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찰

남지심 작가를 모시고 차담 "문학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 — 사람의 본향으로 돌아가는 길 ㅡ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남지심 작가를 모시고 차담 "문학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 — 사람의 본향으로 돌아가는 길 2026.04.30
남지심 작가를 모시고 차담 "문학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 — 사람의 본향으로 돌아가는 길

□ 왼쪽 여성 김지수 교수, 황성구 이어도문학회장, 남지심 선생님, 남병근 경찰문학회장, 맨오른쪽 이희국 월간 문예사조 문인협회 회장

문학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 사람의 본향으로 돌아가는 길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 인사동, 말보다 마음이 먼저 앉은 자리

2026년 4월 30일 점심, 인사동의 한 골목 안 카페에 문학을 오래 살아온 사람들이 모였다.

남지심 선생을 중심으로 이어도문학회장 황성구 시인, 경찰문학회장 남병근 시인, 월간문예사조 문인협회 회장 이희국 시인, 단국대 연극과 김지수 교수가 함께했다.

이날의 만남은 단순한 차담이 아니었다. 서로의 안부를 묻는 자리였으나, 어느 순간 대화는 자연스럽게 문학의 본질로 흘러갔다. 빠르게 변하는 시대, 깊이 읽기보다 빨리 소비하는 시대 속에서 문학은 과연 어디에 서 있어야 하는가. 그 물음은 참석자 모두의 가슴에 오래 머물렀다.

인사동의 느린 공기는 대화를 재촉하지 않았다. 말은 낮아졌고, 생각은 깊어졌다. 그 자리에서 문학은 책장 속의 장르가 아니라, 사람을 살피는 마음의 방식으로 다시 놓였다.

■ 남지심 선생 — 홍익인간을 문학으로 실천하는 작가

대화의 중심에는 남지심 선생이 있었다. 그는 문학을 거창한 이론으로 설명하지 않았다. 다만 오래 살아온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낮고 단단한 목소리로 말했다.

“문학은 결국 사람을 살리는 일이오.”

이 한 문장 안에 남지심 문학의 뿌리가 들어 있었다. 그의 문학은 사람을 가르치려 하지 않는다. 대신 사람의 마음을 보듬고, 다친 곳을 함부로 헤집지 않으며, 그 안에 본래부터 깃들어 있던 빛이 스스로 드러나도록 돕는다.

남지심 선생은 홍익인간의 이념을 문학으로 실천하는 작가다. 사람을 널리 이롭게 한다는 말은 그에게 구호가 아니다. 한 사람의 마음을 귀히 여기고, 상처 입은 존재를 함부로 판단하지 않으며, 누구에게나 돌아갈 수 있는 내면의 본향이 있음을 믿는 태도다.

그의 문학정신은 ‘구원’이라는 큰 말보다 ‘배려’라는 낮은 말에 가깝다. 사람을 고치려 하기보다, 사람 안에 이미 있는 선함과 존귀함이 스스로 피어나도록 기다리는 문학이다. 그래서 그의 글은 독자를 몰아세우지 않는다. 독자의 마음 앞에 조용히 앉아, “당신 안에도 아직 꺼지지 않은 빛이 있다”고 말해주는 듯하다.

■ 황성구 시인 — 온기로 남는 언어의 힘

이어도문학회장 황성구 시인은 남지심 선생의 말에 깊이 공감했다. 그는 시의 본질을 기교보다 온기에서 찾았다.

시인은 언어를 다루는 사람이지만, 결국 독자에게 오래 남는 것은 언어의 재주가 아니라 마음의 온도라고 했다. 화려한 수사는 순간 눈길을 끌 수 있으나, 사람의 마음에 오래 머무는 것은 진심의 결이라는 것이다.

황성구 시인의 문학관은 바다를 닮아 있다. 이어도라는 상징을 통해 보이지 않는 세계를 바라보고, 말해지지 않는 침묵 속에서 더 깊은 뜻을 찾는다. 그의 시에서 중요한 것은 큰 목소리가 아니라 오래 남는 울림이다.

그는 이날 대화에서 문학이 독자를 설득하려 해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문학은 설명으로 이기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스며드는 방식으로 남아야 한다. 그에게 좋은 시란 읽는 순간보다 읽고 난 뒤에 더 깊어지는 글이다. 독자가 어느 날 문득 다시 떠올리고, 자신의 삶에 비추어보게 되는 문장, 바로 그것이 시의 힘이다.

■ 남병근 시인 — 사건 너머의 마음을 보는 문학

경찰문학회장 남병근 시인은 오랜 현장 경험을 지닌 사람답게 문학의 역할을 현실의 깊은 자리에서 바라보았다.

그는 사람이 무너지는 것은 사건 그 자체보다, 그 사건 뒤에 남은 감정 때문이라고 했다. 법과 제도는 사건을 정리할 수 있지만, 사람의 마음에 남은 두려움과 슬픔, 억울함과 외로움까지 완전히 해결해주지는 못한다.

바로 그 지점에서 문학의 자리가 생긴다. 문학은 말하지 못한 감정을 대신 말해주는 통로가 된다. 스스로도 설명하지 못했던 상처에 이름을 붙여주고, 혼자라고 여겼던 고통이 실은 인간 모두의 보편적 경험임을 깨닫게 한다.

남병근 시인의 말은 문학이 현실과 동떨어진 장식이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웠다. 문학은 삶의 현장에서 더 절실해진다. 울지 못한 사람에게 울 수 있는 언어를 주고, 견디기 어려운 사람에게 견딜 수 있는 마음의 손잡이를 건넨다.

