄어든다. 설명하려는 욕망이 사라지고, 드러내려는 의지가 잦아든다. 그 자리에 길어지는 것은 생각이다. 짧고 빠르게 소비되던 사유가 아니라, 천천히 머물며 스스로를 깊게 파고드는 생각. 여백은 그렇게 인간을 바깥이 아니라 안쪽으로 이끈다. 넓은 공간이 시선을 흩뜨린다면, 비워진 공간은 시선을 모은다. 그 집중 속에서 비로소 자신과 마주하는 시간이 시작된다.

여백은 결코 공허가 아니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가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걷어낸 자리에서 남는 충만이다. 비워졌기 때문에 더 또렷해지고, 덜어냈기 때문에 더 깊어진다. 채워진 것들 사이에서는 보이지 않던 본질이, 비워진 자리에서는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여백’이라는 공간은 머무는 장소가 아니라 돌아보게 하는 장치다. 무엇을 더 가질 것인가가 아니라, 무엇을 덜어낼 것인가를 묻게 하는 자리. 그 질문 앞에서 인간은 비로소 삶의 무게를 다시 가늠하게 된다. 그리고 그 순간, 공간은 더 이상 외부의 구조가 아니라 내면의 형태로 옮겨온다.

  1. 머슴이라 부르는 삶

매일 아침, 그는 잡초를 뽑는다. 아직 햇빛이 완전히 들지 않은 시간, 땅은 밤의 기운을 조금 더 품고 있고, 공기는 말없이 가라앉아 있다. 그 속에서 손에 흙을 묻히고 허리를 굽힌 채, 그는 반복되는 동작에 자신을 맡긴다. 특별한 의식도, 과장된 의미도 없다. 다만 하루를 시작하는 가장 낮은 자리에서, 몸으로 먼저 삶을 만난다. 그리고 그 노동의 한가운데에서 스스로를 ‘머슴’이라 부른다.

이 표현은 겸손을 꾸미기 위한 언어가 아니다. 그것은 삶의 중심을 어디에 둘 것인가에 대한 분명한 선택이다. 머슴은 앞에 서는 사람이 아니라 뒤에서 받치는 사람이다. 드러나기보다 유지하고, 지배하기보다 돌보는 존재다. 그는 자신의 삶을 그렇게 이해한다. 지식을 쌓아 올린 사람으로 남기보다, 삶을 돌보는 사람으로 남겠다는 다짐. 그것이 이 한마디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지식은 인간을 높일 수 있다. 그러나 높아진 자리는 종종 사람을 자신에게서 멀어지게 만든다. 반면 돌보는 삶은 인간을 낮추지만, 그 낮아짐 속에서 오히려 자신과 더 가까워지게 한다. 흙을 만지는 손끝에서, 사소한 풀 한 포기를 뽑아내는 반복 속에서, 그는 삶의 본질을 다시 확인한다. 거창한 개념이나 화려한 사유가 아니라, 눈앞의 것을 성실히 돌보는 태도야말로 인간을 지탱하는 가장 단단한 기반이라는 사실을.

그는 자신의 삶을 관리하는 주인이 아니라, 그 삶을 섬기는 존재로 자신을 위치시킨다. 이 전환은 작지만 결정적이다. 주인으로 서는 순간, 삶은 통제의 대상이 되지만, 머슴으로 서는 순간 삶은 함께 살아가야 할 관계가 된다. 그 관계 속에서 인간은 억지로 끌고 가지 않고, 귀 기울이며 따라간다.

그때 비로소 교만은 자리를 잃는다. 자신을 증명하려는 욕망이 사라지고, 남보다 앞서려는 조급함이 가라앉는다. 대신 남는 것은 묵묵함이다. 드러나지 않아도 흔들리지 않는 태도, 보이지 않아도 계속되는 성실.

머슴이라 부르는 삶은 낮아지는 선택이 아니라, 가장 깊은 자리를 향해 내려가는 길이다. 그리고 그 길 위에서 인간은 비로소 자신을 잃지 않는 법을 배운다.

  1. 0.8평의 방이 만든 사유

그가 머무는 공간은 겨우 0.8평 남짓한 구석방이다. 몸을 펴기조차 어려운 크기, 한 번 방향을 바꾸려면 의식적으로 움직여야 하는 협소함. 그곳에는 넉넉함이 없다. 그러나 바로 그 결핍이 이 공간을 특별하게 만든다. 넓지 않기 때문에 시선은 자연스럽게 안으로 향하고, 밖으로 흩어지던 감각은 하나의 중심으로 모인다.

