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

젖음의 본질에 이르는 길 — 청연 김상희 시인의 시《밤비》를 읽다 ㅡ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평하다

젖음의 본질에 이르는 길 — 청연 김상희 시인의 시《밤비》를 읽다 2026.05.03
젖음의 본질에 이르는 길 — 청연 김상희 시인의 시《밤비》를 읽다

□ 청연 김상희 시인 ㆍ시낭송가

밤비

시인 청연 김상희

그리움 속살거리는 봄밤

땅에서 비가 내린다

하늘에는 잠못드는 꽃들

그리고 나무와 새

밤비의 품에 안긴다

계절을 타고 내리는 그대

어둠을 메고 내리는 그대

땅에서 내리는 생명수

하늘은 겸허히 젖는다

바라는 것도 없고

줄 것도 없는 무아의 경지

그냥

땅이 좋고

밤이 좋고

하늘이 좋아

그렇게 밤비는 내리고

그렇게 밤비에 젖는다

밤비에,

젖음의 본질에 이르는 길

— 청연 김상희 시인의 시《밤비》를 읽다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비가 하늘에서 내린다는 사실을 뒤집는 순간, 시는 이미 하나의 깨달음에 도달해 있다.

“땅에서 비가 내린다”는 첫 구절은 방향을 바꾸는 언어이자, 존재를 다시 바라보게 하는 시선이다.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스며 나오는 것.

이 전환 속에서 《밤비》는 자연의 현상을 노래하는 데 머물지 않고, 존재의 근원을 향해 조용히 걸어간다.

이 시의 중심에는 ‘젖음’이 있다. 그것은 단순한 물리적 상태가 아니다. 그리움이 속삭이는 봄밤, 잠들지 못한 꽃과 나무, 그리고 새들까지 모두가 밤비의 품에 안긴다.

여기서 젖는다는 것은 관계 속으로 들어가는 일이며, 분리된 존재들이 하나의 호흡으로 이어지는 과정이다. 밤비는 외부에서 떨어지는 물이 아니라, 서로를 향해 열리는 마음의 형식이다.

“계절을 타고 내리는 그대 / 어둠을 메고 내리는 그대”라는 구절에서 밤비는 이미 자연을 넘어선다. 그것은 시간과 감정을 함께 짊어진 존재로 형상화된다. 계절을 타고 흐르는 것은 삶의 순환이며, 어둠을 메고 온다는 것은 고요 속에 깃든 깊이를 의미한다. 이때 비는 단순한 대상이 아니라, 생명을 이어주는 매개이며, 존재를 정화하는 흐름으로 자리한다.

이 시가 도달하는 지점은 ‘무아’다. 바라는 것도 없고 줄 것도 없는 상태. 그러나 그것은 공허가 아니다. 외려 가장 충만한 평형이다.

“그냥 / 땅이 좋고 / 밤이 좋고 / 하늘이 좋아”라는 반복은 단순해 보이지만, 그 단순함 속에 도달하기까지의 깊은 여정이 담겨 있다. 무엇을 더하려 하지 않는 자리에서, 존재는 비로소 스스로를 온전히 받아들인다. 밤비는 그 상태를 상징한다. 스며들되 남기지 않고, 적시되 주장하지 않는 방식.

청연 시인의 삶을 함께 놓고 보면, 이 시의 맑음은 더욱 또렷해진다. 도시의 소란을 떠나 전원의 흙내음 속으로 스며든 귀향의 선택, 길섶의 들꽃에 가슴을 부비며 살아가는 태도는 시의 언어와 그대로 맞닿아 있다.

그의 시가 투명한 이유는 표현의 기술이 아니라, 삶 자체가 이미 한 번 걸러진 물처럼 맑기 때문이다. 자연과 마주하며 속삭이는 사랑의 결은 과장되지 않으면서도 오래 남는다.

시인 청연의 시는 크게 말하지 않는다. 대신 작게 스며든다. 그것은 독자를 흔들기보다, 안온히 적신다. 그 젖음은 어느 순간 삶의 결을 바꾸어 놓는다. 말보다 먼저 다가오는 온기, 그것이 그의 시가 지닌 힘이다.

시 《밤비》는 비를 노래하는 시가 아니다. 그것은 존재가 서로를 받아들이는 방식에 대한 시다. 하늘과 땅, 밤과 생명이 하나의 호흡으로 이어지는 순간. 그때 비는 더 이상 떨어지지 않는다. 이미 우리 안에서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ㅡ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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