그에게 문학은 감정의 피난처이자, 다시 일어서는 내면의 질서다.

■ 이희국 시인 — 치유를 넘어 공명으로

월간문예사조 문인협회 회장 이희국 시인은 문학의 역할을 ‘치유’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공명’으로 확장했다.

그는 문학이 상처를 어루만지는 데서 그쳐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한 사람의 아픔이 다른 사람의 마음속에서 다시 울릴 때, 문학은 비로소 완성된다는 것이다.

아무리 아름다운 문장이라도 독자의 삶과 만나지 못하면 그것은 기록에 머문다. 그러나 한 줄의 문장이 독자의 기억을 흔들고, 그 사람의 지나온 시간을 다시 바라보게 한다면 그것은 문학이 된다.

이희국 시인의 관점에서 문학은 개인의 감정을 보편적 정서로 확장하는 힘이다. 한 사람의 눈물이 여러 사람의 마음에서 다른 빛으로 되살아날 때, 문학은 사적인 고백을 넘어 공동의 울림이 된다.

그의 말은 이날 차담의 깊이를 더했다. 문학은 단순히 위로하는 언어가 아니다. 서로 다른 삶을 연결하고, 서로의 고통을 이해하게 하며, 마침내 사람과 사람 사이에 보이지 않는 다리를 놓는 언어다.

■ 김지수 교수 — 속도의 시대에 깊이를 지키는 문학

단국대 연극과 김지수 교수는 오늘의 문학이 처한 환경을 디지털 시대의 변화 속에서 짚었다.

그는 이야기의 형식은 바뀌었지만,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종이에서 화면으로, 활자에서 영상으로, 문학의 전달 방식은 달라졌지만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야 한다는 핵심은 그대로라는 것이다.

오늘의 시대는 빠르다. 짧은 영상, 즉각적인 반응, 빠른 소비가 일상을 지배한다. 그러나 김지수 교수는 바로 그렇기 때문에 문학은 자기만의 속도를 지켜야 한다고 보았다.

문학은 빠르게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천천히 스며드는 것이다. 한 번 보고 잊히는 콘텐츠가 아니라, 시간이 지난 뒤에도 다시 떠오르는 내면의 장면이어야 한다. 느리게 읽히지만 깊이 남는 것, 그것이 문학이 끝내 포기할 수 없는 자리다.

그의 발언은 문학이 시대를 외면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었다. 오히려 시대를 정확히 이해하되, 그 속도에 휩쓸려 자기 본질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었다. 문학은 유행을 좇는 언어가 아니라, 시간을 견디는 언어이기 때문이다.

■ 박경리와 박완서 — 삶이 문학이 되는 순간

이날 남지심 선생은 박경리와 박완서 두 작가에 대한 기억도 조심스럽게 꺼냈다. 그것은 단순한 회고가 아니라, 문학의 기준을 다시 확인하는 자리였다.

박경리의 문학은 삶 전체가 작품이 된 경우다. 그는 한 인간이 역사와 시대, 고통과 생명을 얼마나 깊이 품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작품은 책상 위에서만 태어나지 않는다. 한 사람이 어떻게 살았는가, 무엇을 끝까지 바라보았는가, 무엇을 외면하지 않았는가에서 문학은 시작된다.

박완서의 문학은 일상에서 출발하지만, 끝내 사람의 깊은 곳을 건드린다. 그의 문장은 화려하게 치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평범한 하루 속에서 인간의 상처와 욕망, 그리움과 허무를 정확히 포착한다. 그래서 독자는 그의 글을 읽으며 자신의 삶을 다시 본다.

남지심 선생이 두 작가를 떠올린 까닭은 분명했다. 문학은 결국 사람의 삶에서 나온다는 사실이다. 문장은 기술로 완성될 수 있지만, 문학은 태도로 완성된다. 삶이 깊지 않으면 문장도 오래 견디지 못한다.

■ 문학은 다시 사람의 본향으로 간다

이날의 대화는 하나의 결론으로 모였다. 문학은 멀리 가는 것이 아니라, 다시 사람에게로 돌아가는 일이라는 점이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본향이 있다. 그것은 태어난 고향만을 뜻하지 않는다. 가장 맑았던 마음, 잃어버렸으나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선함, 상처 속에서도 끝내 무너지지 않으려는 내면의 자리다.

남지심 선생의 문학은 바로 그 본향을 향한다. 사람을 꾸짖거나 단정하지 않고, 마음을 보듬고 배려하여 그 안의 본래 빛이 드러나도록 돕는다. 그의 문학정신이 홍익인간과 맞닿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사람을 이롭게 한다는 것은 결국 사람을 사람답게 회복시키는 일이다.

황성구 시인은 온기의 언어로, 남병근 시인은 현장의 감정으로, 이희국 시인은 공명의 철학으로, 김지수 교수는 시대적 감각으로 그 뜻을 함께 받쳤다. 서로의 길은 달랐지만, 바라보는 방향은 같았다.

문학은 사람을 떠나 존재할 수 없다. 문학이 아무리 새로워져도, 그 중심에 사람이 없다면 오래 남지 못한다. 반대로 한 사람의 마음에 진실하게 닿는 문장은, 시대가 바뀌어도 사라지지 않는다.

인사동의 차향은 오래전에 식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날 오간 말들은 쉽게 식지 않는다. 문학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그 물음 앞에서 이날의 대답은 소박하지만 분명했다.

문학은 다시 사람에게로 간다.

그리고 더 깊이, 사람의 본향으로 돌아간다.

ㅡ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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