넓은 공간은 인간에게 자유를 주는 듯 보이지만, 때로는 그 자유가 사유를 분산시키기도 한다. 선택지가 많아질수록 생각은 쉽게 흩어지고, 여백이 많을수록 집중은 느슨해진다. 반대로 좁은 공간은 선택을 줄인다. 움직임은 최소화되고, 불필요한 동선은 사라진다. 그 자리에 남는 것은 오직 ‘머무름’이다. 그리고 그 머무름 속에서 사유는 비로소 깊이를 갖는다.

이 방에서는 밖으로 나아가는 대신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시선은 사물 위를 떠돌지 않고, 하나의 지점에 오래 머문다. 그 고요한 집중은 점차 자신에게로 향한다. 바깥의 세계를 이해하려던 시도는 어느 순간, 자신을 이해하려는 물음으로 바뀐다. 좁아진 공간이 사유의 지평을 넓힌다는 말은, 바로 이 전환에서 비롯된다.

불편함 또한 이 공간의 중요한 요소다. 몸을 자유롭게 펼 수 없다는 감각, 익숙한 동작이 제한된다는 사실은 인간을 끊임없이 현재로 되돌린다. 편안함은 종종 생각을 무디게 하지만, 불편함은 의식을 또렷하게 만든다. 이 방의 불편은 단순한 제약이 아니라, 자신을 놓치지 않게 하는 장치다.

0.8평의 공간은 작지만 단단한 질문을 품고 있다. 얼마나 넓어야 충분한가가 아니라, 얼마나 줄여야 본질에 닿을 수 있는가. 이 질문 앞에서 공간의 크기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 안에서 어떤 태도로 머무는가이다.

그 방은 비좁다. 그 비좁음 속에서 사유는 확장된다. 몸은 제한되지만, 생각은 오히려 멀리 나아간다. 그 역설 속에서 인간은 하나의 사실을 깨닫게 된다. 넓어야 깊어지는 것이 아니라, 깊어질 때 비로소 넓어진다는 것을.

  1. 괴테의 가르침을 사는 방식

요한 볼프강 폰 괴테는 인간의 내면을 가장 정교하게 들여다본 사상가 중 한 사람이다. 그의 언어는 단순한 문장이 아니라 삶의 방향을 가르는 기준선에 가깝다. “가진 것이 많을수록 마음은 가난해진다”는 통찰 또한 그러하다. 이 말은 소유를 부정하기 위한 선언이 아니라, 인간이 무엇에 의해 흔들리는 존재인지를 꿰뚫는 경계의 언어다. 많이 가질수록 더 불안해지고, 더 채울수록 더 결핍을 느끼는 역설. 괴테는 그 지점을 정확히 짚어냈다.

전영애 교수는 이 문장을 텍스트로만 남겨두지 않았다. 연구로 이해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그것을 삶으로 옮겼다. 학자로서의 성취는 이미 충분했지만, 그는 그 성취를 더 확장하기보다 스스로 덜어내는 방향을 택했다. 많이 가지는 대신 줄이고, 높이 오르는 대신 낮아지며, 채우는 대신 비워내는 삶. 그 선택은 외부에서 보면 단순해 보일 수 있으나, 내면에서는 끊임없는 결단을 요구하는 길이다.

이러한 실천은 단순한 생활 방식의 변화가 아니다. 그것은 존재를 대하는 태도의 전환이다. 무엇을 더 얻을 것인가가 아니라, 무엇을 내려놓을 것인가를 묻는 삶. 그 물음 앞에서 인간은 자신의 욕망과 마주하게 되고, 그 욕망을 다스리는 과정 속에서 비로소 자유에 가까워진다. 괴테의 문장이 이론이 아니라 살아 있는 힘이 되는 순간이 바로 여기다.

학문은 이해를 깊게 만든다. 삶으로 옮겨지지 않은 이해는 결국 머무르지 못한다. 전영애의 선택은 그 간극을 건너는 행위다. 책 속의 문장이 일상의 태도로 이어질 때, 사유는 비로소 완성된다. 그 완성은 화려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오히려 조용하고 단순한 반복 속에서, 서서히 삶의 결을 바꾸어 간다.

괴테의 가르침을 산다는 것은 어떤 특별한 선언을 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매일의 선택 속에서 조금씩 덜어내는 일, 자신을 낮추고 비워내는 과정을 통해 본질에 가까워지는 일이다. 그 실천은 학문을 넘어선다. 그것은 더 이상 생각이 아니라 존재의 방식이 된다.

  1. 좁아진 공간, 넓어진 생각

그는 말한다.

“공간이 좁아지니 비로소 생각이 넓어졌다.”

이 문장은 수사적 장치가 아니라, 오랜 체험에서 길어 올린 진술이다. 넓어지는 것만이 확장이라고 믿어 온 통념을 조용히 거스르는 말. 우리는 흔히 더 큰 집, 더 많은 자리, 더 넓은 환경을 통해 삶이 풍요로워진다고 여긴다. 그러나 그 풍요가 언제나 깊이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넓어질수록 시선은 분산되고, 많아질수록 마음은 쉽게 흐트러진다.

외부의 확장이 멈출 때, 비로소 내부의 확장이 시작된다. 움직임이 줄어들고 선택이 제한될수록, 인간은 자연스럽게 안쪽을 바라보게 된다. 바깥을 향해 뻗어나가던 감각이 서서히 방향을 바꾸어 자신에게로 돌아온다. 그 돌아옴 속에서 비로소 생각은 깊이를 얻는다. 얕게 스치던 사유가 머물고, 머물던 생각은 점차 뿌리를 내린다.

소유가 줄어들수록 감각은 더 섬세해진다. 불필요한 것들이 사라진 자리에는 작은 변화들이 또렷하게 드러난다. 빛의 미세한 흔들림, 공기의 결, 사물과 사물 사이의 간격. 이전에는 지나쳤던 것들이 이제는 의미를 갖기 시작한다. 그 섬세함이 사유를 이끈다. 생각은 더 이상 빠르게 소비되지 않고, 천천히 스며들며 깊어진다.

넓어짐의 기준은 외부의 크기가 아니라 내부의 밀도에 있다. 얼마나 많은 것을 가졌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깊이 바라볼 수 있는가가 인간의 크기를 결정한다. 좁아진 공간은 그 밀도를 높이는 장치다. 불필요한 확장을 멈추게 하고, 본질에 집중하도록 이끈다.

인간이 넓어지는 길은 밖이 아니라 안에 있다. 더 멀리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이 내려가는 일. 그 내려감 속에서 비로소 보이지 않던 세계가 열린다. 그리고 그 세계는 어떤 넓은 공간보다도 더 크고, 더 깊은 울림을 품고 있다.

  1. 비움이 남기는 것

비운다는 것은 잃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남기는 일이다.

우리는 흔히 비움을 결핍으로 이해한다. 손에 쥐고 있던 것을 내려놓는 순간, 무엇인가 사라진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러나 삶은 그 반대의 방식으로 움직인다. 불필요한 것을 덜어낼 때, 비로소 남아야 할 것이 또렷하게 드러난다. 넘쳐나는 것들 속에서는 보이지 않던 본질이, 비워진 자리에서는 조용히 모습을 드러낸다. 비움은 공백이 아니라, 본질을 드러내는 가장 단순한 방식이다.

전영애 교수의 삶은 이 사실을 말없이 증명한다. 그는 더 채우는 길 대신 덜어내는 길을 택했고, 더 높아지는 대신 낮아지는 자리를 선택했다. 그 선택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삶의 결을 바꾸는 힘을 지닌다. 무엇을 얻었는가보다 무엇을 내려놓았는가가 인간의 깊이를 결정한다는 사실을 그는 자신의 일상으로 보여준다.

오늘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어쩌면 더 많은 정보나 더 큰 성취가 아닐지도 모른다. 이미 우리는 충분히 많은 것을 알고 있고, 끊임없이 더 많은 것을 요구받고 있다. 그 속에서 마음은 점점 분주해지고, 삶은 점점 무거워진다. 그래서 지금 필요한 것은 더 쌓아 올리는 일이 아니라, 하나를 덜어내는 용기일지 모른다. 사소해 보이는 하나의 욕심, 하나의 집착, 하나의 불필요한 기준을 내려놓는 일. 그 작은 결단이 삶의 방향을 바꾼다.

비움은 단번에 완성되지 않는다.

그것은 매일의 선택 속에서 조금씩 이루어진다. 덜어낼수록 마음은 가벼워지고, 가벼워질수록 시선은 깊어진다. 그 깊어짐 속에서 인간은 자신에게로 돌아간다. 타인의 기준이 아니라 자신의 중심으로, 외부의 소음이 아니라 내면의 침묵으로.

그 여백 속에서

사람은 비로소

자신을 다시 만난다.

삶은 끊임없이 더해지는 방향으로 흐르는 듯 보이지만, 깊이는 언제나 덜어냄의 자리에서 시작된다. 우리는 무엇을 이루었는가를 묻는 데 익숙하지만, 무엇을 내려놓았는가를 묻는 데에는 서툴다. 그러나 인간의 내면은 소유의 총량이 아니라, 비워낸 자리의 밀도로 드러난다.

이 글에서 따라온 한 삶의 궤적은 그 단순한 사실을 조용히 증명한다. 높이 오른 자리에서 스스로 내려오는 선택, 넓은 공간을 버리고 좁은 자리를 택하는 결단, 채우기보다 비우는 방식으로 삶을 다시 세우는 태도. 그 모든 과정은 결핍이 아니라 방향이었다.

전영애 교수의 삶은 거창한 선언으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외려 말없이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하나의 사유가 어떻게 존재의 방식으로 완성되는지를 보여준다. 지식은 쌓일 수 있지만, 태도는 선택해야 한다.

그 선택은 언제나 가장 낮은 자리에서 이루어진다.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는 자리, 삶을 앞에서 이끄는 대신 뒤에서 돌보는 자리. 그 낮아짐 속에서 인간은 비로소 자신을 잃지 않는 법을 배운다.

우리는 빠른 시대를 살아간다. 더 많이 알고, 더 넓게 가지며, 더 높이 올라가야 한다는 요구 속에서, 삶은 점점 바깥으로만 확장된다.

그 확장은 종종 중심을 비워 둔다. 중심이 비어 있을 때, 아무리 많은 것을 쌓아도 인간은 흔들린다.

그래서 지금 필요한 것은 또 하나를 더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를 덜어내는 일이다. 불필요한 욕망을 내려놓고, 과도한 기준을 비워내며, 자신을 타인의 시선에서 해방시키는 일. 그 비움 속에서 비로소 중심은 다시 채워진다.

인간이 도달해야 할 자리는 어딘가 높은 곳이 아니라,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자리다. 외부의 확장이 멈출 때, 내부의 세계는 열리고, 소유가 줄어들 때 사유는 깊어진다. 그 깊어짐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삶 전체를 바꾸는 힘을 지닌다.

비워진 자리에는 침묵이 남고, 그 침묵 속에는 더 이상 설명되지 않아도 되는 진실이 머문다. 그 진실은 크지 않지만 오래 남는다. 화려하지 않지만 흔들리지 않는다.

삶은 얼마나 많이 가졌는가로 완성되지 않는다.

얼마나 덜어내고 남았는가로,

그리고 그 남은 것으로 얼마나 온전히 살아냈는가로 완성된다.

여백의 빛 앞에서

— 전영애 교수님께 드립니다

청람 김왕식

높은 자리에 오르셨음에도

더 낮은 자리로 걸어가신

그 걸음 앞에

조용히 머리를 숙입니다

세상이 이름을 불러

빛으로 세우려 할 때에도

교수님께서는

스스로의 빛을 덜어내시어

여백으로 남으셨습니다

많이 가지는 길이 아니라

덜어내는 길을 택하신 그 뜻을

감히 다 헤아릴 수 없으나

그 고요한 선택이

오히려 더 깊은 울림으로

다가옵니다

아침마다 흙을 만지시며

말없이 풀을 뽑으시는 손길 속에

삶을 섬기는 태도가

겸허히 배어 있음을 느낍니다

좁은 방 한켠에 머무르시면서도

생각은 넓은 하늘처럼 펼치시는

그 사유의 깊이를

멀리서 조용히 우러릅니다

덜어낼수록 더 또렷해지는 중심

비워낼수록 더 밝아지는 마음

교수님께서 살아내신 그 길은

한 줄의 가르침이 아니라

한 편의 삶으로 남아

오래도록 사람을 이끕니다

말씀하지 않으셔도

이미 충분히 전해지는 것

드러내지 않으셔도

이미 깊이 닿는 것

그 여백의 빛 앞에서

오늘도 다시 한 번

배움의 마음으로 서게 됩니다

부디 그 고요한 걸음이

오래도록 이어지시어

많은 이들의 삶에

따뜻한 등불이 되어 주시기를

삼가 기원드립니다

ㅡ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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